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회의에서 결론이 도출되자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발키온 연합은 아케니아 혈족에게 비아아우레움 가드 인근의 넓고 풍요로운 땅을 이주지로 제공했다. 아케니아 혈족 전체가 그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되었다.
발키온 연합에서는 많은 호위 병력과 수송수단을 제공해서 아케니아 혈족의 이주를 도왔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아케니아 혈족들이 수송용 마차에 타고 새로운 이주지로 이동했다.
험준한 얼음산에서 거주하던 아케니아 혈족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아케니아 혈족들이 오랫동안 광석을 채굴하던 광산은 텅 비어 버렸고 마을은 도무지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발키온 연합에서 제공한 땅은 그들이 거주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혹한의 얼음산과는 달리 기후가 따듯했으며 근처에 강이 흘러서 식수를 구하기에 용이했다.
새로운 땅에 만족한 아케니아 혈족은 거주지 근처에 견고한 성을 지었고, 부근의 개발되지 않은 광산에서 채굴작업을 시작했다. 얼음 거인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을 뒤로하고 발키온 연합의 새로운 일원이 되어 그들이 내어준 거주지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 * *
발키온 연합과 협정을 맺은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이주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얼음산맥의 모든 아케니아 혈족은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 갔다. 관리를 위해 남은 몇몇 아케니아 혈족들도 속속 작업을 마치고 발키온 연합에서 제공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제사장 파야곤은 회한이 깃든 눈빛으로 광산 입구를 쳐다보았다. 거무튀튀한 광산의 입구는 그의 혈족이 수백 년 동안 광물을 캐내던 일터였다. 많은 혈족들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다 생을 마치고 땅에 묻혔다. 그런 곳을 버려두고 떠나려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다른 혈족들은 오로지 파야곤만 남겨 두고 모두 새로운 거주지로 이주한 상태였다. 계획대로라면 그도 벌써 오래 전에 혈족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파야곤은 쉽사리 수송용 마차에 타지 못했다. 그것은 파야곤의 마음 한구석에 간직된 하나의 비밀 때문이었다.
파야곤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오래 전에 흘려보낸 노인이다. 피부가 비늘로 덮인 탓에 다른 종족들은 쉽사리 아만족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한다. 아마 이종족의 눈에는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 동일하게 보일 터였다.
아주 오래전, 파야곤이 어린아이이던 시절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비밀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혈족에서 오직 파야곤의 할아버지만이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광산의 가장 아래층, 깊숙한 곳에는 출입이 통제된 금지구역이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네, 할아버지.”
“너만 알고 있어라. 그곳에는 우리 아케니아 혈족의 마지막 전사들이 잠들어 있단다. 이곳은 얼음 거인과의 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남은 전사들이 항전하던 곳이었다. 무수히 많은 얼음 거인들을 도륙한 혈족의 전사들이 이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렀지.”
그 말을 들은 파야곤은 놀랐다. 어린 파야곤의 눈에 비친 얼음 거인들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강한 얼음 거인들과 맞서 싸운 아만족이 있다는 사실은 파야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공격해 들어간 얼음 거인들은 모조리 죽은 시체가 되어 나왔다고 한다. 아케니아 혈족의 전사들은 그 정도로 강하고 용맹했다.”
“그,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다. 결국 얼음 거인들은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들 특유의 얼음 마법으로 굴을 완전히 얼려 버렸다.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봉인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
“노, 놀랍군요.”
“그들을 마지막으로 아케니아 혈족 전사의 피는 끊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라. 그들이 깨어나는 날 우리는 잃어버린 전사의 혈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쳤다. 그리고 파야곤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속 깊이 묻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우여곡절 끝에 동맹 부족인 케스타닉과 힘을 합쳐 얼음 거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케니아 혈족이 한 일이라곤 간접적인 지원뿐이었다. 직접적인 전투는 모두 케스타닉 일족이 담당했다.
사실 정확히 따지면 얼음 거인들은 스스로 물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이 힘을 잃은 탓에 얼음 거인들 역시 과거의 무시무시하던 능력을 모두 봉인당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되찾았지만 한 번 잃어버린 아케니아 혈족 전사의 혈통은 복원되지 않았다.
