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블루 클랜 (3)
***
사흘, 또는 칠십여 시간 뒤.
그리고 마탑 40층.
오후 1시, 치안대 옆 공터.
족히 수십에서 수백이 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다들 소문, 또는 권유를 듣고 모인 무법자들이었다.
건기는 미리 준비한 가면을 쓴 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이봐! 다리 아파 죽겠다고!”
“난 아침 일찍부터 기다렸어!”
공터 안쪽에 준비된 단상.
그 앞에 덩치 좋은 조직원들이 일자로 서 있었다.
무법자 몇이 조직원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이내 그들의 발길질에 훅훅 나가떨어졌다.
“다들 조용!”
조직원들 뒤.
미키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돈 벌고 싶어서 왔냐? 이 거지 새끼들아!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야, 줄 세워!”
“넵!”
조직원들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가서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줄 앞에서 한 사람씩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탈락.
어떤 사람은 합격.
조직원들은 ‘외눈’을 끼운 채 빠르게 지원자들을 걸러 냈다.
건기의 차례.
건기의 스탯을 본 조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탯은 좀 어정쩡하지만, 스킬이 있군. 이름이 뭐지?”
건기는 본명 대신 친숙한 다른 이름을 댔다.
“고태구.”
“고, 태, 구. 좋아, 경력은? 싸움 잘해? 살인은 해 봤나?”
“엘프랑 싸워 본 적은 있어.”
“엘프? 이겼어? 됐어, 대답하지 마. 이 따위 스탯으로 이겼을 리가 없지. 하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옆으로 빠져 있어.”
자문자답.
덕분에 건기는 빠르게 합격했다.
건기는 옆으로 빠져서 자신 외에 다른 합격자들을 살폈다.
흉터는 기본이고, 우락부락한 덩치, 거기에 무시무시한 무기들.
그중엔 땅딸보 ‘조’도 있었다.
건기는 먼저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말했다.
“나 이건기야.”
“이건기?”
조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건기를 쳐다봤다.
“사정이 있어서 정체를 숨기고 있어. 그러니 태구라고 불러 줘.”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지.”
다급한 용무는 끝.
건기는 조에게서 조금 떨어져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다.
“다니엘은?”
“설사.”
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니엘은 설사…….”
건기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침대에 누운 채로 설사를 뿜어내는 다니엘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반나절 동안의 면접 후 합격자는 절반 이하인 44명.
합격자들은 조직원들을 따라 어느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내부와 뻥 뚫린 공간.
폐건물은 단 하나의 출입문을 제외하고, 모든 창문과 출입구가 철판으로 꽉 막혀 있었다.
“불길하군.”
조는 건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건기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들은 44명의 합격자들에게 1부터 44까지 쓰인 번호표를 나눠 줬다.
“좋아. 모두 받았지? 그럼 이제 할 일을 알려 주겠어.”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인 미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지금부터 상대방의 번호표를 뺏어라. 30분 뒤 종료하고, 번호표 하나당 5백만 원을 주마. 우리가 사라지면, 시작해.”
번호표 하나당 5백만 원.
이론상 다 모으면 2억 2천만 원.
미키와 조직원들은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겨진 합격자들은 어색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싸우지 않으면 전원 5백만 원씩.
하지만 그러기엔 모인 자들의 자질이 남달랐다.
“우라아앗!”
합격자 중 가장 덩치가 큰 거한이 워해머를 휘둘렀다.
천장과 바닥까지 박살 낼 일격에 다른 합격자 대여섯 명이 쓸려서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건물 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하아아앗!”
마총으로 쏘는 사람.
검으로 찌르는 사람.
곤봉으로 때리는 사람.
스킬을 쓰는 사람.
갖가지 공격이 서로를 향했다.
건기는 레이피어와 단검,
조는 방패와 검을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다른 합격자들을 견제했다.
“피해!”
건기는 조를 밀치며 잠시 등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등 사이로 한 줄기 광선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쳇!”
건기는 광선이 날아온 방향으로 단검을 던졌다.
