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블루 클랜 (2)
“안녕하세요?”
건기는 인사를 하며 노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노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탁하고 생기 없는 눈동자.
노인의 눈은 죽어 있었다.
그는 노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이봐, 기다려!”
다니엘도 건기를 따라 가게를 나왔다.
그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잘 먹었어. 난 키가 커서 항상 남들보다 더 먹어야 하거든.”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뭔데?”
“혹시 어딜 가야 ‘모래가루’를 살 수 있는지 알아?”
“모래가루? 글쎄? 난 좀도둑질까진 해도 약은 안 하거든.”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모래가루.
그것은 1층 항구에서 철저하게 물자를 통제하는 마탑 안에서 유일하게 유통되는 마약이었다.
모래갈대의 꽃가루가 재료라는 것 외에 어떻게 가공되는지에 대해선 일급비밀.
일반인은 모래갈대가 아무리 많아도 제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마 이 시장 어딘가에 공급처가 있지 않겠어? 근데 만약에라도 약은 하지 마. 너무 비싸거든. 그 돈이면 갈대죽을 먹는 게 낫지.”
다니엘의 말에 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마약을 경계하는 이유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사흘 뒤에 보자고!”
다니엘이 떠나가고,
건기는 다시 홀로 시장 구경을 다녔다.
그는 목록에 적힌 물건을 구매하는 한편, 어딘가에 있을 모래가루의 판매책을 찾았다.
하지만 어느 가게를 들어가 물어보든 다들 고개를 저었다.
간혹 갈대죽 가게의 노인처럼,
중독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다들 죽은 눈을 한 채 주변에 반응하지 않았다.
“흐음.”
목록에 적힌 물건들도 차례차례 채워지고, 마지막 남은 건 무기.
건기는 무기점에 들어섰다.
“계세요?”
정적.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도어벨이 울렸음에도 주인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건기는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진열된 물건을 구경했다.
“노멀소드는 없는 건가.”
노멀소드는 하급 무기.
40층 정도가 되면,
오히려 구하기 힘들었다.
대신에 진열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중병기들이었다.
“흐음. 지금 내 근력으로는 노멀소드가 딱인데…….”
그림의 떡.
건기는 자신의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무기를 찾았다.
“레이피어?”
가늘고 긴 검.
건기는 진열대에서 레이피어를 집어서 들었다.
노멀소드와 비교했을 때
무게는 비슷하기에 건기의 근력 스탯엔 딱이었다.
“날이 잘 휘니까, 베고 찌를 때 주의해야겠어.”
건기는 시험 삼아 허공에 검을 찔렀다.
막 쓰기 쉬운 노멀소드와 달리 레이피어는 작은 힘에도 검날이 요동치면서 반동이 느껴졌다.
“하앗!”
쾌걸 조로를 흉내 내며,
허공에 Z자 그리기.
건기는 레이피어를 든 채 주인을 불렀다.
“사장님! 계세요!”
철컥.
가게 안쪽 문이 열리며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기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가 중독자임을 알아챘다.
다만, 여태까지 본 중독자들에 비해 그 정도가 아직 약했다.
“용건이 뭐야?”
“이 레이피어랑 단검 몇 자루를 사고 싶은데.”
“레이피어는 천6백만, 단검은 한 자루에 4백만이야.”
건기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잔액을 확인했다.
남은 돈은 2천2백만 원.
레이피어와 단검을 하나씩 사면,
딱 2백만 원이 남았다.
“혹시 모래가루 어디서 사는지 아시나?”
돈을 건네기 직전,
건기는 마지막인 셈치고 주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나 주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극구 부인했다.
“나, 나도 몰라. 빠, 빨리 돈이나 주고 나가.”
주인이 건기에게 내민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것은 긴장해서가 아니라 금단증상 때문이었다.
건기는 그것을 보고는 한 번 더 주인을 떠봤다.
“물건 판 돈으로 약 사러 갈 거지? 그럼 나도 사게 해 줘. 어디 가면 살 수 있지?”
“어, 얼마나 필요한데?”
주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금씩 건기에게 말려들었다.
“1억 원어치.”
“너, 너 뭐 하는 놈인데?”
