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생일이 그렇듯 기업에겐 창립 기념일이 특별하다. 생일과 마찬가지니까. 생존경쟁이 심한 시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증명이며, 앞으로 더 큰 성장을 다짐하는 계기를 다질 수 있는 기회다. 회사라는 무기체가 이를 구성하는 조직원들 덕분에 살아 움직이는 조직이 되는 것이기에 사람처럼 나이를 먹게 되고 나이만큼 역사가 쌓인다.
때문에 창립기념일을 앞두고 기업들은 자신들의 생일을 알린다.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함께 해준 직원들과 기업이 지금껏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준 소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도 기본이다. 매체들은 이 기쁜 날을 널리 알리는 것이 역할이고.
그런데 어느새 청년이 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는 부끄러움이 많은가 보다. 25번째 생일을 맞이했는데도 어떠한 알림이 없이 두 달이 지났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내 생일'이라고 동그라미 쳐 둔 사람처럼 본사 홈페이지에 조그맣게 공지만 걸어뒀다. 이런 부끄럼쟁이 같으니라고!
해당 공지에는 동영상이 붙어 있었는데 블리자드 25년 역사가 담겨 있다. 단순히 생일 표시만 해 둔 줄 알았더니만 자신들이 개최한 행사에 대한 스케치한 장면도 나오고 한국서 마 사장으로 통하는 마이크 모하임 사장의 고마움을 전하는 영상도 담겨 있다. 앞으로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공동 창업자이자 부사장인 프랭크 피어스도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렇게 준비를 다 해놓고 알리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에 진출한 블리자드는 국내에 맞는 현지화와 눈높이 소통으로 그동안 '외산 MMORPG 필패'라는 공식을 깨트렸다. '겸손하라'는 한국식 문화에 너무 익숙해졌을까, 이런 중요한 날을 알리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블리자드코리아 홍보실도 기자가 알려주고서야 25주년 기념영상이 게재됐음을 확인한 것은 비밀에 붙이겠다.)
마 사장은 최근에도 국내를 찾아 한국팬들에게 대한 사랑에 감사했다. 언제나처럼 중요한 시장임을 강조하며 고마워했다.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 블리자드에게 기자가 너무 무심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수줍음이 많았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좀 더 관심을 갖고 생일도 알아서 챙겼어야 했으니 말이다.
스마트폰에 블리자드 생일을 매년 알림으로 알려주도록 설정한 뒤, 늦게나마 축하의 인사를 대신한다. 그 동안 멋진 게임으로 즐거움을 많이 준 블리자드에게 고맙고, 앞으로도 훌륭한 게임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 달라고. 생일은 남이 챙겨주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먼저 알리는 것도 괜찮다고. '겸손한' 한국 게임회사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곽경배 기자 (nonny@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