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게임은 당시엔 유명했으나 시간에 묻혀 점차 사라져가는 에피소드들을 되돌아보는 '게임, 이런 것도 있다 뭐', 줄여서 '게.이.머'라는 코너를 마련해 지난 이야기들을 돌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게.이.머'의 아홉 번째 시간에 다룰 사건은 '하프라이프2'에 관련된 사건인데요. 게임의 소스 코드가 인터넷에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를 뒷수습하기 위해 피눈물을 삼키고 수많은 데이터를 삭제하고 다시 만드느냐고 게임 개발 기간이 7년으로 늘어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개발사인 밸브는 이 해킹범들을 잡기 위해 굉장히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는데요. 그 방법도 화제가 될 정도로 크게 주목 받은 사건입니다.
◆'하프라이프2'가 어떤 게임인데?
'하프라이프2'는 1998년 11월 19일에 발매된 전편 '하프라이프'의 후속작으로 동유럽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도시 17번 지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게임입니다. 이론물리학자인 '고든 프리맨'이 주인공인 이 게임은 쇠 지레의 비속어 표현 '빠루'로 유명하기도 한데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엄청난 전투력을 선보인 '고든 프리맨'이 전작에 이어 또 다시 침략해온 외계인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스토리의 큰 줄기입니다.
개발은 밸브코퍼레이션이 담당했으며 발매된 2004년 35개의 GOTY(Game Of The year, 올해의 게임상)를 수상할 정도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7년의 개발 기간이 걸린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인 이 게임은 윈도 PC용으로 론칭된 이후 2007년에는 플레이스테이션3와 엑스박스360용으로도 발매되는 등 크게 흥행했습니다.
'하프라이프2'는 개량된 하복 물리 엔진과 밸브가 자체 개발한 소스 엔진을 사용해 만들어졌는데요. 게임 자체의 흥행도 대단했지만 '하프라이프2'가 게임 업계에 펼친 영향도 굉장했습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내레이션, 그래픽, 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며 게임 업계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지요.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06년 기준 '하프라이프2'는 전세계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장비를 정지하겠습니다. 어? 안되잖아? 어?
2003년 '하프라이프2' 베타 테스트 당시 개발사인 밸브의 대표인 게이브 뉴웰의 컴퓨터에 이상이 발생하면서 본 사건이 시작됩니다.
게이브 뉴웰은 당시 '하프라이프2' 포럼을 통해 컴퓨터에 이상이 생겼는데 이 현상의 해결책을 아는 사람은 답변을 부탁한다는 글을 남겼는데요. 그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데 단 1주일이 소요됐습니다. 상당히 실력이 좋은 해커의 소행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게이브 뉴웰은 2003년 9월 11일부터 본인이 아닌 어떤 인물이 이메일 주소에 침투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글을 포럼에 올렸습니다. 당시 비밀번호는 자신의 이름인 'Gabe'로 매우 단순했죠. 이후 그는 인터넷을 켜고 오른쪽 클릭을 사용할 경우 인터넷이 오류를 일으켜 종료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글을 추가로 올렸습니다.
컴퓨터에서 어떤 바이러스나, 트로이 목마 등의 백도어 프로그램을 찾아내지 못하자 하드디스크를 백업하고 포맷을 시도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는 글이 추가로 올라왔고 아무런 해결책없이 시간만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 현상을 처음 발견한 날로부터 8일이 지난 2003년 9월 19일, 게이브 뉴웰은 누군가 '하프라이프2'의 소스 코드 관계도를 복사해갔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하프라이프2'가 외부에 누출되고 맙니다. 소스 코드 등의 1급 보안 유지 파일까지도 모두 유출된 것으로 밝혀지며 큰 파장이 일었는데요. 당시 언론들은 해킹을 시도한 해커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지 못하고 이상 현상이 발생했는데도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게이브 뉴웰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지…갈아 엎어!
개발 마무리 단계에 있던 '하프라이프2'의 정보들을 대량 유출 당하자 밸브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하프라이프2'의 알파 버전과 베타 버전은 완벽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던 상태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죠.
