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왠 떡이냐"
꿈이냐 생시냐. 근무를 땡땡이치고 하루종일 놀고먹고 게임만 하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획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C방에서 24시간 동안 즐기기. 어찌보면 이는 나를 위한 맞춤형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게임 폐인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게임에 매진하던 20대 초반의 기억. 눈도 간도 쌩쌩하던 그 때는 그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있고도 피곤한 줄 몰랐다. 젊음을 다 바친 게임 속 내 캐릭터는 서버에서 이름 날리던 영웅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지금이야 사회생활이라는 치열한 삶의 전쟁을 치르느라 게임 접속량은 격감했지만 예전 한 가닥하던 실력이 어디 갈까.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 손가락 지문 사이사이에 저장된 촉감.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 절묘한 타격감.
다른 한편 걱정도 됐다. 30줄에 접어든 지금, 과거의 강철 체력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전성기 시절에도 24시간을 꼬박 뜬눈으로 지샌 기억은 없었다. 이번 도전이 성공한다면 나 자신도 놀랄 대기록을 세우게 되는 셈이다.
본격적인 PC방 숙식에 돌입하기 앞서 내 몸의 현재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번 기획은 게임을 장시간 이용하면 몸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 파악하는 실험적인 목적도 겸하고 있기 때문. 사무실 인근의 방배 동사무소에서 혈압과 키, 몸무게를 쟀다. 혈압은 정상 수치에 해당하는 119mmHg. 키와 몸무게는 xx킬로그램, xxx센티미터로 측정됐다.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이자리에 되돌아와 오면 된다.
6월24일 17:00 쾌조의 스타트
방배역 인근 모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PC방 내부는 혼잡했다. 방과 후 삼삼오오 친구들과 모여 게임 한판 즐기러 온 10대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식 거래창을 열어두고 잔뜩 표정을 찡그린 아저씨도 눈에 띄었다. 금연법 시행의 여파일까. 너구리 소굴같던 PC방은 쾌적한 공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짐을 풀고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었다. 24시간 동안 앉아 있으려면 무엇보다 의자의 쿠션이 중요한데 푹신함도 이만하면 수준급. 호흡도, 시각도, 생각 모두 푸근했다. 24시간 따위 그냥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6월24일 21:00 으슬으슬 떨렸다
문제없었다. 여유롭기까지 했다. 밤 9시. 일상적인 삶의 패턴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시간대다. 내 주변에도 많은 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PC방의 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저녁을 아직 먹지 못했다는 점. 자장면을 시키자니 PC방 죽돌이처럼 비춰질까 망설여졌고 그렇다고 라면을 먹자니 땡기지 않았다. 푸짐하게 먹은 점심 식사를 떠올리며 일단은 게임에 집중했다.
평소 못해본 신작 게임들을 이번에 몰아서 즐겨보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아먹은 터였다. PC방 PC는 물론 스마트폰, 태블릿PC까지 풀 가동, 3개의 게임을 동시 가동하고 있었다. '네 레벨에 잠이오냐'는 PC방 업계의 명언을 되새기며 그렇게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또 하나 거슬리는게 있다면 PC방 내부가 다소 더웠다는 점이다. PC방 사장님의 절전 운영 때문인지 에어컨의 찬 공기는 간헐적으로 뿜어져나올 뿐이었다. 냉랭한 기운은 자리를 잡지 못했고 내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PC 모니터와 스마트폰, 태블릿PC 3개의 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의 열기는 몹시도 뜨거웠다. 심장 박동수도 조금은 빨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6월24일 23:00 졸리기 시작했다
밤 11시경. 눈꺼풀이 급속도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새벽녘에 들어서야 무게감이 느껴질랑 말랑하던 20대 초반의 나는 더이상 없는 것일까. 게임의 재미가 급속도로 떨어진 시점도 이때였던 것 같다. 마우스를 누르는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시력의 초점도 흐릿했다. 지독한 권태기가 찾아왔다.
위기였다. 적신호가 켜졌다. 이대로 잠들면 모든게 헛수고지.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백팩에 꾸려넣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내 짐을 훔쳐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왼손으로는 백팩을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애꿎은 마우스 버튼만 눌러댔다.
6월25일 01:30 핫식스를 복용했다
25일 새벽이 찾아왔다. 1시 30분경. 처음으로 PC방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죽은 소도 일으킨다는 각성제의 대명사 핫식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평소 커피를 하도 대량 섭취하다보니 커피의 카페인만으로는 몰려드는 잠을 내쫓기엔 무리였다. 라면도 같이 주문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PC방 안은 텅 비다시피 했다. 폐인처럼 라면을 흡입하는 내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찰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라면은 물론 게눈 감추듯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슥슥 해치웠다.
스트레칭을 하다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한 아저씨에 시선이 닿았다. 기억이 맞다면 아까 표정을 찡그리면서 주식 거래창을 들여다보던 아저씨가 분명했다.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슬쩍 곁눈질로 살펴봤다. 그는(이하 롤남) 요즘 대세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기고 있었다.
결코 얕볼 수 없는 PC방 고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묘한 동질감도 느꼈다. 나보다 연배도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졸린 기색 없이 밤을 불태우는데 질 수 없다는 승부감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6월 25일 새벽 2시경. 현재 PC방에 생존해 있는 열혈 게이머는 나와 저 아저씨를 포함 다섯이었다.