“이건기.”
‘이건기.’
주인은 잠시 중얼거리더니, 건기로부터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냅다 진열장에서 철퇴 하나를 집어서 건기에게 휘둘렀다.
“읏!”
쿵.
철퇴의 무거운 부분이 건기 옆 진열장을 깔아뭉갰다.
진열장은 산산조각이 났고,
진열되어 있던 무기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근력이 받쳐 주지 않아서 빗나간 것이었다.
스탯이 낮은 주제에 대단한 무기를 쓰면 안 되는 이유.
주인은 몸소 그것을 건기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장난하냐?”
건기는 코웃음을 치면서 천천히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든 레이피어 끝으로 주인의 아래턱을 눌렀다.
“직접 알선해 주기 싫으면 그냥 장소만 알려 줘. 나머진 내가 직접 할 테니까.”
주인은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에 무어라 적어서 건기의 손에 쥐여 주었다.
건기는 메모지의 내용을 읽고는 레이피어를 그의 턱에서 뗐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남는 돈은 소개비로 받아라.”
건기는 레이피어와 단검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주인이 알려 준 장소로 향하는 대신,
얌전히 숙소로 돌아갔다.
“아이고…….”
태구는 고주망태가 되어 주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소중히 머리를 덮고 있어야 할 가발은 그의 신발바닥에 있었다.
주인은 건기를 발견하자,
반가운 반, 불만 반을 섞어서 그를 불렀다.
“손님, 일행분 데리고 제발 올라가 주세요.”
“예예, 죄송합니다. 계산은 나중에 한꺼번에 할게요.”
건기는 태구의 신발에서 가발을 떼어 내 그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그를 질질 끌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태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여보! 우리 딸! 이 아빠는…… 아빠는 우리 가족을……!”
건기는 모히칸 가발을 집어서 태구의 입에 물렸다.
“다녀오셨어요.”
윌리는 호실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반겼다.
그는 마총을 분해해서 깨끗하게 닦는 중이었다.
“꼼꼼히 닦아.”
건기는 태구를 침대 옆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윌리에게 말했다.
“일정을 변경해야겠어. 사흘 더 여기 머물 거야. 괜찮은 일거리가 들어왔거든.”
“무슨 일인데요?”
“물주를 찾는 일.”
건기는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
옐로우 클랜 산하,
블루 클랜의 아지트.
“으아아아!”
비명 소리가 울렸다.
사방이 꽉 막힌 방 안.
창문 하나 없이 삐걱대는 천장등 하나만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니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은 바깥으로 새어 나갈 걱정이 없었다.
서걱서걱.
남성의 비명은 계속 이어졌다.
톱.
나무 손잡이에 삐죽삐죽한 톱니를 가진 금속판.
흔히들 알다시피 나무를 절단할 때 쓰는 공구였다.
그걸 사람한테 쓰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묶인 남성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괴로움을 줄이고자 소리를 지르는 게 전부였다.
톱니 사이사이에 핏덩이가 엉기고, 톱날 옆면에 살점 찌꺼기가 듬성듬성 붙을 때쯤 톱질이 멈췄다.
손이 썰린 당사자는 혼절.
전신이 땀으로 젖은 것은 물론이고, 앞뒤에서 지린 오물로 인해 악취가 진동했다.
무기점 주인.
그는 건기에게 클랜에 대해 발설한 죄로 끌려온 것이었다.
그 손을 자른 남성.
미키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몸부림치면 안 썰린다고 했잖아!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미키는 톱을 내던지고는 기절한 무기점 주인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방구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다 끝났습니다, 형님.”
미키의 형님.
리텐밍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키에게 말했다.
“안 뒈지게 지혈하고, 깨어나면 풀어 줘라.”
미키는 인벤토리에서 붕대와 지혈제를 꺼내 방금 자신이 자른 팔에 응급처치를 했다.
“그냥 풀어 줍니까?”
“아직은 쓸모가 있어. 근데 이름이 ‘이건기’라고 했단 말이지?”
“예. 손 잘리면서 한 말이니, 사실일 겁니다.”
