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당시엔 유명했으나 시간에 묻혀 점차 사라져가는 에피소드들을 되돌아보는 '게임, 이런 것도 있다 뭐', 줄여서 '게.이.머'라는 코너를 마련해 지난 이야기들을 돌아보려 합니다.
'게.이.머'의 이번 시간에 다룰 이야기는 바로 게임과 적십자사가 얽힌 것으로 현재 진행형인 일화인데요. 3D FPS의 기본을 정립한 명작 '둠'부터 최근에 출시된 인디게임 '프리즌아키텍트'까지 다양한 게임이 적십자사의 요청으로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붉은 십자가 그림'을 모두 교체하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지금 알아보시죠.
◆출시와 동시에 일어난 '둠' 폭력성 논란
'둠'은 이드소프트웨어에서 1993년 12월 10일 출시한 FPS 호러 게임으로 현 3D FPS의 틀을 잡은 명작 게임인데요.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둬 FPS가 인기 장르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 게임입니다.
당시부터 '둠'은 잔혹한 비주얼과 어두운 분위기가 논란이 됐습니디. 1993년의 기술력으로 굉장히 사실적인 그래픽을 갖춘데다 적들을 단순히 총으로 쏴 피가 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폭사한다거나 뼈와 살이 분리 되는 등의 잔혹한 연출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둠'의 출시 시기는 대전 액션 게임 '모탈컴뱃' 등의 잔인한 연출을 앞세운 게임들의 폭력성 문제가 논란이 돼,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지던 때였습니다. '둠'도 청문회 단골 소재가 됐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죠.
여기에 1999년에 벌어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주동자가 '둠'의 광팬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미 의회와 미국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둠' 같은 잔인한 FPS 게임을 즐겼기에 이런 잔인한 일을 벌였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도 했죠.
제작사에 대한 유족들의 피해 소송은 패소했지만 게임업계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결국 자칫하면 제2의 아타리 쇼크가 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업계가 단결해 스스로 게임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오락 소프트웨어 등급 위원회(약칭 ESRB)가 세워지며 현재의 게임 심의규정을 도입하는 계기로 까지 발전했죠.
그리고 이 와중에 검열 요구를 하는 단체 중에는 적십자도 있었습니다.
◆단순하지만 강한 요구 '빼!'
적십자사의 요청은 단순했는데요. 자신들이 사용 중인 심볼인 '적십자' 마크를 게임에서 모두 삭제하라는 요구였습니다.
특히 "게임 내에 적십자 마크를 삽입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니 모두 불법행위"라고 강경한 반응을 보였는데요. 영국 적십자사는 적십자 마크가 1949년부터 적십자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소유물이며, 상업적 이용은 모두 협약 위반으로 위법 행위라는게 적십자사의 설명입니다.
이드소프트 측은 이후 출시된 모든 '둠'의 버전에서 적십자 마크를 알약 마크로 수정했는데요. 그 외에 '둠2'에서는 나치와 관련된 모든 콘텐츠를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전작 '울펜슈타인3D'에서 나치 제3제국의 상징 하겐크로이츠를 모티브로 한 그래픽 리소스를 후속작인 '둠'에서 그대로 사용했던 것을 모두 삭제한 것이죠.
개발사 측에서 조치를 취한 이후에도 적십자 측의 대응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요. 적십자의 빨간 십자가는 스위스 국기에서 따온 것인데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적신월이 유대교 국가에서는 크리스탈 모양의 적수정을 사용하는 등 여러 심볼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모양도 모두 금지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죠.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삭제 요구
사실 이런 심볼 교체는 '둠'외에도 많은 게임에 요구됐습니다. 대부분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게임에 요구해왔습니다. 적십자의 이미지를 해칠 것이 우려된다는 것이죠.
최근 인디 게임 '프리즌아키텍트'를 개발한 영국 개발자가 적십자사에서 제네바 조약의 위반 통고를 받았는데요. '프리즌아키텍트'는 교도소를 건설하고 교도관, 일꾼, 교도소 소장 등을 고용해 죄수를 관리하고 교도소를 꾸려나가는 게임입니다.
영국 적십자사는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적십자 마크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고있다"며 "적십자 마크는 국가보다 인정받은 민간 단체에만 사용이 인정되고 있어, 무단 사용의 경우 법에 의한 처벌이 영국 적십자사의 공식 사이트에 명시되어 있다"고 해당 개발사에 통보했습니다.
정확히는 게임 내 잠깐 등장하는 엠뷸런스에 그려진 적십자 마크를 지우라는 통보였습니다. 원래의 용도와 다르게 사용된 것도 아니고 엠뷸런스하면 떠오르는 마크인데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이렇듯 여러 논란에도 적십자 측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요. 제네바 조약은 국내에서도 일괄적용된다고 하니 게임에서 이를 사용한다면 마찰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