광선을 쏜 저격수는 마총으로 날아온 단검을 막았다.
마총, 스나이퍼 라이플.
단발식 마총이지만, 그 위력과 사거리는 보증되는 무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무기여도 망가지면 무용지물.
건기가 던진 단검은 라이플의 공이치기를 부러뜨렸다.
“망할 자식!”
저격수는 라이플 앞에 총검을 달았다.
그리고 건기에게 돌진했다.
“번호표를 내놔!”
“지랄하네.”
건기는 레이피어 끝을 저격수에게 향한 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저격수가 휘두른 라이플을 피해 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그었다.
“커어어억!”
건기가 벤 다음엔 조가 방패로 저격수의 머리를 강타했다.
저격수는 두 사람의 연계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조는 쓰러진 저격수로부터 번호표를 챙겼다.
“좋았어.”
두 사람은 또 등을 맞댄 채 다른 합격자의 공격에 대비했다.
“실력이 제법인데?”
이번엔 3인조.
도끼맨, 검사, 단검잡이.
외눈을 끼고 있던 검사는 건기와 조의 스탯을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
“허접하군.”
셋은 눈빛을 교환하며 넓게 흩어졌다.
그러고는 둘을 에워싼 채 동시에 달려들었다.
“팀플레이로 붙자는 건가.”
건기는 정면으로 다가온 검사의 장검을 마주했다.
조는 방패로 도끼맨의 도끼를 막았다.
그리고 남은 단검잡이.
둘은 동시에 다리를 뻗어 옆에서 접근해 온 단검잡이를 걷어찼다.
“하앗!”
건기는 레이피어로 원을 그리며 검사의 검을 튕겨 냈다.
그리고 발로 저격수의 라이플을 차서 한손으로 잡아 휘둘렀다.
“크윽!”
검사는 몸을 뒤로 쭉 빼면서 총검을 피했다.
그리고 장검을 위로 세워 건기에게 수직으로 내려쳤다.
“하아아앗!”
건기는 레이피어와 라이플을 교차해서 검날을 막았다.
그러나 검사가 힘을 주며 누르자, 금세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근력은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은데?”
검사는 건기를 약 올리며 더욱 힘을 줬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단검잡이가 옆에서 다시 건기에게 다가왔다.
“받아라!”
단검잡이의 단검이 건기의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건기는 버티던 레이피어를 옆으로 돌리며 장검을 옆으로 흘렸다.
힘만 주던 검사는 균형을 잃으면서 그대로 단검잡이의 손을 찍고 말았다.
“으아아악!”
단검잡이의 손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건기는 그 틈을 타 총검으로 그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리고 라이플에서 아까 자신이 던졌던 단검을 빼내 손에 들었다.
“하앗!”
검사는 한 번 더 힘으로 건기를 압박하려 했다.
건기는 조와 등을 맞댄 채 그에게 외쳤다.
“바꿔!”
조는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휘리릭 한 바퀴 돌아 건기와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장검을 방패로 막은 후 검으로 검사의 허벅지를 그었다.
건기는 조와 자리를 바꾼 후 도끼맨의 도끼를 옆으로 피했다.
느려터진 도끼는 날렵한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냥 땅에 박혔다.
“젠장!”
도끼맨은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건기가 그의 옆으로 파고들어 목에 칼을 댄 뒤였다.
“도끼에서 손 떼.”
도끼맨이 순순히 손을 들자, 건기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단검으로 찔렀다.
“크아아악!”
그렇게 3인조는 무장해제.
둘은 번호표 셋을 챙겼다.
“죽어라!”
이번엔 두 사람을 향해 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든 워해머에는 피가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
“도망쳐.”
건기는 빠르게 후퇴를 선택했다.
맞서 싸우고 싶어도,
거한의 몸에 나 있는 수많은 생채기가 양쪽의 전력 차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둘은 다른 합격자 사이로 숨어들며 도망쳤다.
다행히 거한은 금세 둘을 포기,
다른 합격자를 습격했다.
“그만!”
호루라기가 울리며 미키와 조직원들이 다시 등장했다.