발키온 연합과의 협정이 체결되고 아케니아 혈족의 이주가 결정되었을 때 파야곤은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출입이 통제된 혈족의 광산 깊숙한 곳에 봉인된 아케니아 혈족 최후의 전사들을 떠올린 것이다.
‘과연 그들이 살아 있을까?’
기억을 떠올린 그는 제사장 회의에서 그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봉인된 전사들은 얼음 거인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무수한 동족을 살상했다고 한다.
얼음 거인에게 굴복해 적대시하는 아만족을 전사들은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사의 법도에 따라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동족들을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그 기록은 문서를 통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사실을 안다면 제사장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리고 전사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니 말이야.’
마음을 정한 파야곤은 혈족을 따라 이주지로 이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 거인들이 버려두고 간 마법 아티팩트 중에서 동결 마법을 해제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둘 주워 모았다. 얼음 광산 깊숙이 잠들어 있는 아케니아 혈족 최후의 전사들을 파야곤 자신의 힘으로 풀어 주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다행히 그런 파야곤의 의도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케니아 혈족이 모두 떠나가고 파야곤 홀로 남겨졌을 때 그는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그는 그동안 몰래 주워 모은 얼음 거인들의 아티팩트를 배낭에 집어넣은 뒤 최후의 전사가 갇혀 있다는 광산을 향해 출발했다.
지금 파야곤이 내려다보는 오래된 광산이 바로 할아버지가 말한 광산이었다. 그 광산 깊숙한 곳에는 말로만 들었던 아케니아 혈족 최후의 전사들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광산용 안전모에 달린 등에 불을 붙인 파야곤이 조심스럽게 광산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흐릿한 불빛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비췄다.
“과연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까?”
그러나 직접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광산은 매우 길었다. 파야곤 혈족에게 맡겨진 스물일곱 개의 광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만큼 깊었다. 파야곤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광산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곡괭이와 삽 등 채굴 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곳에 도착하자 파야곤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원래대로라면 많은 혈족들이 흩어져 채굴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텅 비어 있었다.
“나도 머지않아 새로운 이주지로 이동해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파야곤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는 마침내 출입이 통제된 곳에 도착했다.
투명한 얼음 장벽이 갱도의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고, 들어가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얼음 거인의 언어로 된 경고장이 장벽에 새겨져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파수병에게 걸려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파야곤이 배낭에서 조그마한 수정구를 꺼냈다. 얼음 거인이 남겨 두고 간 봉인 해제용 수정구였다. 얼음기둥에 수정구를 붙이고 작동시키자 미미한 진동이 퍼져 나갔다.
콰직! 콰지직!
갱도를 철두철미하게 틀어막고 있던 얼음 관문이 산산이 부스러지며 무너졌다. 그와 함께 봉인을 해제한 수정구슬마저 빛을 잃고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러나 파야곤은 실망하지 않았다. 봉인 해제용 수정구는 많고도 많았다. 얼음 거인 관리자들이 숙소에 버리고 간 것들을 모조리 모아 둔 것이었다.
지금껏 아케니아 혈족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던 갱도를 파야곤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쾌쾌한 냄새와 희박한 공기는 이곳이 땅속 깊숙한 곳임을 알려 주었다.
갱도는 무척이나 길었다. 이곳까지 온 거리의 두 배 가까운 거리를 걸었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중간 중간 얼음 거인들이 장벽으로 통로를 틀어막아 놓았지만 파야곤은 수정구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통과했다.
무려 열 개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지나간 파야곤의 앞에 드넓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 입구를 틀어막은 장벽을 본 파야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이곳인가?”
공동 앞을 막고 있는 장벽은 유난히 두터웠다. 파야곤은 수정구를 무려 다섯 개나 사용한 끝에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장벽 너머는 완전히 얼음 천지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얼음기둥들이 장벽을 떠받들고 있었다. 파야곤이 조심스럽게 얼음기둥 사이를 지나쳤다. 순간 그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얼음기둥 사이로 눈에 익은 사체가 널려 있었다. 덩치가 좋은 아케니아 혈족보다 족히 몇 배나 큰 거대한 얼음 거인들의 시신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가 갈라지고 가슴이 쪼개어져 속 내용물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시신들이었다. 극도로 낮은 기온으로 인해 썩지 않고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 모르긴 몰라도 아케니아 혈족 최후의 전사들에 의해 죽은 얼음 거인들인 것 같았다.
