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임무를 마치면 주머니가 두둑해질 테니 딴 데 눈 돌릴 이유가 없지.’
나무에 묶인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어제 목격한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이 아직까지 그녀를 공황상태에 빠트리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세실리아, 이제 갓 마법에 입문한 풋내기 마법사였다. 모험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 지금 같은 꼴을 겪을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세실리아는 어릴 때부터 마법에 자질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거금을 주고 그녀를 초급 마법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초급 마법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기초적인 마법뿐이었다. 그 정도로는 어디를 가도 마법사라고 자신을 밝히지 못한다.
통상적인 경우 초급 마법 학교 졸업생들은 중급 마법 학교로 진학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집안은 비싸디비싼 중급 마법 학교의 수업료를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가족이 사는 집을 팔아 봐야 중급 마법 학교의 일 년 치 수업료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해서 중급 마법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한 세실리아는 모험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 또래의 평민 마법사 지망생들이 흔히 택하는 방법이다.
아룬 대륙의 필드에는 과거 신의 권속이었던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린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심장에 깃들어 있던 신력이 대자연의 품으로 방출된다. 그 방출된 신력을 흡수하면 마법사는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전사나 궁수, 그리고 정령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냥한 몬스터의 신력을 흡수해서 한결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하고 말 테야. 그래서 혼자서 필드를 누빌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말겠어.”
세실리아는 눈에 불을 켜고 함께 필드를 누빌 동료들을 찾아 헤맸다. 필드에서의 안정적인 사냥과 생존을 위해서는 믿음직하고 실력이 있는 동료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사실 세실리아 정도의 풋내기 마법사들은 동료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 험하디험한 필드에서 제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중급 마법 학교를 수료하거나 아니면 필드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마법사만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다. 세실리아 정도의 신출내기 마법사들이 수준 높은 파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세실리아에게는 특유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미모였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뒤돌아봄직한 예쁘고 깜찍한 미모로 인해 그녀는 제법 실력이 있는 파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나름대로 필드에서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한 파티로서 우두머리는 벌써 일 년 이상 필드에서 활약한 전사 라빈이었다. 그 외 궁수 두 명과 치유가 가능한 사제가 포함된 아룬 대륙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성의 파티였다.
사실 라빈의 파티에는 원래 마법사가 있었다.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그런데 세실리아를 만나기 전 필드에서 사냥하는 과정에서 마법사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라빈 일행을 노리고 두 마리의 몬스터가 달려들었는데 그만 한 마리를 마크하지 못한 것이다.
마법사의 위력은 단연 독보적이다. 긴 캐스팅을 마치고 발사되는 마법은 몬스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다.
콰콰콰쾅!
마법이 작렬하자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몬스터가 분노하여 몸을 돌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라빈은 나머지 한 마리를 붙잡고 있느라 미처 발목을 붙들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몬스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법사는 공격력은 막강한 반면 방어력은 극히 취약한 직종이다. 궁수의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달려든 몬스터는 결국 날카로운 뿔을 마법사의 복부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렇게 해서 마법사를 어이없이 잃은 라빈의 파티는 몬스터 사냥을 마무리하고 레나르로 돌아와서 새로운 동료를 물색했다. 죽은 동료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경험 많은 마법사가 영입 대상이었다.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해내야만 파티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아지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서 동료를 선택해야 한다.
사실 라빈 파티 정도의 수준이라면 세실리아 정도의 풋내기 마법사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라빈은 세실리아를 파티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면 리더인 라빈이 세실리아의 미모에 반했다는 것이 정확한 이유였다.
물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런 라빈의 결정에 연신 불만을 토로했다. 죽은 마법사와는 달리 세실리아는 결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리더인 라빈의 결정이었기에 그들은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 못했다.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사냥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파티에서 리더인 전사의 역할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두 방으로 몬스터를 절명시킬 강력한 궁수나 마법사가 아니라면 최전방에서 몬스터를 붙들고 있어야 할 전사의 존재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동료들을 치유할 뿐 공격 수단이 거의 없는 사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해서 라빈 파티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6개월가량 필드를 돌아다녔다. 사냥이 가능해 보이는 만만한 몬스터는 공격하고 버거워 보이는 마수는 회피하면서 영리하게 필드를 누비고 다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 심지어 힘들게 캐스팅한 화염구가 이미 죽어 버린 몬스터의 몸에 작렬할 때도 있었다. 동료들로부터 불만을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리더인 라빈이 적극적으로 비호해 주었기 때문에 파티에서 내쫓기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6개월 동안 필드를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세실리아는 상당히 성장할 수 있었다. 몬스터 사냥에 제 몫을 해낼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몬스터가 죽으며 내뿜는 신력은 충실하게 그녀의 몸에 쌓였다.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제 몫을 해낼 마법사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동료들과 함께 필드를 누빈 지난 6개월은 세실리아에겐 더없이 행복했다. 시도 때도 없이 추근거리는 라빈이 귀찮기는 했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싹싹하고 애교 많은 세실리아의 태도에 다른 동료들도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고 그녀와 친해졌다.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내 몫을 해낼 마법사가 될 수 있어.’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복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버렸다. 바로 어젯밤 그녀의 파티는 느닷없는 기습을 받았다.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인간 종족의 노예 사냥꾼들이 그들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다.
