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키온 연합, 아케니아 혈족을 발견하다
얼음에 덮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감히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험준한 절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태곳적에 생성되어 한 번도 녹지 않은 만년설이 대지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피조물의 발길을 거부하는 험준한 지형 사이로 멀리서 보면 마치 실지렁이처럼 보이는 좁은 소로(小路)가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조심스럽게 지나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선두에 선 자들은 잘 제련된 금속 갑옷을 입고 말에 탄 기사들이었다. 은백색 투구 아래 안면을 보호하는 바이저 아래로 무성한 수염과 굳게 다문 입술이 자리했다. 그들이 든 방패에는 지성을 가진 유사인종들의 동맹체인 발키온 연합의 문장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뒤로 세 대의 마차가 뒤따랐다. 마차 위에는 하늘하늘한 로브를 입은 여성들이 눈빛을 빛내며 굽이굽이 드러나는 절경을 감상했다. 마차 뒤에는 백여 명의 병사들이 방패와 긴 창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행군하고 있었다.
얼마간 행군했을까? 선두에 선 말 한 필이 발을 헛디뎠다. 모래 아래 미끄러운 얼음이 깔려 있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가가각.
균형을 잃은 말이 절벽 쪽으로 미끄러졌다. 절벽 아래는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져 있다. 떨어지면 뼈조차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파악한 기사의 얼굴이 검게 죽어 들어갔다.
‘끝장이야.’
바로 그때 누군가가 말고삐를 잡아챘다. 휘청거리던 말이 겨우 중심을 잡고 대열로 돌아왔다.
“조심해. 이곳에서 떨어지면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한다.”
말고삐를 잡아챈 자는 당당한 덩치의 기사였다. 화려한 투구를 걸친 그는 대열에 속한 기사들의 우두머리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대장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우두머리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뒤따라오던 동료들에게 주의를 준 뒤 다시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 탄 기사들 바로 뒤를 따라가는 마차에는 단 한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뒤의 마차에 마법사나 정령사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가득 타고 있는 것에 비하면 매우 여유 있는 모습이다.
홀로 마차를 독차지한 자는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오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몸에 걸친 화려한 복장은 그가 높은 신분의 고급 귀족임을 알려 주었다.
에드워드 카이센 후작.
아룬 대륙 남부에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영주이자 발키온 연합에서 상당히 높은 직위를 지닌 중요인물이었다. 그런 고귀한 신분의 에드워드 후작이 그리 많지 않은 호위를 거느리고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일 년 내내 눈과 얼음이 녹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과거 얼음 거인들의 지배하에 놓였던 땅으로 오랫동안 인간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에드워드 후작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험하긴 했지만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절경임에는 분명했다. 입술이 벌어지며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구려. 부하들은 힘들겠지만 말이오.”
놀랍게도 그의 앞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군요.”
자세히 보니 에드워드 후작의 앞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언뜻 보면 봉제인형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체구의 동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새끼곰과 너구리를 섞어 놓은 듯 보이는 생명체는 당당하게 발키온 연합의 일익을 담당하는 포포리 종족이었다. 숲의 정령 일족으로서 외모와는 달리 뛰어난 지능을 지닌 고위 지성체였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드워드 후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고민이로구려. 과연 아케니아 혈족이 우리의 동맹 제의를 수락할지 말이오. 어떻게 보시오, 럼스테드 경?”
럼스테드라 불린 포포리족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아케니아 혈족은 틀림없이 동맹을 수락할 것입니다. 비록 외모는 험악하지만 온순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종족으로 보였으니까요.”
발키온 연합은 인간과 하이엘프, 그리고 포포리족과 포포리족의 여성체인 엘린 종족이 서로 힘을 모아 결성한 연합체이다. 최근 들어서는 포포리족의 중재로 고대 거인족의 일맥인 바라카족이 참여하여 샤라와 아룬 두 대륙에 조금씩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현재 두 대륙의 상황은 아직까지 질서가 잡히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웠다. 곳곳에 몬스터와 마수들이 창궐해서 여행자들의 목숨을 노렸다. 모든 것이 신들의 전쟁으로 인한 여파였다.
신들의 전쟁으로 두 대륙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신들이 소멸되었고, 소멸된 신들의 힘은 고스란히 그들을 섬기던 권속들에게 전해졌다.
신의 소멸로 인해 통제권을 상실한 권속들은 곧바로 몬스터와 마수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부여된 신력을 이용해 눈에 띄는 모든 생명체를 공격했다. 때문에 어지간히 강한 전사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지킬 힘이 있어야만 도시와 도시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얼음으로 뒤덮인 아룬 대륙 최남단의 오지였다. 불과 6개월 전, 발키온 연합에 속한 일단의 정찰대가 이곳에 발을 들였었다. 임무는 과거 이곳을 지배하던 얼음 거인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찰대는 임무 수행 과정에서 기괴한 생명체와 맞닥뜨렸다.
2미터를 훌쩍 넘어서는 키에 근육으로 뒤덮인 당당한 덩치, 비늘로 뒤덮인 피부를 지닌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괴 생명체와 조우한 정찰대는 매우 놀랐다. 생김새 하나만으로는 몬스터에 버금가는 공포감을 안겨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발키온 연합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정찰대는 탄탄한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전사들을 앞세워 괴 생명체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발견되었다. 무시무시한 생김새와는 달리 괴 생명체들은 매우 겁이 많았다. 정찰대가 공격해 들어가자 괴 생명체들은 머뭇거림 없이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에 용기를 얻은 전사들이 추격을 시작했고 후방에서는 마법사와 궁수들이 일제사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괴 생명체 둘을 죽이고 하나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붙잡힌 괴 생명체는 즉시 후방으로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발견되었다. 무시무시한 생김새와는 달리 괴 생명체는 인간과 버금가는 지능을 가진 유사인종이었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명을 가진 지성체인 것이다.
