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게임은 당시엔 유명했으나 시간에 묻혀 점차 사라져가는 에피소드들을 되돌아보는 '게임, 이런 것도 있다 뭐', 줄여서 '게.이.머'라는 코너를 마련해 지난 이야기들을 돌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게.이.머'의 여덟 번째 시간에 다룰 사건은 바로 1999년 3월에 출시된 MMORPG '에버퀘스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게임상에 이벤트 NPC로 존재하던 '케라핌'이라는 드래곤형 몬스터가 풀려나 전 대륙을 그야말로 풍비박산낸 사건인데요. 투명한 외형에 엄청난 강력함을 갖춘데다 시기적으 로도 한국 서버에서 '케라핌'이 난동을 부린 후 얼마 후에 '투명드래곤'이라는 패러디 소설이 나와 이 소설이 '케라핌'을 모델로 쓰여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투명드래곤만큼 강하다는 '케라핌'은?
Kerafyrm the sleeper. 봉인된 자라는 별칭이 있는 '케라핌'은 '에버퀘스트'에 등장하는 이벤트성 NPC로 공략하라고 만든 것인지 의심되는 강함이 특징인 몬스터인데요.
'케라핌'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에버퀘스트'의 드래곤들에게는 같은 종류의 드래곤끼리만 결혼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기고 태어난 금기의 드래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류의 드래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은 케라핌처럼 강력하지만 흉폭함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인데요. '케라핌'은 그 힘으로 수많은 드래곤들을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드래곤의 신 '비샨'에게 도전했다가 무참히 패한 '케라핌'은 무덤에 봉인되게 되는데요.
비샨은 봉인된 자의 무덤에 '케라핌'을 봉인하며 네 마리의 드래곤 와더(Warders)에게 봉인을 지키게 하죠.
게임 내에 있는 드래곤 NPC들에게 '케라핌'에 대해 물어보면 흉폭하고 잔인하다는 표현이 주를 이룰 정도로 '케라핌'에 힘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공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레이드 몬스터라기보다 이벤트성 몬스터라 대면하기만도 복잡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평소에는 봉인되어 있다가 봉인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드래곤 와더를 모두 물리치면 그제야 이용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요. 이 드래곤 와더 중 마지막 한 마리가 엄청난 난이도를 지니고 있는지라 상위 레이드 길드에서도 보통 마지막 드래곤 와더를 제외한 3마리까지만 레이드 를 실시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 날까지는요.
◆풀려난 '케라핌' 세계를 부수다
2003년 11월 17일, 당시 서버 최상위 길드 중 하나였던 'Evil Empire 길드'(이하 EE길드)가 다들 패스하던 마지막 드래곤 와더까지 잡고 봉인을 풀어 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케라핌'을 상대하는 첫 시도인 터라 많은 이용자들이 기대를 갖고 레이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버립니다. 레이드에 돌입한 EE길드가 순식간에 몰살되버린 것입니다. 최상위 길드로 꼽히던 EE길드가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전멸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에버퀘스트' 이용자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보다 더 빨리 이용자들에게 '케라핌'에 대한 소식을 알린 것이 있었으니. 서버 전역에 배치된 드래곤 NPC들이 "'케라핌'이 깨어났다!", "돌연변이가 온다!", "종말이 다가왔다"는 등의 전체 외침 메시지로 채팅창을 도배해댄 것입니다.
일반 이용자들이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사이 풀려난 '케라핌'은 레이드 지역의 모든 이용자를 몰살시킨 후 가까운 마을로 향해 파괴를 거듭했습니다.
'에버퀘스트'에서는 NPC끼리도 적대적인 성향이라면 서로 공격하는데요. '케라핌'은 이용자는 물론 모든 NPC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대륙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한 '케라핌'의 공격에 아무 것도 모르고 사냥에 열중하던 이용자들이나 그들이 상대하던 다른 몬스터들은 물론 레이드 몬스터까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마을에서 쉬고 있던 이용자들이나 경비병등의 게임 내 모든 캐릭터가 '케라핌'에게 유린당하는 사이. 그를 막으려는 이벤트가 발동되면서 수십마리의 드래곤 NPC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벤트를 위해 생성된 NPC가 아닌 이전부터 강력하기로 유명했던 드래곤 NPC들이 모여 '케라핌'에게 덤벼들 었는데요.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드래곤 NPC들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후 케라핌은 '에버퀘스트'의 세계인 벨리어스를 맘껏 휘젓고 다닙니다. 한 이용자의 목격담의 의하면 '케라핌'의 공격 한 번에 주민 NPC가 10~20명 정도씩 죽어나갔고, 저지하러 뭉쳤던 드래곤들도 공격 한방에 체력의 1/3씩이 깎여나갔다고하니 정말 최강의 몬스터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GM이 그 현장을 중계했다고 하는데요. 사망 패널티가 엄청난 게임이기에 살아날 엄두도 못내고 그저 채팅창만 바라보는 이용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3시간만에 '에버퀘스트' 내 모든 대륙이 초토화됐고 '케라핌'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몬스터 한 마리를 깨웠다가 모든 NPC와 이용자가 사망했으니 당연해보이기도 하네요. 그 뒤 이용자들은 '케라핌'을 깨우는 행위 자체를 꺼리게 됐습니다. 다른 길드가 레이드를 시도하려고 하면 와서 말리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봉인을 지키는 드래곤 와더 자체가 워낙 강한지라 상위 레이드 길드가 아닌 이상은 깨우기도 힘들죠. 한국 서버에서는 '추즌 길드'에서 '케라핌'의 레이드를 시도한 적이 있지만 레이드에 실패했고, 다시 전 대륙이 몰살 당했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오리지널 '케라핌'이 잡힌 것은 '에버퀘스트' 역사상 단 한 번인데요. 2003년 'Rallos Zek 서버'에서 3개 길드 약 300여명이 몰려가 레이드에 성공한 기록이 있습니다. 오리지널로 표기한 것은 이후 패치로 '케라핌'이 있는 봉인된 자의 무덤과 '케라핌'의 스펙이 변경되었기 때문 입니다.
2003년 11월 15일 'Rallos Zek 서버'의 3개 길드가 연합해 레이드를 시도했습니다. 기세 등등히 달려간 그들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버그로 4마리의 드래곤 와더가 없었던 것이죠.
다음 날 GM이 사과와 함께 경험치 보상을 해줬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300명의 인원이 몰려갔는데 버그가 발생한 것이기에 엄청난 항의가 이어졌죠.
그리고 이틀 후인 17일. 드래곤 와더가 다시 생성됐고 길드 연합은 '케라핌' 레이드에 돌입했습니다. 300명이 한 마리의 몬스터를 레이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죠. 결국 레이드 시작 3시간만에 길드 연합은 '케라핌'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습니다.
기쁨에 겨운 환호성을 외쳐댔지만 그것도 잠시, '케라핌'의 시체는 단 30초 동안 남아있었는데 놀랍게도 드롭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몬스터 자체가 레이드 용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이벤트성 몹이니 그럴수도 있지만 허무한 결과에 허탈해하는 이용자도 많았는데요. 그래도 퍼스트 킬 기록을 남긴 것에 만족하는 이용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