“거기에 적힌 문구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날, 녀석이 아버지로서 쓴 겁니다. 언젠가 아들에게 주려고.”
“…….”
“바로 당신에게 말입니다. 티노 케이(Tino Key).”
Dear. T. K. ……T. K.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태어나 처음 주변 사물을 인지한 순간부터 부모님은 안 계셨다. 죽었다고 확실하게 들은 건 아니지만 당연히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램에게 묻지 않았고, 램도 먼저 나서서 말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램과 복작복작, 요란하게, 위험천만하게 살다 보면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할 짬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다. 티노는 성격 면에서 램을 쏙 빼닮아서 혼자 있는 게 아무렇지 않았고, 외로움도 타지 않았고, 자신이 흥미가 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 외에는 무관심했다.
티노의 방에 부모님의 사진은 있었다. 때때로 그것을 보며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긴 했지만 지금과 다를 건 없었을 거란 결론을 내리곤 했다. 멀쩡히 살아 있었음에도 연락 한번 안 한 것이 전혀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크게 충격 받지는 않았다. 아마도 램의 성질이 아버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 거겠지.
“그럼 그때 아버지가 절 만나러…….”
“아니요.”
시문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싹둑 잘랐다.
“그것은 기습이 있었던 날, 지원을 하러 갔던 제가 발견한 유일한 물건입니다.”
“그럼……?!”
“전쟁이 끝난 뒤 녀석의 소식과 함께 그것을 전하기 위해 램 공방에 방문했었죠.”
“시문 님이셨군요?!”
시문은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티노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친위대에 들어가서 남들 몰래 찾아서 당당한 모습으로 인사하려 했다. 당신이 그때 구해 준 꼬마가 나라고, 그 꼬마가 이렇게 컸다고…….
티노는 일어나 시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비록 그가 상상해 왔던 재회와는 심하게 많이 달랐지만 마음가짐만은 똑같았다.
“줄곧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문은 정색하며 인사를 받아 주지도, 웃으며 어깨를 두들겨 주지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도 않고 그저 웃었다. 그것은 평소에 그가 지어내던 색깔 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티노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천천히 허리를 펴는 티노를 순간 스쳐가듯 대견하게 보았던 시문은 곧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 되어 물었다.
“자! 이제 어쩌겠습니까?”
“뭐가요?”
“사관학교 말입니다. 티노 군은 녀석의 아들이니 입학조건이 성립되잖습니까?”
“아……!”
당연히 돌아가신 거라 생각해 온 아버지에 대해 듣게 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다. 사관학교 입학 조건 따위가 떠오를 턱이 없었다. 그에 반해 시문은 티노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생각해 왔는지 거침없이 말했다.
“녀석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지면 상당한 귀찮아질 겁니다. 개인적으론 기부 입학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니만큼 저희 집안에서 후원을 해도 의심받지 않을 테죠.”
한 일 없이 받아만 먹으려니 염치 없……진 않았지만 티노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알게 된 일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친위대에 들어가려 했던 이유 중 많은 것들이 허망하게 사라진 참이다. 은인의 정체는 그가 직접 알려 줘서 알게 됐고, 당당한 모습은커녕 또 한 번 목숨을 빚진 상태로 인사를 했으며, 결정적으로 은인은 친위대원이 아니었다.
지금도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많이 퇴색된 건 사실이다. 친위대원인 테이슨의 비열한 모습에 친위대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 버리기도 했고.
“……생각해 볼게요.”
“그러세요. 어차피 당장 정한다 해도 바로 입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예?”
티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시문을 보았다. 그야 정식 모집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딱 그때만 입학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친위대장 후보에까지 올랐던 친구를 둔 시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역시나 시문은 티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램 장인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엑?!”
티노는 앉은 채로 펄쩍 뛰었다. 그리곤 테이슨의 본색을 알았을 때도 짓지 않았던 배신감으로 가득한 눈으로 시문을 바라보았다. 시문과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낸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음에도 그가 약속을 어길 것이라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그랬건만!
“음? 뭐죠, 그 눈빛은? 전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티노 군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던가요?”
“그럼 어째서 할아버지가 시문 님께 말을 남긴 거죠?”
