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첫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예리엘! 오랜만이야! 우리 애기가 네 얼굴 못 봐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 우리 애기 잘 있었어?”
예리엘은 손님이 건네주는 M14 한 정을 가볍게 건네받았다. M14는 과거 미국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미군에서 제식 소총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M16과 함께 닉스 연방 중앙군의 제식 총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닉스 연방에서 가장 흔한 총 중에 하나였다.
단지 내부 메커니즘이 다른 총들에 비해 비교적 복잡한 형태라서 웬만한 손재주가 아니고서는 관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소총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무나 손쉽게 손을 볼 수 있는 총은 아니었다.
예리엘이 탄창을 빼고 노리쇠를 당기더니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딸깍, 딸깍, 딸깍.
“얘가 많이 아프네요. 이렇게 울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격발음을 들으라는 듯 총신을 손님에게 가져다 댄다.
“그랬나? 어째 잘 안 맞는다 싶더라니. 바로 눈앞에 있는 사슴도 놓쳤다니까.”
단번에 이상 여부를 알아보는 예리엘의 눈썰미에 손님 또한 장단을 맞춘다.
“얘 입원 좀 해야겠는데요.”
“그래? 그렇게 심해?”
“가스 실린더 쪽에 좀 이상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사정거리가 좀 줄어들지 않았어요?”
“글쎄. 나야 원체 가까이 다가서서 사냥을 하는 스타일이라서…….”
손님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지난번 사냥 때 바위에 심하게 총을 부딪친 적이 있었거든. 그때 고장이 난 건가?”
“네. 그런 것 같아요. M14의 가스 실린더가 유독 충격에 약하거든요. 아주 이번에 보호 파츠를 장착해 드릴게요. 방열판 역할도 가능해서 연발 사격 시에 좀 더 편할 거예요.”
“그래? 그러지 뭐. 빨리만 해 줘. 며칠째 사냥을 못 나가서 몸이 좀 근질근질하거든.”
손님은 그렇게 M14 한 정을 맡기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손님들이 연이어 들이닥친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권총 3정, 소총 2정의 기본 손질 그리고 권총 1정과 소총 2정의 튜닝 작업까지. 이 정도라면 비로 인해 며칠간 공친 일들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
선불만 해도 2천 크리. 앞으로 한두 달은 걱정 없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려 들어와 점심도 채 먹지 못했지만 예리엘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녀가 룰루랄라 신이 나서 가게 문을 닫으려다 카운터 뒤편 구석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에 깜짝 놀란다.
“이제 끝난 거야?”
카운터 뒤편에서 일어서는 빨간 머리를 발견하고는 예리엘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깜짝이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아침부터 쭉. M14 소총 가져온 사람 있을 때부터.”
“뭐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빨간 머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카운터를 지나 예리엘에게 다가온다.
“밥은 준다며?”
오후 7시. 그럼 빨간 머리는 거의 열 시간 이상을 카운터 뒤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인데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포함한 그 많은 손님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신기한 녀석이다.
“아침에 준 것은?”
“그건 이미 다 먹었지. 밥은 준다고 했잖아?”
“알았어. 자꾸 징징대지 말고 저것들이나 치우시지.”
예리엘이 의뢰 받은 총들을 가리킨다. 빨간 머리는 군말하지 않고 그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소총과 권총을 분리해 가지런히 정리했다. 말을 참 잘 듣는 녀석이다.
* * *
노만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인 퍼플 하스피탈(Purple Hospital)은 예리엘의 원샷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주점을 겸한 식당이었다. 예리엘은 저녁을 혼자 먹기 귀찮거나 외로울 때면 곧잘 이곳에 들르곤 했다.
분위기나 인테리어, 심지어 뜬금없는 상호까지 예리엘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5분 거리의 식당을 두고 한 시간씩 걸려서 다른 식당을 갈 엄두는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마을에서 가장 친한 언니이자 친구인 페이가 운영하는 곳이기에 페이와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리엘은 자신이 늘 자리를 차지하던 카운터와 붙어 있는 바의 중앙에 빨간 머리와 같이 앉았다. 빨간 머리는 낯선 곳에 와서인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나 간호사 캡을 쓰고 간호사 복장까지 한 여종업원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빨간 머리는 이 신기한 주점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음식이 나오고부터는 또 먹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리엘은 쉬지 않고 먹는 빨간 머리를 쳐다보았다. 구질구질한 옷을 버리게 하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옷을 깔끔히 입혀 놓고 보니 꽤나 스타일리쉬한 모습이었다. 빨간 머리가 염색한 것인지 유전자 변이로 인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간에 빨간 머리가 갸름하고 뽀얀 얼굴에 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여자라면 무조건 호감을 가질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얼굴에 잔뜩 있던 상처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치 대리석같이 깨끗한 얼굴이다. 그렇게 금세 나을 상처는 아닌 듯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뭐 묻었어?”
빨간 머리가 냅킨으로 입 주위를 문지른다.
“아니, 너무 맛있게 잘 먹어서.”
“그래도 너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그가 혀로 핥은 듯 깨끗이 비워진 예리엘의 접시를 스푼으로 가리킨다. 디저트로 시킨 사슴 스테이크가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현재 접시의 수로 봐서는 4:4 동점. 그러나 둘의 몸집으로 봐서는 확실한 예리엘의 판정승이다.
