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네.”
“뭘 몰라?”
“기억이 안 나.”
“……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모르겠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예리엘이 슬며시 빨간 머리의 얼굴 표정을 살펴봤다. 마치 어린아이같이 해맑은 미소에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야, 그러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거야?”
“기억상실?”
그 말을 듣자 빨간 머리의 미간에 큰 주름이 잡혔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러고 보니 이름도, 사는 곳도,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어, 모르겠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럼 뭐가 기억이 나는데?”
“그냥 어디선가 막 도망친 것 같아.”
“거기가 어디인데?”
“모르겠어. 그냥 묶여 있었던 것 같은 답답한 기분도 들고. 잘 모르겠어.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너 그럼 혹시 탈옥이라도 한 거 아냐?”
“…….”
“좋아. 정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더 묻지는 않을게. 그렇지만 이건 뭐야?”
예리엘이 손잡이에 독수리 모양이 그려져 있는 권총 한 자루를 빨간 머리에게 보여 준다.
베레타 M92F, 과거 미군에서 흔히 사용했던 제식 권총이며 자동 권총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명한 권총이다. 장탄수가 타 권총에 비해 많아 적들과 난사전을 벌일 때 매우 유용하지만 그 때문에 그립감이 많이 떨어지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빨간 머리가 갖고 있던 M92F의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손잡이를 보니 아마 주인의 입맛에 맞게 개조가 된 모양이었다.
“권총이잖아?”
“누가 몰라서 물어? 이거 어디서 난 거냐니까?”
“모르지. 그냥 계속 갖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좋아. 그 총이 어떤 총인지는 알아?”
예리엘이 따지듯 윽박지른다.
“아니, 몰라.”
예리엘은 성의 없는 빨간 머리의 대답에 화가 치밀었다. 상냥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당장 테이블을 뒤엎고 이 녀석을 쫓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까지 치밀 정도였다. 그러나 베레타를 이 빨간 머리가 어떻게, 왜 갖고 있는지 예리엘은 꼭 알고 싶었다. 아니, 꼭 알아야만 했다.
“좋아. 그러면 그 총에 대해 기억이 날 때까지 여기 있어.”
예리엘이 선언한다.
“여기?”
“그래. 여기.”
“왜?”
왜냐는 빨간 머리의 질문에 예리엘이 당황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처음 보는 낯선 빨간 머리에게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못 되었다. 예리엘은 잠시 이리저리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억지를 부린다.
“밥 줬잖아.”
“…….”
빨간 머리가 대답하지 않자 예리엘은 자신의 억지가 통하지 않았을까 싶어 슬며시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빨간 머리는 별 생각 없이 서슴없이 말한다.
“밥은 계속 주는 거냐?”
“좋아. 밥은 꼬박꼬박 챙겨 주지. 또?”
예리엘은 아차 싶었다. 저 빨간 머리가 다른 요구를 한다면 좀 귀찮아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잠도 재워 주나?”
걱정은 기우였다.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는 녀석이다.
“물론. 그리고 그 총을 어디서 얻었는지만 기억해 내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아. 그땐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어. 고마워.”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
“대신 여기 있는 동안 일을 해야 해.”
“일?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빨간 머리가 주변을 살펴본다. 꽤 넓은 가게 안에 많은 총과 연장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다양한 기계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걱정 마셔. 너무 일이 많아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예리엘이 자신의 거짓말에 계면쩍은 듯 말끝을 얼버무리며 볼이 살짝 달아오른다. 참으로 정직한 아가씨다.
“좋아.”
빨간 머리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머물 곳과 시간이 좀 필요했다. 게다가 여기에 있으려면 적어도 소일거리라도 있어야 할 텐데 예리엘의 일을 도우라는 제안까지 들으니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그러면 저기로 가 봐.”
예리엘은 빨간 머리를 앞세우고는 자재들과 공구가 잔뜩 쌓여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갔다. 작은 가게라고 했지만 주거공간과 작업공간을 같이 쓰는 건물 형태로 내부는 그리 좁지 않았다.
코너를 몇 번 돌자 창고라고 쓰인 문이 나왔다.
“저기 세 번째 박스 위에 열쇠가 있으니 그걸로 문을 열어.”
빨간 머리는 예리엘이 시키는 대로 열쇠를 찾아 쇠사슬로 묶인 자물쇠를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뒤편에서 예리엘이 문 옆의 스위치를 올리자 창고가 환하게 밝아진다.
“자, 여기가 당분간 네가 있을 곳이야.”
빨간 머리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에 이리저리 분해된 총들과 다양한 부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총기에 발린 그리스 냄새가 은근히 코끝을 자극했다.
빨간 머리가 한쪽 선반에 놓인 부품 몇 개를 만지작거린다. 그러자 예리엘은 정색을 하며 차갑게 말한다.
“그쪽에 있는 물건들은 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지 뭐.”
빨간 머리는 한쪽 벽면에 놓여 있는 색이 바랜 누더기 매트리스 위로 점프하여 몸을 누인다. 그리고 쿠션을 느끼며 몸을 퉁퉁 튕긴다.
“이거 푹신하고 좋은데?”
“그리고 저쪽 위 선반에 구급약 있으니 얼굴이랑 다른 상처에도 좀 바르고. 다른 데 아픈 데는 없지?”
예리엘은 말은 꺼냈지만 괜한 질문이다 싶었다. 아픈 사람이 다섯 접시나 먹어 치울 만큼 먹성이 좋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없어. 아주 쌩쌩한걸.”