불순한 티노의 눈빛에도 시문은 불쾌감 없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건 티노 군이 가출을 한 것을 알자마자 램 장인이 제게 연락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맹랑한 손자 녀석이 별거 아닌 친위대에 들어가 보겠다고 가출했다며, 어디에 던져 놔도 잘 살 녀석이긴 하지만 세상에 사람보다 무서운 건 없으니 부탁 좀 하자고 말이죠.”
“…….”
뭔가 무척 억울한데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항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시문은 기막혀하는 티노를 보며 한층 재미있어했다.
“덕분에 티노 군이 탈 가능성이 있는 비행선의 시간에 맞춰서 아침부터 사관학교 앞에서 티노 군을 기다렸답니다. 선착장은 혼잡해서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수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사관학교에 올 거라 생각했죠.”
“전 그때 시문 님을 보지 못했는데요?”
“직접 사관학교의 진상을 겪지 않으면 백 번 말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들어갔다 퇴짜 맞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필 테이슨과 마주치더군요.”
시문은 테이슨의 이름을 아무 감정 없이 입에 담았다. ‘경’이란 존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그가 공적이 되면서 친위대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테이슨은 사감을 품을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곧 헤어지겠거니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티노 군을 제 공방에 첩자로 심어 놓으려 들더군요. 외모는 안 닮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케이를 떠오르게 하는 티노 군이니 제가 받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죠.”
확실히 티노가 아니었다면 테이슨이 추천하는 사람을 공방에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절 끌어들이신 건 테이슨과 못 만나게 하려고 그러신 건가요?”
“일을 크게 벌였으니 입막음을 하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요.”
티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해도 할아버지에게 부탁받고 남몰래 자신을 보살펴 주던 사람을 염탐해 버린 것이다. ……뭐, 알고 한 것도 아닌데 이제 와 어쩌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티노 군의 작업이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제 연구에 도움이 될 능력이라는 걸 알았죠.”
거기까지 말한 시문은 바지 주머니에서 영상전송장치를 꺼내서 저장된 영상을 창에 띄우고 티노에게 넘겼다.
“…….”
왠지 이 영상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았던 티노는 떫은 감 씹은 얼굴로 영상전송장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푹 쉬고 영상을 재생시켰다.
「여, 티노! 사관학교에 한 발도 못 들여놨다며? 꼴좋다. 내가 뭐랬냐? 껄껄!」
……역시, 램이다.
「거기다 테이슨 놈한테 걸려들었다고? 선배님이 태어나 자란 곳을 보고 싶었다는 핑계로 와서는 여기저기 염탐하려 들던 놈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어설픈 놈한테 말려들다니. 그래서 넌 아직 멀었다는 거다.」
……역시, 이런 내용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거 아냐? 2년 전부터 사관학교에 입학하려면 가족에게 ‘언제든 전쟁에 동원되어도 좋다’는 동의서를 받아 가야 한다는 거. 그 전에는 성인임에도 학생이라고 소집에서 배제되었거든. 네 방에 있는 관련 책자 발행연도를 보건대 몰랐을 거다. 몰랐지?」
“…….”
「시문에게 적당하다 판단되는 때에 크로이 이야기를 해 주라고 했다. 그 다음에 이걸 보여 주라고 했지. 아버지 이야기 들으니 어떠냐? 그래도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냐?」
영상 속에서 시종일관 얄밉게 웃던 램의 얼굴에 일순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래도 들어가고 싶다면 와라. 써 주마.」
영상은 그걸로 끝났다.
* * *
선착장은 떠나고 도착하는 거대 비행선들로 항상 복잡하다. 그리고 떠나는 자와 돌아오는 자, 여행을 온 자와 여행을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자, 마중을 나온 자와 배웅을 나온 자 등으로 항상 시끄럽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복잡한 곳이 있고, 또 유난히 한적한 곳도 있다. 이곳은 굳이 따지자면 적당히 한적한 곳에 속한다.