밸브는 결국 용단을 내리게 됩니다. 유출된 레벨과 NPC를 대부분 삭제하기로 말이죠. 메인 스토리도 직접적으로 변경하며 엄청난 양의 파일들을 복구, 변경, 교체하는 추가 작업에 착수하게 이릅니다.
이전 '하프라이프2'는 뉴욕을 모토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로 만들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있는 풍경에 콤바인들이 바다를 오염시키고 공기 중에 사람을 천천히 죽일 수 있는 뿌연 독가스가 풀어져 있는 상태라는 설정이었습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시타델'(Citadel)도 지금처럼 높이 들어서있는 탑에 알 수 없는 재질로 이뤄진 벽이 아닌 타일이 가득히 붙은 건물이었다고 하네요.
'하프라이프2' 개발 팀은 어떻게 이 레벨을 바꿀까 생각하다가 결국 높은 빌딩들을 모두 삭제하고 미국의 50년대와 70년대 풍의 건물로 오브젝트를 구별한 뒤 지금의 '하프라이프2'처럼 70년대 풍 유럽 스타일로 새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독가스를 삭제하고 밝게 바꾸면서 도시의 분위기도 굉장히 많이 바꾸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죠.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레벨은 스토리상 전개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삭제 대상에서 제외된 '17구역'과 '레이븐홈'(Ravenholm)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출 파일들 중 'WC mappack'는 '소스 SDK'(Source SDK)에 들어있는 툴 들중 하나인 '해머 에디터'(Hammer Editor)의 초기 버전인 '월드 크래프트'(World Craft)로 제작된 맵으로 현재의 '해머 에디터'와도 호환이 되는 맵입니다. 이들 맵에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텍스쳐들을 수정하면 원활한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당시 유출자료를 모아서 따로 모드를 만들 수 있었을 정도로 유출된 데이터 양이 엄청났습니다.
◆해킹범 잡기 위해 함정을?
이 유출사건 이후 밸브는 자사 네트워크의 보안 강도를 엄청나게 높였습니다. 또한 해킹으로 인해 유출된 자료들은 대부분 유명 게임 포럼들을 통해 퍼진 상태였지만 밸브는 이 자료들에 대해 그전처럼 배포 금지령을 내리지도 소송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게리모드 커뮤니티들을 통해 많은 양의 자료들이 오갔으며 타 게임의 유출 자료 배포가 금지돼 있던 'FacePunch Studio' 에서도 배포가 허용됐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유출 자료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모드인 '미싱 인포메이션' 역시 밸브는 모드로 남아있는 한 배포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반면에 해킹범은 교묘한 방법으로 검거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출시한 다음해인 2004년, 미국 연방 보안국(FBI)에서 '하프라이프2'의 소스 코드들을 유출시킨 독일인 2명을 체포했는데요. 그 방법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이들 'Exel Gembe' 일당은 인터넷 그룹인 만큼 그 소재를 파악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사건을 담당한 FBI는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그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해킹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장기간 잠복에 나섭니다.
장기간의 잠복 수사 끝에 그들이 일으킨 또 다른 해킹 사건을 발견한 FBI는 그들에게 보안 강화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면 FBI 보안 요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하죠. 잠시 망설였던 'Exel Gembe' 일당은 미국행 비행기표까지 마련해 보내준 FBI의 태도에 껌뻑 속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그들을 맞이한 FBI는 채용이 아니라 체포로 이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입국 수속을 밟기 전에 해커 일당을 체포한 FBI는 그들을 전원 독일로 돌려보냈는데요. 되돌아간 독일에서 재판정에 선 이들은 정보 유출 죄로 각각 2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유출사건 이후 게이브 뉴웰은 '하프라이프2'의 문제점을 고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고 말했는데요. 다 만든 게임을 다시 만들어야 했을 그 상황을 떠올리면 이런 온화한 발언을 하기까지의 격정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