그들은 번호표를 가진 합격자들을 선별해 따로 세웠다.
그리고 탈락한 이들은 전부 건물 바깥으로 끌어냈다.
거한 폰, 15개.
조르조 삼형제, 8개.
검객 삼문, 6개.
태구와 조, 6개.
도박사 아틀라스, 4개.
무법자 벤 4개.
피터 1개.
미키는 목록에 쓰인 이름들을 큰소리로 호령한 후, 맨 아래 이름을 가리켰다.
“이 자식은 집에 보내. 자기 번호표 하나 겨우 지키는 약골은 필요 없어.”
“넵!”
‘피터’에 빨간 줄이 찍찍 그어졌다.
이로서 남은 사람은 여덟.
다들 이렇다 할 큰 부상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미키는 그들을 폐건물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그 안엔 호화로운 가구가 놓여 있었다.
“자자, 다들 편하게 앉아. 너희들은 최고임을 증명했어. 탈락한 다른 병신들보다 훨씬 우월하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시지.”
검객 삼문.
그는 허리춤에 찬 직도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말했다.
“돈은 어디 있어?”
삼문의 말에 다른 합격자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사람을 죽이든, 괴상한 의뢰를 수행하든 모두 돈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철컥.
미키 주변에 있는 조직원들이 허리춤에 찬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러자 미키는 위아래로 크게 양팔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워워워. 다들 진정해. 돈은 줄 거야. 넌 번호표 여섯 개니까, 3천만 원이지? 돈은 반드시 지급될 거야. 마지막 일만 끝나면…….”
“마지막 일?”
삼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미키와 조직원들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때 다른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는 방문자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어, 어서 오십시오.”
흑발의 미청년, 안드레멜
그의 외모는 성별을 초월해,
보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단 한 사람, 건기만 빼고.
‘저 새끼가 왜 여기서 나와?’
건기는 마총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만약 있었다면, 즉시 꺼내서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안드레멜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 서서 합격자들에게 말했다.
“마지막 시험은 간단하다.”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거기엔 작은 사탕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걸 먹으면 된다.”
합격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분위기는 한결 누그러졌지만, 불안감은 더욱 늘어났다.
“그게 뭔데? 발기부전 치료제?”
조르조가 머리에 쓴 중절모를 푹 누르며 물었다.
그의 말에 두 동생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가치를 증명하는 약이다.”
“가치는 너나 증명하시고, 난 돈 먼저 받아야겠어.”
삼문은 안드레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안드레멜은 알약 하나를 집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먹으면 십억을 주지.”
“뭐?”
“먹으면 십억, 네 가치를 증명하면 백억이다.”
불신으로 가득했던 삼문의 얼굴이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십억과 백억.
미키와 조직원들은 아예 입을 쩍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면서 안드레멜에게 물었다.
“저희가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안드레멜은 그들을 무시한 채 한 번 더 삼문에게 말했다.
“먹어라.”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미친 짓.
하물며 극약일 가능성도 있었다.
삼문은 긴장감에 거친 숨을 내쉬면서 안드레멜을 노려봤다.
“돈부터 줘. 그럼 먹어 주지.”
안드레멜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수표를 꺼내 삼문에게 내밀었다.
삼문은 수표를 확인했다.
MGF 발행 무기명 수표.
정확히 십억 원.
위조가 아닌 진품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움켜쥔 후 순순히 알약을 받았다.
“백억은 어떻게 받는 거지?”
안드레멜은 인벤토리에서 외눈을 꺼내 눈에 낀 후에 대답했다.
“먹고 나면 알게 된다.”
건기도 황급히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외눈을 꺼냈다.
그리고 가면을 들추며 외눈을 끼웠다.
***
[등급 : B]
[근력 : B] [순발력 : B]
[지구력 : C] [지력 : C]
[스킬 : 없음]
***
삼문의 스탯.
스킬이 없단 점만 제외하면,
꽤 준수한 스탯이었다.
삼문은 알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단번에 꿀꺽 삼켰다.
잠시 대기.
몇 분 정도 가만히 있었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