식당 안에는 데이트를 위한 몇몇 커플도 있었지만 주로 들어오는 손님들의 열에 여덟은 남자였다. 간호사 복장의 종업원들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을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페이의 영향이 컸다. 그렇지만 페이는 멀리 여행을 떠나 오늘 자리를 비웠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온 남자들의 일부는 꽤나 아쉬운 표정들을 지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퍼플 하스피탈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올랐다. 어두운 조명 아래 테이블을 가득 메운 남녀 손님들이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때, 한층 무르익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
“아니, 여기 너희가 전세 낸 거야? 좀 떨어져 앉아.”
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 근방에서 제법 유명한 건달 호퍼 브라운이었다.
호퍼는 복서 출신의 흑인으로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덩치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엄습했다.
“다른 사람들 생각도 좀 하면서 적당히 하라고.”
호퍼가 문가에 앉은 커플에게 다짜고짜 시비다. 호퍼의 엉뚱한 시비로 홀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예리엘의 얼굴 역시 싸늘해졌다.
친구 페이의 말에 따르면 호퍼는 데이트를 위해 퍼플 하스피탈을 찾은 커플에게는 거의 예외가 없이 시비를 걸었다. 이러다 보니 호퍼의 시비에 반응한 남자 손님의 대응으로 퍼플 하스피탈은 언제나 난장판으로 바뀌었고 호퍼의 행패에 술맛이 떨어진 손님들이 그때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곤 했다. 그렇듯 호퍼가 찾아오는 날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퍼플 하스피탈에 들어서자마자 호퍼는 문 가까이에 앉은 커플 손님에게 괜한 이유로 시비를 건다. 친구 페이로부터 그의 이런 행패를 수도 없이 들었던 예리엘의 시선 또한 고울 리가 없었다.
그나마 오늘은 다행히도 호퍼의 시비에 남자 손님이 못 이기는 척 다른 좌석으로 옮기고 말았다. 호퍼는 자신이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한 듯 거들먹거리며 비어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생맥주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무서운 짐승을 상대하듯 멀찌감치 떨어져 테이블에 맥주를 올려놓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예리엘은 오늘은 그나마 큰 소동 없이 넘어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생맥주 한 잔을 비우자마자 혀가 꼬부라진 호퍼가 술주정이다. 처음에는 혼자서 쭝얼쭝얼거리더니 꺼이꺼이 울기까지 한다.
식사를 하며 계속 호퍼를 곁눈질했던 예리엘은 저 덩치에 겨우 생맥주 한 잔을 먹고 취해 버리는 호퍼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호퍼와 예리엘의 눈이 우연히 마주쳤다. 순간 예리엘이 시선을 돌렸지만 호퍼는 그녀의 시선을 분명히 의식했다.
“린! 일루 좀 와 봐.”
갑자기 얼굴이 벌게진 호퍼가 예리엘이 있는 자리로 무섭게 달려온다. 예리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몸서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저는 린이 아니에요!”
“린, 내가 잘못했어.”
호퍼는 손사래를 치는 예리엘의 말을 무시하고는 덥석 손을 잡는다. 예리엘이 깜짝 놀라 호퍼의 손을 치고 저만큼 떨어진다.
“무슨 소리예요? 어서 정신 차려요!”
예리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친다. 하지만 호퍼는 들은 척 만 척 계속 그녀에게 다가온다.
“린, 왜 그래……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호퍼가 마치 자기의 불쌍한 처지를 봐달라는 듯이 덩치에 맞지 않게 두 눈을 깜빡거린다. 하지만 예리엘은 애써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호퍼가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쾅!
죽 밀려 나간 테이블이 바닥에 엎어졌다. 예리엘의 표정이 겁에 질려 한층 굳어졌다.
“린, 너도 나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야?”
호퍼가 손을 뻗어 예리엘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이러지 마!”
“뭘 이러지 마? 린, 정말 사랑한다니까.”
호퍼는 예리엘을 꼭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완강히 거부하는 예리엘의 얼굴에 당혹감과 불쾌감이 어렸다. 벗어나려 했지만 호퍼의 억센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혹시나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지만 술집 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간의 호퍼의 기세에 눌려 애써 못 본 척할 뿐이었다. 예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이 순간을 빨리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하게 당황한 호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넌?”
예리엘이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빨간 머리?”
예리엘과 같이 온 빨간 머리가 호퍼의 왼쪽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호퍼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힘 하나 못 쓸 것 같은 샌님 같은 녀석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상황 자체에 열이 올랐다. 예리엘은 그 틈을 타 호퍼의 품안에서 벗어나 멀찌감치 물러선다.
호퍼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뭐야. 빨리 놓지 못해.”
빨간 머리가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호퍼의 손목을 잡고 있던 빨간 머리의 팔이 크게 휘둘러졌다. 그러자 호퍼의 거구가 하늘로 붕 날아올랐다.
“어어?”
호퍼가 등부터 바닥에 강하게 떨어져 내린다.
퍽!
“크윽!”
“네 말대로.”
빨간 머리가 등을 잡고 괴로워하는 호퍼를 보며 씩 웃었다. 호퍼가 약이 잔뜩 올라 허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빨간 머리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