예상했던 답변이다.
“그럼 피곤할 테니 어서 자.”
예리엘이 창고 문을 닫으려 한다.
“잠깐.”
“왜?”
“고마워.”
“뭐가?”
“밥도 주고 이런 좋은 잠자리도 줘서.”
“알면 다행이고.”
“그리고 이제 그 총은 좀 내려 줘도 될 것 같은데. 겁나서 어디 살겠어.”
그러고 보니 빨간 머리를 집 안으로 옮겨와서 지금까지 예리엘은 권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심지어 음식을 건네줄 때도.
예리엘이 약간 당황하며 총을 쥔 손을 뒤로 슬쩍 감춘다.
“이건 그냥…….”
예리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빨간 머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지방을 넘어 예리엘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빨간 머리가 다가서자 예리엘이 한 발자국 물러선다.
“오지 마.”
왠지 모를 불안감에 예리엘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빨간 머리가 또 한 발자국 다가선다. 예리엘이 물러서지만 가뜩이나 좁은 통로 덕에 바로 벽에 등을 부딪치고 멈춰 선다.
“오지 말라니까.”
떨리는 목소리의 예리엘이 빨간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누려 한다.
순식간이었다. 빨간 머리는 미끄러지듯이 빠른 동작으로 예리엘이 손에 쥔 권총을 낚아채 버렸다. 예리엘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잔뜩 긴장했지만 빨간 머리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하며 베레타의 디코킹 레버를 올린 채 예리엘의 손에 총을 쥐어 주고는 슬며시 창고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잘 자라고.”
어느덧 매트리스에 누운 듯한 빨간 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리엘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는 긴장이 풀린 듯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총을 빼앗기는 순간에 빨간 머리의 날카로운 눈빛이 너무나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독이며 일어서려는 그녀의 두 눈에 안전장치가 풀린 권총이 들어왔다.
‘안전장치.’
예리엘이 속으로 되뇌었다.
“건스미스라면서 총 쏘는 법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빨간 머리가 마치 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한마디 뱉는다. 예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요리사라고 다 잘 먹는 게 아니라고!”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잘 자.”
창고 안에서 더 이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예리엘도 진정이 된 듯 창고 앞에 있던 나무박스 위에 털썩 앉아 빨간 머리가 갖고 있던 베레타를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손잡이 뒤쪽에 조그맣게 새겨진 ‘AG’라는 각인은 4년 전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오빠 아이딘 글라이스너의 표식인 게 분명했다. 유명한 건스미스는 자신이 튜닝한 총에 자신만의 표식을 곧잘 남기곤 했는데 아이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예리엘은 한눈에 이 베레타가 그가 튜닝한 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리엘의 오빠 아이딘이 튜닝한 총은 4년 전 그가 죽을 때까지 열 정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딘은 아무에게나 총을 튜닝해 주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저 빨간 머리는 도대체 이 총을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일까?
오빠가 손을 본 베레타를 가지고 있는 빨간 머리와 연관된 수많은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예리엘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어느덧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한 예리엘은 창고 문 앞에서 안쪽의 인기척을 확인하더니 창고 문에 커다란 쇠사슬로 연결된 자물쇠를 채운다.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빨간 머리 녀석에게 조금은 가혹할지 모르지만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그렁. 철컥.
소리와 함께 쇠사슬 자물쇠가 잠겼다. 예리엘은 커다란 자물쇠가 잘 잠겼는지 확인을 하고는 작업대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빨간 머리로부터 빼앗은 권총을 자신의 휴대용 공구함 밑바닥에 보이지 않게 잘 숨겨 두었다. 아마도 여기라면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졸린 눈을 수차례 비비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행히도 다음 날은 비가 그쳤다. 예리엘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며 손님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작은 건스미스에서 손님맞이 준비라는 것이 부품이나 도구들의 먼지나 털고 기름칠하는 뻔한 일이지만 하루라도 빼먹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한 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간 머리는 늦잠을 자는지 깜깜무소식이다. 들어가 깨울까 하다가 자물쇠만 풀어 놓았다. 그리고는 약간 신경이 쓰여 토스트 몇 장과 주스 한 잔을 창고 앞에 가져다 놓는 걸로 마음을 정리했다.
카운터로 자리를 옮긴 예리엘은 능숙하게 콜트45 권총 하나를 분해했다. 능숙한 그녀의 손놀림에 콜트45의 총열과 슬라이드가 빠져나왔다. 예리엘은 총신 안 배럴에 눈을 대고 잠시 강선을 살펴보더니 강선 끝에 있는 이물질을 능숙하게 제거해 낸다. 그리고는 방청유를 묻힌 플란넬 소재의 천으로 부품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닦아 낸다. 이로써 일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예리엘이 손을 본 콜트45 권총은 이곳 노만 마을 경비대 장교의 권총인데 매번 간단한 기본 손질까지 이곳에 맡기고는 했다. 이전에 유명한 장군이 쓰는 총을 물려받았다고는 하는데 이렇게 격주로 손을 보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다. 벌써 3년 가까이 이 총을 만져 주곤 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총을 사용한 흔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형편없고 덜떨어진 경비대 장교의 장식품일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외부만 슬쩍 닦고 보내도 그 얼간이 장교는 아마 손질이 끝난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럼에도 예리엘이 나름 신경 써서 손질하는 이유는 수많은 경비대 일 중에 제대로 돈을 지급받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총의 주인이 무능할지언정 정직하긴 하니까.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