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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3화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3화
[데일리게임] “외출도 잦아졌고 말이야. 얼마 전엔 성벽에서 다친 일반인의 문병까지 갔었다면서?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아는 아이라서.”

“그래? 하여간 발도 넓어.”

“재미있는 아이야. 알린, 너도 만나면 마음에 들어 할걸?”

배짱만 두둑한 시골 꼬마를 떠올리며 테이슨은 피식 웃었다.

“난 어린애는 딱 질색이야.”

“나이는 어찌 됐든 올해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친 당당한 성인이라고.”

“그래도 싫은 건 싫어.”

“네 마음에 들 만한 아이인데…….”

테이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티노가 그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친위대원과의 접촉은 피하는 게 좋겠지.

스무 살 이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알린은 흥미 없다는 얼굴로 말을 돌렸다.

“그 플로레스라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더라? 신음소리 한 번 안 내는 독종이라고 다들 혀를 차던데?”

“그자가 입을 열면 휘말려 죽어 나갈 사람이 한둘이냐? 되는 대로 내뱉는 것보단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지.”

“전하께선 이번 기회에 정적을 처리할 생각이신 것 같아.”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지.”

왕과 왕실을 수호하는 친위대다. 이번 사태가 국왕의 노림수로 적용한다면 진실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물론 내통자는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지만 이번 일을 적당히 유용하게 써먹은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물론 죽은 현상수배범의 일당들을 토벌할 때는 다른 구실을 붙여야겠지만.

“그런데 말이야.”

“음?”

답지 않게 왜 꾸물거리나 싶어 테이슨은 의아한 눈으로 알린을 보았다. 알린은 공연히 시선을 저편으로 던지며 말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놈 잘생기긴 했지?”

“풋……!”

머쓱하게 말하는 알린의 모양새가 웃겨서 테이슨은 고개를 홱 돌리고 어깨를 떨었다. 대놓고 웃을 수 없어 딴에는 최대한 배려한 거였지만 알린은 그리 여겨지지 않았는지 우악스럽게 등을 두들겼다. 말이 두들긴 거지 테이슨이 아니었으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정도의 강도였다.

“왜 웃고 그래?! 나 말고도 다른 녀석들도 다 그런다고! 심지어 여자들은 전부 한 번씩 가서 구경하고 왔단 말이다!”

“고문관이 남자라서 다행이군.”

“놈을 보고 온 여자들이 고문관을 고문해서 문제지. 얼굴을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라는 둥 머리카락에 손대지 말라는 둥…….”

“하하하! 미적 기준은 종족을 초월하는 모양이군그래?”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린 테이슨을 알린은 불퉁한 얼굴로 보았다.

“그래 봐야 처형될 놈인데 말이야. 설마 잘린 머리통을 서로 가지겠다고 나서진 않겠지? 그건 좀 호러인데.”

“설마 그러겠어? 잘생긴 것도 살아 있을 때의 얘기지. 아, 사진은 찍으려 들지도 모르겠다. 왜 감옥에서는 촬영 금지냐고 투덜대는 소리를 지나가다 들은 적이 있거든.”

“여자들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뭐, 확실히 잘생겼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알린은 그걸 인정하는 것조차 배알이 꼬인다는 얼굴로 투덜댔다.

“내 생전에 귀 큰 놈을 잘생겼다고 하는 날이 올 줄이야.”

“큭큭! 제발 그만 웃겨. 배 아프다고.”

“진짜 아픈 게 뭔지 알려 줄까?”

알린이 솥뚜껑만 한 주먹을 꾹 쥐고 다가오자 테이슨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곤 얼른 말했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어쨌거나 전하의 숙청이 끝날 때까진 죽지 않겠군. 나중엔 공개처형하려나?”

“아직 전쟁 피해도 다 만회 못 했는데 일을 벌일 것 같진 않아.”

알린은 부정적으로 답했다.

“거기다 어쩐지 놈을 공개처형하고 나면 여자들의 충성심이 대폭 약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하하하! 그건 좀 심각한데?”

알린은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테이슨을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이번엔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이 한 말이 좀 웃겼던 것이다. 다행히 테이슨의 웃음을 멈춰 준 사람이 있었다.

“테이슨 경!”

“음?”

돌아보자 친위대 숙소에서 일하는 청소부였다.

“무슨 일이지?”

“웬 꼬마가 와서 테이슨 경을 찾는데요. 급한 일이라면서, 티노라고 그러면 알 거라고…….”

“아!”

테이슨은 대번에 정색하며 물었다.

“어디 있지?”

“정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다.”

바로 움직이려는 테이슨에게 알린이 물었다.

“그 꼬마야?”

“응.”

티노가 ‘급한 일’이라고 찾아올 사안은 하나뿐인지라 같이 가 보겠냐는 예의상의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린 역시 흥미 없다는 얼굴로 물러섰다.

정문 옆에 기대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예의 촌스러운 옷차림에 둔탁하고 두툼한 고글을 낀 붉은 머리 소년은 친위대의 숙소 앞에 있으면서도 긴장하거나 들떠 하는 기색 없이 태평하고 느긋하게 테이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운 모습이었다.

“티노!”

“테이슨 경.”

티노는 친근하게 한 손을 흔들며 테이슨을 맞았다. 그 모습에 정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놀란 눈으로 티노와 테이슨을 번갈아 보았다. 병사가 아니니 경례를 하지 않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래도 친위대원에게 너무 격의 없이 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경비의 기색을 알았지만 테이슨은 신경 쓰지 않았다. 티노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티노가 테이슨을 이렇게 찾아올 용건이야 뻔한 것이라 경비가 없는 쪽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곤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본 뒤에 물었다.