일행을 잘 이끌고 항상 제일 앞에 서서 몬스터를 상대하던 전사 라빈은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 버렸다. 얼굴에 칼자국이 새겨진 흉측한 노예 사냥꾼의 칼날 아래 몇 합 싸우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간 것이다. 한 번 나갔다 오면 일행이 먹을 짐승을 풍족하게 잡아오던 두 궁수 피레와 브랜든도 화살 한번 제대로 날리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큰언니 역할을 하며 항상 동료들을 잘 다독이던 사제 엘레나는 적 마법사가 날린 화염구에 맞아 산 채로 불타 버렸다. 그 과정에서 세실리아는 캐스팅조차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동료들이 모두 죽고 세실리아는 유일한 포로가 되어 나무에 묶인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노예 사냥꾼의 입을 통해 자신이 마법으로 기억이 지워진 뒤 비밀리에 운영되는 노예 경매장에 올려질 것이란 말을 들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애걸하려 했다.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노예는 제발…….”
그러나 무정한 노예 사냥꾼들은 그녀의 입까지 막아 버렸다.
‘안 돼. 노예로 팔릴 수는 없어.’
끊임없이 도리질 쳤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이변이 없는 한 마법으로 기억이 지워진 노예가 되어 돈 많은 늙은이의 욕정을 채워 주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상심한 세실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 * *
불침번을 서던 발락이 묶여 있는 세실리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쉽게 보기 힘든 미모였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예쁘긴 하지만 이 많은 수입을 포기할 순 없지.’
그때 발락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가 입술을 모으자 난데없이 산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뽀로로록.
숙련된 노예 사냥꾼답게 미하엘 일행은 재빨리 반응했다. 상체를 일으킨 미하엘이 무기 손잡이를 움켜쥐었고 도미니크는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궁수인 폴 역시 시위 가득 화살을 메겼다. 그런 그들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인기척이다.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 소리를 볼 때 몬스터는 아니야.”
필드에서 잔뼈가 굵은 전사 출신답게 발락이 재빨리 상대의 정체를 추정했다. 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했다. 잠시 후 모닥불 불빛 사이로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하엘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아만족이잖아?”
모닥불로 접근한 불청객은 바로 아만족이었다. 그들이 붙잡아 가야 할 목표물이 제 발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마에서 시작되어 머리 뒤쪽으로 휘어진 뿔에 가느다란 눈매, 극히 강인해 보이는 턱, 꿈틀거리는 근육이 상체를 덮고 있는 당당한 덩치의 아만족이 모닥불 앞에 서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킨 미하엘이 도미니크에게 눈짓을 했다.
“이거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군.”
미하엘의 눈빛을 알아차린 도미니크가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입력해 놓은 마법으로 아만족의 언어를 공용어로 통역하는 효과를 보인다. 잠시 후 도미니크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죠? 그대는 누구인가요.”
그 말에 아만족의 눈매가 꿈틀했다. 입이 벌어지며 조금 전 도미니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과 흡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행자들인가? 모닥불을 잠시 빌리고자 왔다.”
그 말을 통역해 주자 미하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 갔다. 이것은 아만족 사냥을 나선 그들에게 더없이 좋은 징조였다.
미하엘 일행은 느닷없이 나타난 아만족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도미니크를 시켜 이것저것 캐물었다. 현재 일행에서 아만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도미니크뿐이었다.
“이름이 뭐죠?”
“카르고.”
“좋아요, 카르고. 이 밤에 이곳을 지나치는 이유가 뭔가요?”
“레나르로 가는 길이다. 발키온 연합의 수송용 마차가 더 이상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
“놀랍군요. 이 험한 필드를 무기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다니 말이에요.”
카르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조금 떨어진 나무둥치에 인간 하나가 묶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상태였다.
‘확실히 평범한 녀석들은 아냐.’
귓전으로 계속 도미니크의 질문이 들려왔다.
“얼음 산맥에는 아만족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나요?”
카르고가 묘한 눈빛을 던지는 미하엘을 보았다.
“아니. 아만족은 더 이상 얼음 산맥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난 아만족일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다. 이곳으로 오며 나는 단 한 명의 동족도 보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미하엘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두 명에서 다섯 명의 아만족을 붙잡아 오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지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이놈만이라도 붙잡아 가야지.’
그가 눈짓을 하자 발락이 조심스럽게 무기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눈빛이 카르고에게 퍼부어졌다. 그 눈빛을 느낀 카르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짓이지?”
도미니크의 말투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놀랄 것 없으니 안심해. 대신 얌전히 붙잡혀 줘야겠어. 아만족을 탐내는 고객이 있어서 말이지. 이곳으로 오게 된 네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
“날 탐내?”
“의뢰주께서 광산에서 일을 시킬 일꾼이 필요하다고 아만족을 잡아 오라고 하시는군. 순순히 협조하면 그다지 고통을 겪진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카르고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인간 놈들도 얼음 거인과 똑같군.”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