파야곤의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졌다. 말로만 들었던 아케니아 혈족 전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얼음 거인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인 너머로 또다시 시커먼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야곤이 머뭇거림 없이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 거인들의 시체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정황을 보니 통로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았다.
통로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파야곤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드디어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아케니아 혈족 전사를 발견한 것이다.
통로의 안쪽에는 자그마한 공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동의 절반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얼음, 그것은 바로 얼음 거인들의 마법에 의해 창조된 얼음이었다.
얼음 속에는 십여 명의 아케니아 혈족이 갇혀 있었다. 파야곤이 떨리는 눈빛으로 생전 처음 보는 동족 전사들을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무기를 굳건히 움켜쥐고 눈을 부릅뜬 전사들의 생김새는 사뭇 생소했다. 체구가 크기로 소문난 아케니아 혈족의 평균을 웃돌 정도로 덩치가 당당했으며 검은빛이 감도는 딱정벌레의 껍질처럼 보이는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수는 모두 십여 명 정도.
얼음에 갇힌 전사들을 넋이 나간 듯 쳐다보던 파야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가 급히 배낭 속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열대여섯 개 정도 되는 수정구를 모조리 꺼낸 파야곤이 망설임 없이 얼음기둥에 대고 작동시켰다. 수정구가 부르르 떨리며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전사를 뒤덮고 있던 얼음기둥이 급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는 얼음기둥 사이로 전사의 강인한 육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파야곤의 안색은 금세 어두워졌다. 대기 중에 드러나는 순간 전사의 육신이 얼음기둥과 함께 부스러져 버린 것이다.
산산이 부스러진 전사의 잔해를 보며 파야곤이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된 것이지? 깨우는 방법이 틀린 것인가?”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얼음 거인들은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잘못을 저지른 노예를 얼음기둥에 가둬 두었다가 몇 년 뒤에 풀어 주는 모습을 파야곤은 지금껏 여러 번 목격했다.
“아니면 너무 오래되어서 이미 죽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죽은 상태로 냉동된 것인가? 도저히 알 도리가 없군.”
파야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계속해서 수정구를 사용해 전사를 깨우는 시도를 하는 것. 그러나 얼음기둥에 갇혀 있는 전사들은 수정구를 사용하기가 무섭게 부스러졌다.
한 구, 한 구 부서지는 전사를 보며 파야곤이 눈초리를 파르르 떨었다.
“할아버지의 바람일 뿐이었나? 아케니아 혈족은 영원히 전사의 혈통을 잃어버리고 만 것인가?”
마침내 파야곤은 마지막 남은 얼음기둥 앞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남은 수정구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파야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얼음기둥 안의 전사를 쳐다보았다. 덩치가 당당한 전사는 다른 전사들과는 달리 눈을 꼭 감고 마치 자는 듯 얼음에 갇혀 있었다. 파야곤이 떨리는 손으로 수정구를 들어 작동시켰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아케니아 혈족 전사의 혈통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파츠츠츠츠.
붉게 물든 수정구가 작동되며 얼음기둥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갑옷에 휩싸인 강인한 육신이 드러났다. 파야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콰지지직.
갑옷 표면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파야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뭔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파야곤의 발치로 쏟아졌다. 보나마나 부스러진 전사의 육신일 거라 생각한 파야곤이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니?”
놀랍게도 전사의 육신은 부스러지지 않았다. 부스러진 것은 전사가 몸에 걸치고 있던 갑옷뿐이었다. 들고 있던 무기 역시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벌거벗은 전사의 육신은 멀쩡했다.
“어, 어쩌면……?”
파야곤이 기대에 찬 모습으로 전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전사의 육신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그 모습을 본 파야곤이 아직까지 쪼개지지 않은 수정구를 전사의 몸에 가져다 댔다. 수정구에 서린 붉은빛이 급속도로 전사의 육신에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마치 심연에서 토해지는 듯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우…… 후우흠…….”
보고 있던 파야곤에겐 마치 신계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나 다름없었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전사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호흡소리가 점점 커지며 전신의 근육이 미미하게 경련했다. 그리고 그가 지켜보던 사이 전사가 마침내 눈을 떴다.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