“급한 일이라니?”

“그게…….”

티노 역시 주위를 둘러본 뒤에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창고에 이런 것이 떨어져 있었어요. 시문 님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시문의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자신이 볼 필요가 있을까? 의아해하는 테이슨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티노는 조금은 거만한 태도로 설명했다. 마치 자신이 대단히 유능한 인재임을 피력하려는 듯한 태도라 웃음이 났지만 눌러 삼켰다.

“제가 이걸 주운 뒤에 시문 님이 창고에서 뭔가를 찾는 모습을 봤거든요. 그것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높잖아요?”

그러면서 일단 보라고 내미는 쪽지를 받아서 가로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해가 저물어서 주위가 어두웠기 때문이다.

“……?!”

“내용은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암호일까요?”

티노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테이슨은 뭐라 답할 정신이 없었다. 이것은 암호문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걸 창고에서 주웠다고?”

“예. 뭐가 잘못됐나요?”

티노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을 껌벅였다. 하기야 지식인 중에서도 특별한 교육을 받은 자만이 아는 것을 시골 소년이 알 리가 없었다. 테이슨도 친위대에 들어와서 엑서디움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것을 아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이건…….”

티노의 태평한 기색에 말려 자연스럽게 설명하려던 테이슨은 문득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이렇게 가볍게 발설해도 되는 것일까? 사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테이슨만 알고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나, 시문을 조사하는 일에 티노를 끌어들인 것은 그였다. 게다가 티노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다. 이 쪽지를 챙겨 온 것도 티노고, 시문이 그것을 찾는 모습을 확인한 것도 티노다. 그런 티노가 가지고 온 정보를 숨겨서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

“이건 플로레스라의 언어다.”

“……!”

역시나 티노도 놀란 얼굴로 새삼스럽게 자신이 가지고 온 쪽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써 있는지도 아세요?”

“그래.”

테이슨은 한 줄만 휘갈겨 있는 쪽지를 신중하게 꼼꼼히 뜯어본 뒤에 작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 일을 도모하겠음…….”

“어둠? 일?”

티노는 무슨 소리냐며 테이슨을 올려다보았지만 테이슨 역시 감이 안 잡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티노가 단순하게 상황을 짚고 넘어갔다.

“어쨌거나 시문 님이 플로레스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 거네요? 시문 님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공방 누군가가 플로레스라와 연결되어 있는 거겠군요.”

“그래…….”

쪽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쪽지 자체가 시사하는 바는 컸다. 우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번에 잡힌 플로레스라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탈옥 작전이라든가?”

“……!”

티노는 반쯤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테이슨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틈타서 일을 도모한다. 여기서 어둠이 밤을 뜻하고, 일이 탈옥을 뜻한다면…….

“아니. 밤이라 해도 감옥의 경계가 약해지진 않아. 게다가 그곳엔 비상용 어스듐 라인까지 있으니 완전히 어둠에 잠길 일도 없고.”

“그럼 조명등에 손을 댔을까요?”

“조명등?”

임시 직업이라 해도 직업이 직업이라서인지 티노는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시문 님이 아니더라도 공방 누군가가 플로레스라와 연결되어 있다면 조명등을 건드려 놨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어요? 조명등을 가는 것은 원석 가공 공방에서 종종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감옥의 조명등은 시문 님의 공방 구역이 아닌데?”

“그야 그쪽 구역 직원인 척하면 그만 아닌가요? 제가 성벽의 조명등을 갈러 갔을 때 보니까 직원증만 보여 주면 가볍게 통과하던데요? 같은 업종이라면 신분증이야 쉽게 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날 때부터 귀족인 테이슨은 생각지 못한 소소하고도 단순한 서민적인 발상이었지만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확실히…….”

테이슨은 얼굴을 굳히고 쪽지를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이 시문의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시문을 심문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이 쪽지는…….”

“비밀로 하자고요? 알았어요.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요.”

볼수록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꼬마였다. 테이슨은 설핏 웃고는 숙소가 아닌 길 쪽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자 티노가 물었다.

“감옥에 가 보시게요?”

“아닐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확인해 봐야지.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니까.”

“혼자서 가시게요?”

“되도록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아참, 그렇죠.”

티노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대뜸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뭐?”

테이슨은 생각도 못 했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는 티노를 이런 일에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티노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테이슨 경이 조명등에 대해 잘 아실 리 없잖아요? 전 수습 기술자이긴 해도 원석 가공 공방의 직원이라고요. 당연히 조명등에 대해서도 잘 알죠. 만약 누군가가 조명등에 수작을 부려 놨다면 같은 공방에서 일하는 제가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흠…….”

확실히 그랬다. 테이슨은 명망 높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자랐다. 조명등 따위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그 와중에 티노가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다른 기술자를 불러서 점검하려면 감옥 책임자 분에게 이유를 밝혀야 할 거 아니에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죠?”

“좋아. 하지만 무조건 내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

“염려 마세요!”

“만약 이 일이 오늘 벌어진다면 벌써 밤이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백팩을 써서 달릴 거다. 따라올 수 있겠니?”

“당연하죠!”

빠르게 달려가는 테이슨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티노는 내심 웃었다. 아직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무기 제작 공방의 일반 어스듐 라인을 감옥의 비상용 어스듐 라인과 연결해 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옥의 비상용 어스듐의 씨드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나 티노가 조명등을 보기 위해 감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버텨 줬으면 했다.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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