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한데 모인 이유
"미팅 취소됐다."
때 아닌 이른 더위로 잠깐만 밖을 거닐어도 땀이 쏟아지는 4월의 어느 날. 이재석 데일리게임 기자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원래 일정 대로라면 이 기자는 지금쯤 업계 미녀로 소문난 모 업체 담당자와 미팅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그런 그가 예기치 않게 사무실에 들어선 것이다. 왜 저토록 성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는지, 왜 미팅이 취소됐는지 굳이 묻진 않았다. 뭔가 마른 하늘이 깨지는 것에 준하는 중대한 사안이 이 기자와 미팅 당사자의 만남을 가로 막았으리라는 느낌이 왔다.
"여~ 왔어."
무거운 가방을 내던지고 거칠게 자리에 앉는 이 기자를 향해 이원희 데일리게임 팀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데일리게임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PC방 월간지 '창업과경영'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이 팀장. 사실 그의 속내도 내심 썩 유쾌하진 않았다. 오늘부터 시작될 어마어마한 분량의 마감 지옥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던 것이다. 이 기자를 맞아주는 이 팀장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업무에 대한 짜증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선배."
자리에 벌떡 일어나 반겨주는 이 친구는 한국 e스포츠 산업을 관통하는 데일리e스포츠 핵심축을 담당하는 실력파 기자 강성길. 평소 발군의 게임 실력과 외모로 업계에서 좀 유명한 편으로 평가된다. 바쁜 e스포츠 일정을 소화하다 때마침 내근을 처리할 게 있어 사무실에 있었는데 예기치 못한 이 선배의 일갈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강성길의 얼굴 한켠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일순간 공기가 멈춘 듯한 정적을 깬 건 이 기자 본인이었다. 때 마침 '창업과경영' 꼭지 마감을 위해 '디아블로3: 영혼을거두는자'를 플레이하던 이원희 팀장에게 짧게 한 마디 말을 건넨다.
"선배 뭐 좀 먹었어요?"
이원희 팀장은 표정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드는 걸로 대신 대답했다. 게임 경력 20년이 넘는 원조 게이머이자 게임이라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이 팀장이지만 '디아블로3'가 자랑하는 100% 랜덤 드랍의 힘에는 어찌할 바 없었던 것. 원래는 리뷰를 위해 잠깐 시작했던 '디아블로3'가 어느새 전문 커뮤니티까지 뒤져볼 정도로 이 팀장의 삶 깊숙한 곳에 침투한 상태였다.
"거기 별로 안좋아요. 여기가 더 좋아요."
뜨거운 오전의 햇살이 준 짜증도 이내 잊어버렸다는듯, 이 기자가 냉큼 이 팀장의 모니터로 다가간다. 이 기자 역시 최근 '디아블로3'에 재미를 붙여 아이템 획득에 열을 올려왔다. 실제 그가 육성 중인 마법사 캐릭터의 아이템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선후배 기자들에게 '훈수'를 둘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전날 획득한 아이템 성능을 서로 비교·분석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냉랭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게임의 순기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때 마침 점심 약속이 없어 하릴없이 자리만 뭉개고 있던 나(문영수 기자)는 넌지시 두 선배들에게 제안의 한 마디를 건넸다.
"선배들, 밥은 시켜먹고 균열이나 몇 바퀴 돌까요?"
◆될분될, 안놈안
볶음밥과 짜장면, 서비스로 들어온 군만두 한 접시까지 전투식량 삼은 데일리게임 기자 4인은 그렇게 4월의 단합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마법사·수도사·악마사냥꾼이라는 애매한 조합(개인 프라이버시상 어떤 기자가 어떤 직업을 플레이하는지는 비밀에 둡니다).
'괴수'급 플레이어들이야 현 '디아블로3' 최상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고행6 단계를 자유자재로 돈다지만 바쁜 취재 일정에 쫓겨 게임할 절대 시간이 부족한 우리 기자들의 캐릭터 스펙은 사실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고행3 단계를 돌면 "우와" 함성이 나올 정도랄까.
짜장면 면발을 입속 가득 채운 데일리게임 기자 4인은 그렇게 '디아블로3' 던전 플레이를 시작했다. 확장팩 '영혼을거두는자'의 신규 콘텐츠 '네팔렘의 균열'(무작위 던전)에 도전했다. '네팔렘의 균열'은 '디아블로3'에서 아이템 획득 확률이 가장 높은 던전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누가 가장 먼저 전설급 아이템을 획득하는지 겨루기로 했다. 가장 먼저 전설급 아이템을 획득한 기자에게 선후배 상관없이 커피 획득권을 제공하자는 나름의 부상도 내걸었다. 그렇게, 4월의 치열한 사투가 막이 오르고 있었다.