포포리 종족에게는 지성을 가진 모든 종족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에 힘입어 발키온 연합은 괴 생명체를 심문했고, 마침내 정체를 밝혀냈다.
괴 생명체는 아만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얼음 거인의 노예로 살아온 종족이었다. 사로잡힌 포로는 아만 종족 중 자신들을 아케니아 혈족이라 지칭하는 부족이었다.
‘우리 혈족은 오랫동안 얼음 거인의 노예로 지내다 불과 얼마 전 해방되었소.’
사실을 알아낸 발키온 연합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새로이 발견된 아케니아 혈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아만족은 외모 상으로는 몬스터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가졌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명을 지닐 정도라면 상당한 고급 지성체이며 충분히 발키온 연합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건만 험악한 외모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발키온 연합은 포로가 된 아케니아 혈족을 여러모로 관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교적 온순한 성격에 분쟁을 싫어하는 종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 결정에 쐐기를 박은 것은 아케니아 혈족 특유의 종족 특성이었다.
아케니아 혈족은 육중한 덩치에 걸맞게 힘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돌과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인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발키온 연합은 결정을 내렸다.
‘아만족의 일맥인 아케니아 혈족을 우리 발키온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안전한 장소에 거처할 땅을 내어주고 보호해 주기로 한다.’
물론 그 결정에는 아케니아 혈족 특유의 능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케니아 혈족을 끌어들이면 발키온 연합은 현저히 부족한 노동력을 충분히 충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케니아 혈족은 보통의 인간보다 몇 배의 일을 할 수 있는 타고난 일꾼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광석 채굴과 가공 능력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발키온 연합에서는 먼저 충분히 심문을 마친 포로에게 십여 명의 사절단을 딸려 그가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 에드워드 후작이 본격적인 협상을 위해 뒤따라가는 것이다.
귓전으로 럼스테드의 청아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현재 아케니아 혈족은 매우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배하던 얼음 거인이 물러난 탓에 거주지의 사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가고 있고, 식량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해 쉽사리 인구를 늘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안전한 거주지와 식량을 지원하면 두말없이 발키온 연합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열은 끊임없이 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행군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아케니아 혈족이 거주하는 곳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케니아 혈족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돌로 촘촘히 쌓은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무지 이음새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게 쌓여 있었고 금속과 목재로 보강한 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다.
에드워드 후작이 탄성을 토해 냈다.
“정말 훌륭한 성이로군요. 역시 타고난 장인 종족답습니다.”
행렬을 발견했는지 관문 위에서 부산히 오가는 아케니아 혈족의 모습이 보였다. 철옹성 같은 관문과는 달리 아케니아 혈족들의 움직임은 왠지 모르게 어설펐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도열해 있는 호위기사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전갈이 전해졌는지 잠시 후 관문의 문이 굉음을 울리며 내려왔다.
쿠르르르, 쾅!
에드워드 후작을 태운 마차는 호위 대열과 함께 열린 문 안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 * *
아케니아 혈족의 대제사장 레칸은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각 혈족들을 관장하는 제사장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레칸은 바로 조금 전 발키온 연합의 사절인 에드워드 후작을 면담하고 온 상태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제사장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얼음 거인의 노예로 지낸 세월이 그들에게서 자신감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아케니아 혈족은 무려 수백 년 동안 얼음 거인의 치하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얼음 거인들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아케니아 혈족을 관리했다.
얼음 거인들이 아케니아 혈족을 손아귀에 넣고 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투 계급들을 몰살시켜 버리는 일이다. 과거 맹위를 떨치던 아케니아 혈족의 전투신관과 전사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 명맥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겨진 자들은 몇 안 되는 지배계층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 계층들뿐이었다.
아케니아 혈족의 사회는 개미와 그 구조가 흡사했다. 태어날 때부터 역할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음 거인의 지배를 받던 세월 동안 전투가 가능한 계층은 씨가 말라 버렸다. 그 구조는 얼음 거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레칸이 조심스럽게 에드워드 후작과의 협의 내용을 설명했다.
“일단 발키온 연합에서는 우리에게 거주할 땅, 그리고 식량을 제공해 주기로 했소. 척박한 얼음산이 아닌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을 말이오. 그리고 병사들을 파견해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겠다고 했소.”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제사장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발키온 연합은 땅과 안전을 제공하는 대가로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소. 우리에게 제공할 땅 근처에는 많은 광산들이 있소. 그곳에서 광석을 채굴한 뒤 그중 일정량을 바치라고 했소. 또한 주기적으로 일꾼들을 파견해 노역을 해 달라는 요구를 해 왔소.”
어찌 보면 상당히 굴욕적인 협정일 수도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얼음 거인 치하에 있던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아케니아 혈족의 제사장들은 도리어 안색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 아케니아 혈족의 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얼음 거인이 물러간 이후 지속적으로 얼음이 녹고 있기 때문에 거주가 가능한 지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계속해서 아케니아 혈족을 괴롭혔다. 인구가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판국이었다.
현재 아케니아 혈족이 처한 상황과 발키온 연합의 제의를 거듭 생각해 보던 제사장들이 조심스럽게 동의를 표했다.
“그 정도라면 발키온 연합의 제의를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일손이 남아도는 형국입니다. 굶주림으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발키온 연합의 제의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하는 제사장은 없었다. 결국 레칸은 결정을 내렸다.
“알겠소이다. 그러면 발키온 연합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