6월25일 07:00 물밀듯 몰려온 위기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물론 그럴 것이라는 추측만 들었을 뿐이다. PC방 내부는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꼼짝없이 PC방에 메인지 벌써 14시간이 지났다. 묵묵히 PC방 모니터를 닦고 바닥을 청소하는 저 알바생은 아직까지 집에 가지않고 자리를 뭉개고 있는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짤방' 하나가 떠올랐다. 사흘밤낮을 PC방에서 먹고살던 한 게임 폐인 아저씨와 알바생이 메신저로 나눈 대화를 캡처한 것이었다. 아저씨가 "날 보고 무슨 생각이 드니?"라고 묻자 알바생이 "아저씨처럼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던 그 짤방.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듯 어려보이는 저 알바생에게 난 지금 꿈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가.
6월25일 11:00 결국 눈을 감았다
눈의 초점이 사라졌다. 두 눈의 시점이 모이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사팔뜨기라고 놀릴 정도로 두 눈은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하물며 게임이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몇 시간 전부터 나는 손으로 뭔가를 누르는 행위를 포기했다. 내 대뇌는 필사적으로 두 눈을 감아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기획이고 뭐고 잠부터 청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키보드에 엎드려 자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전 11시다. 생생한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는 새로운 손님들이 슬슬 발길을 들여놓을 시각이다. 생판 처음보는 그들에게도 곡해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끝끝내 잠들지는 못했다. 의문이다. 버스나 지하철 좌석에서는 잠이 솔솔 오던데 PC방 의자에서는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 것일까. 이처럼 극심한 피로감에 몸서리치는데도 말이다. 잠을 청하는 것을 그만두고 억지로 시선을 모니터로 향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롤남'을 살펴봤다. 그는 여전했다. '롤남'을 제외한 나머지 3인의 용사들은 나도 모르는 새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난 뒤였다.
6월25일 12:00 제자리를 찾다
어떤 이유에서건 날밤을 꼬박 세워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간밤에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다가도 날이 밝고 일정 시점이 지나면 피로감이 사라지고 멀쩡해진다는 것을. 나 역시 그랬다. 25일 정오에 접어들자 내 정신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완벽히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한결 버티기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새벽에 마신 핫식스도 약간은 약빨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둔화됐던 손가락들의 움직임도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너시간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게임 속 캐릭터도 주인이 깨어나자 다시금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25일 15:00 자장면을 시켜먹다
극도의 허기를 느낀 것도 이째 즈음이었다. 그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새벽에 먹은 컵라면 한 그릇이 전부. 이대로가다가는 말라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뭐든 먹어야겠다는 본능이 앞섰다.
자장면을 주문했다. 빛나던 폐인 전성기인 20대에도 안하던 짓을 지금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PC방에서 밥을 시켜먹던 꾀죄죄한 아저씨들을 흘겨보던 기억이 난다. 그게 미래의 내 모습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필요없었다. 우선 살고 보는게 중요했다. 나는 지금 사악한 마왕에게 납치된 불쌍한 약자일 뿐이었다. 날 구해줄 구원자는 내 앞에 놓은 새까만 자장면 뿐.
6월25일 16:00 한 시간의 사투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관절을 이리저리 꺾었다. 초조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희열감이 올라왔다. 딱 한시간이다. 한시간만 버티면 이 어두컴컴한 던전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귀를 따갑게 울려대는 중학생들의 고성도 즐겁게 들릴 정도였다. 그래 너희들은 즐겨라. 나는 곧 이곳을 뜬다.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상관없다. 한 시간만 버티면 된다. 한 시간만.
6월25일 17:00 "이거 왜 하자고 한 거야!"
드디어 선배들이 찾아왔다. 생기 어린 표정과 그윽한 미소와 함께. 그와 동시에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PC방에서 24시간을 버티라는 임무. 처음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끝은 처참했던 지옥의 기획. 화장실로 가 내 모습을 살펴봤다. 머리카락은 이마에서 번져나온 땀을 잔뜩 흡수해 꾀죄죄하기 이를데 없었고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30줄에 접어든 나이를 새삼 통감했다. 저질 체력과 그동안 무의미하게 떠나보내온 불규칙한 나날들을 되새겼다.
그러면서도 정체모를 감정도 들었다.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 내 자신에 대한 대견함. 밖으로만 내보내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것만 같은 전역 직후 드는 이유모를 자신감까지. 복합다단적인 감정이 마구 용솟음쳤다. 데일리게임이 창간 5주년을 맞아 재창간을 천명했듯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x랄도 풍년이네"
선배의 일갈을 뒤로 한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롤남'에게는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다. 비록 입밖으로 그의 노고를 칭찬하진 못했지만 그는 실로 대단한 고수였다. 인정.
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금 방배 동사무소로 향했다. 이 험난한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다. 지난 24시간 동안 내 몸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키는 변화가 없었다. 몸무게는 XX킬로그램으로 소폭 감소했을 뿐 큰 차이가 없었다. 혈압 역시 117mmHg로 24시간 전보다 2mmHg 줄었지만 큰 변화라고 보기는 힘든 수치다. 내 심장 박동이 이렇게 요동치는데 의외로 신체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는 결론.
적어도 48시간을 줄곧 앉아봐야 의미있는 변화가 있으려나. 5년 후 데일리게임에 입사할 막내 기자는 누가될 지 몰라도 각오를 좀 해야 될거다.
끝으로 데일리게임 독자님들. 과도한 게임 이용은 몸에 해롭습니다. 자제하세요.
[데일리게임 문영수 기자 mj@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