떠나는 자, 돌아가는 자 구분 없이 수도 물을 먹은 티를 내려는지 화사하고 화려한 차림새에 온갖 짐들을 카트에 한가득 싣고 들어오는 그들 속에 유독 초라해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이마에 고글을 얹고 촌스러운 옷차림에 낡은 트렁크를 들고 있는 그는 초라한 차림새에 비해 완벽한 무장을 해서 여러 의미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빨간 머리 소년의 이름은 티노.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올 예정이지만 말이다. 사관학교에 들어갈지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램의 영상을 본 순간 고향에 한 번 갔다 와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램을 만나면 그동안 관심 갖지 않았던 부모님 이야기를 물어볼 생각이다. 당연히 돌아가신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7년 전까지 확실하게 살아 있었고, 지금은 실종상태라는 걸 안 것이 일주일 전이다. 심지어 아버지가 차기 친위대장으로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친위대원이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리 되니 어머니도 어딘가에 살아 계신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진다.
고향에 갔다 오겠다는 말을 들은 라디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럼에 절인 건포도를 듬뿍 넣은 파운드케이크와 땅콩버터로 만든 쿠키, 설탕을 두껍게 입힌 빵과 매콤한 향신료를 발라 말린 육포, 삶은 계란과 구운 감자 따위를 잔뜩 챙겨 주었다. 배웅까지 오겠다는 걸 거듭 사양했다. 시문은 고가의 술을 주었는데 이걸 램에게 주면 그의 비웃음 수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거라고 했다.
생각보다 빨리 비행선을 다시 타게 되어 기분이 묘했다. 수도로 오는 비행선을 탔을 때만 해도 친위대원이 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 다짐을 못 지켜 겸연쩍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티노는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비행선의 난간 끝에 가 서자 강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졌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인데 바람까지 부니 뼛속까지 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상쾌했다.
티노는 트렁크를 내려놓고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품이 넉넉한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아직은 불그스름한 상흔이 드러났다. 같은 의사한테 같은 약으로 치료받은 시문은 하루도 안 돼서 흉터도 안 남기고 싹 나았는데 티노는 이제 겨우 건드렸을 때 안 아픈 수준까지 왔다.
아마도 아르카가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고 지혈제만 뿌리고 말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바로 낫지도 않을 텐데 치료한 흔적만 남으면 티노가 곤란해지니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진통제를 먹이고, 과다출혈도 죽는 일이 없도록 지혈하는 것이 당시 아르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시문의 경우 공방 사람들만이 아니라 황금의 어스듐을 노리는 사람들까지 납득시킬 수 있는 변명거리가 필요하기에 그대로 둔 걸 테고.
집으로 돌아가서 램에게 실컷 놀림을 당하고 나면 듀오 루나에 갈 생각이다. 과거 문명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쪼개진 틈새를 타고 내려가다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무빙 워커를 통해 이 층을 더 내려간 뒤, 비상계단으로 삼 층을 더 내려와 철문을 열면 그 안에 아르카가 있을 것이다. 괴짜에, 미남에, 매사 냉담하고 웃어도 인상이 변하지 않는 친구가.
이제는 알 수 있다. 수도에서 만난 아르카가 ‘지금’의 아르카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목걸이가 낡았던 것은 험하게 굴려서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벌써 친위대원이 된 거냐고 비웃을 녀석을 위해 복합형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해 가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시문의 비밀 작업실 얘기를 해 주면 금세 비웃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특히 그 거대한 기계 이야기를 하면 흥분해서 질문을 퍼부을 테고.
그렇게 실컷 놀다가 집으로 가면 방에 걸려 있는 부모님 사진을 보며 새삼 생각에 잠길 것이다. 아마 결론은 평소와 똑같이 나올 테지만.
부웅!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선착장과 비행선을 잇는 사슬이 풀리고 접합부가 떨어졌다.
부우우웅!
길게, 길게 뱃고동 소리가 울리더니 비행선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배웅 나온 지인들과 서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던 사람들이 비행선이 높게 올라가면서 선착장이 작아지자 추위를 피해 객실로 들어갔다.
갑판에 남은 승객은 티노밖에 없었다. 그는 강하고 차가운 바람을 상쾌하게 맞으며 점점 멀어지는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중앙에 떠올라 있는 대형 어스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웃음이 났다. 저것의 씨드를 야금야금 훔쳐 먹던 도둑 회로의 주인이 생각나서였다. 이제 수도의 씨드가 그토록 빈번하게 끊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행선은 상승을 멈추고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수도의 경관이 작아지면서 결국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우면서 복잡하고, 화려하면서 산만한 노블리언의 수도 레나센시아.
티노는 이제는 작아진 그곳을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르고 - 황금의 어스듐 편 완결.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