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안되길 바랬다. 무심코 던진 안건이 현실이 될 줄 몰랐다. 그러나 데일리게임 창간 5주년 기념 특별 회의에서 '홍대에서 게임을 외치다' 기획은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말았다. 수 많은 여러 대표급 인사를 만나며 다져진 강철같은 '멘탈'도 붕괴되기 일보 직전. 우리는 홍대 앞을 거니는 어여쁜 여자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게임 좋아하세요?"
햇살이 유독 뜨겁던 6월의 어느 금요일. 우리는 홍대로 향했다. 멤버는 본인(문영수 기자)과 선배 이재석 기자, 때 마침 스케줄이 비었던 박운성 기자(사진)까지 총 3인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홍대 앞을 거니는 수많은 여성들이 휴대폰으로 어떤 게임을 즐기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백명이나.
생면부지 모르는 남에게 말을 건다는 것. 간단한 길 묻기 수준이라면 모르지만 "당신 휴대폰에는 뭘 넣고 다니나요?"정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왕년에 여자 좀 꼬셔본 선수가 아닌 이상에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단 하나. 얼굴에 깔 두꺼운 철판이었다.
홍대를 향하는 동안 속으로 수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거듭했다. 처음 말을 걸때는 이렇게, 또 이런 반응이 나오면 요렇게. 요런 반응이 나오면 저렇게 등 물샐틈 없는 공략을 구상하기 위해 쉴새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재석 기자도 말은 안했지만 꽤나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호남형인데다 한때 잘 나갔던 과거(?)를 가졌던 그였지만 간만에 예전 '감'을 되살리려니 썩 쉽지는 않아 보였다.
여자에게 말붙일 일 없이 사진만 찍으면 되는 박운성 기자만이 이 상황이 썩 재밌어 보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뭘 그냥 하면 되지 뭐"라는 등 강건너 불구경하는 말도 곁들였다.
드디어 도착한 홍대 앞 거리. '불타는 금요일'이라 그런지 오후 무렵의 홍대는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그 곳, 홍대 놀이터로 향했다. 아직은 낮 시간인지 유동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악세사리를 팔러 나온 몇몇 상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는 하염없이 시계만 쳐다봤다.
일단 시작만 하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응원했다. 물론 안다. 홍대역에서 놀이터로 오기까지 우리가 떠나보낸 여자들만 수십 명에 이른다는 것을. 그랬다. 그 처음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뻘줌해하기는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사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말을 걸고 "게임 뭐하세요?"라고 묻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간단히 메모하고 "안녕히가세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면 끝이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키보드 워리어'라는 단어. 말로는 뭔들 못하랴.
더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시작'을 해야 했다. 갑자기 이재석 기자가 "까짓거 그냥 하면 되지"라고 일갈했다. 드디어 한때 날렸던 자신의 과거를 되살려낸 걸까. 그는 자기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인근에 위치해 있던 한 커플.
"저기요 말씀 좀 여쭐게요"
그 남자는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이해가 갔다. 왠 정체 불명의 남자 둘이 자신앞을 가로막았으니 말이다. 삼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아닌가. 껄렁껄렁한 양아치를 상대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지켜내겠다는 결연함이 언뜻 그의 미간을 스친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입에서 니온 말은 "어이 그림 좋은데?"와는 180도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우리나 그 커플이나 서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어진 짧은 침묵.
"아무 게임도 안하는데요" 라며 우리를 올려다보던 여자의 쥐어짜낸듯한 답변을 듣고서야 우리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첫 대답이 '해당없음'이라니. 그래도 드디어 한 건 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뻐했다.
문제는 나였다. 이 죽일 놈의 쪽팔림. 이재석 기자가 이후 서너 무리의 여자들에게 호구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동안 길거리에서 무심히 외면해 왔던 강심장의 대명사, '도를 아십니까'가 떠올랐다. 일면식이 없는 그 누구라도 친근한 표정으로 다가와 세치 혀를 놀려 자신들의 거처로 끌고 간다는 전설적인 존재. 수없이 퇴짜를 맞아도 오뚜기처럼 일어나 다음 타겟을 물색한다던 강철 멘탈의 소유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도를 아십니까'의 정신력이었다.
"나만 계속 시킬 거냐"
짐짓 자신감까지 서려 있는 이재석 선배의 재촉의 수위가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안될 말이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빛나는 리즈 시절은 언제였던가.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한 20대 초반을 떠올리며 패기있게 다가섰다. 목표 대상은 전방 10미터 앞에서 수다를 떨며 다가오는 3인의 아낙네들. 무소의 뿔처럼 꼿꼿이 고개를 치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해롭지 않아요"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최대한 웃는 표정도 유지했다. 그리고 던진 한 마디.
"저기요"
순간 눈치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다름아닌 '벌레씹은 표정'이었다는 것을. 날씨가 너무 더웠기 때문일까. 어느새 땀으로 범벅된 얼굴과 꾀죄죄한 몰골이 그들에게 적지않은 불쾌감을 전해준 듯 싶었다. 표정을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3인의 아낙네느 그렇게 냉랭하게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는 말도 있다만 그 첫 끗발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걸까.
이제 어떻게 할까요 라는 표정으로 선배들을 되돌아봤다. 내게 돌아온 표정은 호랑이같은 인상들. 그랬다. 이렇게 뽑은 칼. 뭐라도 하나는 썰어야 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전방 30미터 앞에 착한 인상의 여고생 3인이 뭐가 그리 신난지 수다를 떨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많아봐야 19살. 한창 왕성한 호기심으로 충만할만한 나이대다. 갑작스레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휴대폰으로 무슨 게임하세요?"라고 믈어도 거리낌없이 답을 들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이보세요, 학생들"
옳거니. 예상이 적중했다. 하늘이 도운게 틀림없다. 이들 고등학생에게는 땀에 절어있는 나조차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걸까. 뭐가 그리 신난지 "어떻게, 어떻게"를 반복하며 그들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묻지도 않는 것을 나서서 답변해주는 배려를 보이기까지 했다. 생애 처음 출고한 기사가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듯, 이들이 즐겨 한다던 모바일게임의 제목도 잊혀지지 않았다.
만족할만한 설문을 끝마쳤다. 여고생 3인의 응원을 받으면서 헤어진 후에 가슴 한켠 어딘가 솟아나오는 감정은 분명 자신감이었다.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뭇 여성이 난데없이 이재석 기자의 번호를 얻어가는가 하면, 자신의 여자친구를 유혹하려 한 것으로 오해한 남자친구와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홍대 인근에서 전단지를 뿌리던 아가씨와 상호 교환하기도 했다. 부서졌던 우리의 멘탈은 조금씩 회복됐고 해가 져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우리는 당초 목표했던 100명의 설문을 끝마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제가 겪은 모험의 전부입니다"
[데일리게임 문영수 기자 mj@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