'디아블로3'를 즐기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격언 하나가 있다. 바로 '될분될, 안놈안'. 풀어쓰면 '될분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된다'라는 뜻이다. 뭔소린고 하니 안될 놈은 100시간 200시간을 쏟아부어도 좋은 전설 아이템을 획득할 수 없고, 될 분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모두가 획득하고 싶어하는 연예인급 아이템을 거머쥘 수 있다는 얘기다.
데일리게임 기자들은 극명하게 갈렸다. 이재석 기자만이 '될분될'이었고 다른 두 기자는 '안놈안'에 해당됐다. 비교적 '디아블로3'를 늦게 시작한 이원희 팀장이 "난 될분인데 아직 안터지는 것 뿐"이라는 공허한 외침만 되내였다.
실제 나는 극명한 안놈안에 해당됐다. 액션RPG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디아블로1'편부터 고2 학창시절을 앗아간 '디아블로2'를 포함해 내로라할 연예인급 아이템을 획득해본 기억이 없었다. 이같은 저주는 '디아블로3'에서도 이어졌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아이템 획득을 위해 틈틈히 게임에 접속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애매한 아이템만 주구장창 얻을 뿐이었다.
이재석 기자는 달랐다. '확률의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걸까. 혹은 블리자드에게 뒷돈이라도 먹인걸까. 그의 장비는 화려했다. 플레이 시간 대비 장비는 무척이나 일품이었다. 데일리게임 기자 중 유일하게 고행 5단계 이상 플레이 도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단연 우리만의 작은 이벤트의 최종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최근 뒤늦게 '디아블로3'에 빠져든 강성길 기자. 그는 화려한 테크니션이다. '리그오브레전드'로 단련한 현란한 손놀림과 타이밍을 읽는 눈은 단연 일품. 하지만 아이템이 최고인 '디아블로3' 세계에서 게임을 뒤늦게 시작한 그의 캐릭터는 아쉽게도 '쫄쫄이' 수준에 불과했다. "선배들 꼽사리 좀 끼겠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 종료. 하지만 100% 확률 게임인 '디아블로3'의 세계에서 전설 아이템의 행운이 강성길 기자에게 내려질지는 아무도 예단하지 못할 일이었다.
◆승리의 여신, 누구에게 미소지었나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모두들 자신이 이 싸움의 최종 승리자가 될 것이라며 생각했다. 게임 속 아바타들은 이같은 주인들의 의지를 엿본 듯. 신명나게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액션에 벚꽃 날리듯 흐트러지는 악의 무리들. 누가 먼저 금빛, 혹은 녹색빛 기둥(디아블로3에서는 전설·세트 아이템 획득시 해당 색깔에 맞는 빛기둥 효과가 연출됩니다)의 주인이 될지 사못 궁금했다.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짜장면을 다 비우고 마지막 하나 남은 군만두까지 먹어 없앨 동안 금빛·녹색빛 기둥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쉴새없이 악마들을 물리쳤건만 돌아오는 보상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확률의신의 가호가 내게 손짓했음을 분명히 느꼈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슬쩍 곁눈질로 선배들을 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한마리의 맹수들을 보는 듯 했다.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비아냥 중 하나인 "게임 못한다"라는 명언이 새삼 떠올랐다. 명색이 게임기자인데. 질 수 없었다. 초조했다. 언제든 금빛 기둥이 떨어지면 곧바로 마우스를 가져가 확인할 준비가 돼 있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
"뭐야 이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갑자기 사무실 내 모든 데스크탑 PC의 전원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데일리게임 사무실 바로 옆 공간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건축 공사의 영향인지 최근 사무실이 이유없이 정전이 될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현상이 바로 지금 벌어진 것이었다. PC방 전원을 갑자기 내려 게임의 폭력성을 검증해 보겠다던 모 방송사의 황당한 뉴스가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가장 거센 거부 반응을 보인 이는 이재석 기자였다. 정말 공교롭게도, 바로 눈앞에 녹색빛 기둥이 떨어지자마자 컴퓨터 전원이 나왔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 시합의 승리자도 단연 자신이라는 강한 어필도 이어졌다. 물론 나를 포함해 이원희 팀장, 강성길 기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이원희 팀장은 짐짓 자신도 녹색기둥을 보았노라며 이재석 수석기자의 입을 막기도 했다.
남은 것은 상처 뿐이었다. 달달한 카페라떼 세 잔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도.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당시 경쟁에 참여했던 데일리게임 식구들은 그날 결정짓지 못한 승부를 꼭 매듭짓자며 나중을 기약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4인의 스케줄은 맞춰지지 않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데일리게임 문영수 기자 mj@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