“그 이건기가 우리 구역에 왔단 말이지? 녀석이 왜 우리 뒤를 캐고 다니는 거지?”
“그것까진 모르겠다고 합니다. 애들 풀어서 잡아 올까요?”
미키의 말에 리텐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그놈이 진짜 이건기란 확신도 없잖아? 그냥 이름만 사칭하는 어중이떠중이겠지.”
“그럼 약국은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은 유지해. 지금 장소가 딱 좋아. 대체하기도 힘들고. 게다가 그 자식, 그것만 물어보고 나서 그냥 돌아갔다며?”
“예, 그렇습니다.”
“이건기는 그 천하의 파이톤을 쓰러뜨린 실력자야. 게다가 14층 마을을 습격한 엘프들을 혼자서 쓰러뜨렸다고! 만약 진짜였다면, 진작 약국 가서 깽판치고 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진짜가 와도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소문대로면 이미 S급이란 소린데, 그럼 진작 3대 세력 중에 한 곳에서 접촉했을 겁니다.”
3대 세력.
MGF, 길드, 클랜.
세 곳 모두 S급 각성자를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럼 거품이 있단 소리냐?”
“그럴 겁니다. 형님, 시간 되셨습니다. 가시죠.”
리텐밍은 의자 가까이 걸어와 손수 바닥에 떨어진 팔을 주웠다.
그리고 미키를 데리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방 밖에 펼쳐진 통로.
그는 천장, 벽, 바닥이 비닐로 뒤덮여 있는 그곳을 빠른 걸음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크고 녹슨 철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열어.”
끼리릭.
철문이 반쯤 열렸다.
두 사람은 옷이 걸리지 않게끔 조심하며 밖으로 나왔다.
통로 밖 역시 어느 건물의 내부.
문을 열어 준 사내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계속 걸었다.
허름하던 외관은 걸음이 계속될수록 점점 호화롭게 변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한 사람 앞에서 멈췄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요.”
리텐밍은 잘린 팔을 상대에게 내밀었다.
잘린 팔의 단면에선 아직 피가 뚝뚝 떨어졌다.
상대는 상당한 미청년.
이름은 ‘안드레멜’이었다.
긴 흑발.
‘보라색’ 눈동자.
그에서 뿜어지는 고고한 분위기는 주변을 압도했다.
사실 리텐밍은 그를 겁줄 생각으로 팔을 내민 것이었다.
“그쪽 사정엔 관심 없어.”
안드레멜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냉혈한의 표본.
리텐밍은 잘린 팔을 수줍게 등 뒤로 치웠다.
그리고 자신 뒤에 선 미키에게 슬쩍 팔을 넘겼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은 착착 진행 중입니다. 분부하신 대로 애들을 풀어서 강해 보이는 인간을 싹 다 모이도록 했습니다. 사흘 뒤면 공터로 모여들 겁니다.”
안드레멜은 아무 미동도 없이 리텐밍으로부터 휙 돌아섰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열어서 수표 한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리텐밍의 주의는 온통 수표에 쏠렸다.
“헤헤, 감사합니…….”
안드레멜은 수표를 밟으며 방을 떠났다.
그에게 있어 돈이란 그 정도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저런 개새끼가!”
미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금방이라도 안드레멜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리텐밍은 냉정하게 손을 뻗어 그를 말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안드레멜을 응징하는 일이 아니라 수표였다.
“망할 새끼.”
리텐밍은 조심스럽게 수표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수표에 적힌 동그라미 숫자를 셌다.
“흐흐흐.”
백억.
리텐밍은 흡족한 표정으로 수표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신경 쓰지 마라. 저 새끼가 계속 돈을 주는 한, 우린 할 일을 해 주면 그만이야. 족치는 건 돈 다 뜯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목적이 뭘까요? 왜 강한 각성자에 집착하는 거죠?”
“알 게 뭐야. 돈이 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건기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마라.”
안드레멜은 중요한 돈줄.
불안해할 만한 요소는 사전에 차단하는 게 중요했다.
중요한 것은 돈.
계속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놈은 ‘외톨이.’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었다.
“예.”
미키는 리텐밍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명령대로 조직원들을 닦달하며 사흘 뒤를 준비했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