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C-E3
그의 공식 명칭은 ‘PHC-E3’로 행성역사위원회(Planet History Committee) 소속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의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E’는 지구를 말하는 것일 테고, ‘3’은 그가 세 번째 임무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숫자이리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이 지구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전임자들은 누구이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억과 정보만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임무는 지구의 역사가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즉 그는 지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하는 과거의 모든 시공간과 사건들을 감시한다.
그러다 ‘역사 버그’라는 현상에 의해 과거의 사건이 바뀔 위험에 처하게 되면 직접 과거로 가서 그 사건을 역사의 기록대로 바로잡는 일을 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공간과 사건을 감시하는 방법은 아카식레코드를 통해서이다.
아카식레코드는 우주의 모든 사건이 기록된 도서관으로, 우주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고유한 에너지 파동이 발생하고, 그 에너지 파동이 한곳에 모여 아카식레코드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카식레코드는 모든 우주의 디테일까지 남김없이 기록된 완벽한 우주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역사 버그가 왜 발생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는 사건의 형태로, 또는 환경의 형태로, 또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아카식레코드를 통해 역사 버그를 발견하면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 그 역사 버그를 제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일에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교육받았다.
“아카식레코드의 원 기록과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그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극도의 신경을 집중해서 조심성 있게 일을 처리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 자체가 역사 버그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절대로 당신의 존재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노출이 되더라도 그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들에게 배경 화면처럼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게 특별한 무기나 기술은 없었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이 허락된 호신용 레이저 권총과, 역사 버그의 발생과 제거, 발생 시점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손목시계처럼 생긴 탐지기 겸용 컴퓨터가 그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전부였다.
거기에 더해 지구의 일반적인 남자들보다 조금(?) 더 우수한 지적,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거로 돌아가 역사 버그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과 사건 현장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식레코드를 통해 입수된 정보는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과 사건의 진행 과정은 물론 사건 현장의 주변 환경까지 모두를 관찰하고 통제하며 교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사 버그를 제거하고 과거를 바로잡는 데 있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72시간이다.
72시간이 지나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현재로 돌아오게 된다. 타임머신의 세팅 때문인데, 이는 변동할 수가 없다.
만약 그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여태까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역사 버그가 제거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와 작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동일한 시공간으로 돌아갈 경우 차원의 통로에 균열이 생겨 걷잡을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다.
때문에 타임머신의 시스템에 의해서 동일한 시공간을 목적지로 중복 입력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다만 위원회에 상황 보고를 해서 허락을 얻은 경우에 한해서 중복 입력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절차가 길고 복잡해서 그 과정을 거치기 싫어서라도 한 번에 버그를 제거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가 매번 버그를 제거할 때마다 보고서를 올리고 OK 사인을 받지만 그 위원회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는 그도 모른다. 그저 컴퓨터에 있는 보고 체계에 따라 보고를 하고 명령을 받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행성연합(Planet Union) 아래 행성역사위원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위원회 소속의 하급 실무자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산길을 가고 있었다.
여주 본가에 머무르다가 급히 한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는 길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라’는 연락은 아니고 ‘곧 와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연락을 받자마자 소녀를 닦달해 짐을 꾸려 길을 나선 것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큰 행운을 차지한 사람의 흥분된 기쁨과 함께 그 행운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어떻게든 그 행운을 꼭 움켜쥐겠다는 굳은 결의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 날이 어두워졌는데 어디서 쉬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가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가 오로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힘든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달이 기운 것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어머니가 소녀를 보고 말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이 산을 넘어가면 우리를 하루 재워 줄 분이 계시다. 그러니 이 산만 넘어가도록 하자.”
다정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소녀가 어떻게든 어머니를 좀 쉬게 해 드리고 싶어 다시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그럼 잠시만 쉬었다 가기로 하자.”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두 모녀는 길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숨을 돌렸다. 스산한 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아무래도 오빠나 누굴 불러서 같이 올 걸 그랬습니다.”
“왜, 무서운 게냐? 하지만 그러면 또 하루 이틀이 훌쩍 지나가 버릴 터인데, 그럴 시간이 없질 않느냐?”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습니까, 어머니. 지금 당장 오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소녀는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산길을 따라 밤바람이 불어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을 씻어 주었다.
별로 쉰 것 같지도 않은데 어머니는 사랑과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다 말을 꺼냈다.
“자, 다시 가 보자꾸나. 내가 살펴보니 저쪽 산길이 아마 지름길인 것 같으니 그리로 가도록 하자. 좀 험할 것 같기는 하지만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네, 어머니.”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숲 속 길로 향했다.
***
찻집에 홀로 앉아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기.
이건 그, E3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아메리카노, 투 샷으로 주세요.”
그는 커피를 받아 들고 구석의 자기 자리로 갔다.
그가 처음 지구에 왔을 때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이제는 그 쌉쌀한 맛과 입안에 감도는 싱그러움을 하루라도 느끼지 않고 지나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생김새도 다르지만 그 표정도 또한 모두 달랐다. 그들의 표정 속에는 희로애락이 들어 있었다.
그는 결코 가져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 가질 것 같지 않은 그 감정들.
그는 기뻐할 일도 화낼 일도, 슬퍼할 일도 즐거워할 일도 없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지구의 70억 인구 중 어느 누구도 그와 관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틀림없이 미래에도.
그는 교육받은 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필요한 경우라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정’을 주고받을 정도로는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구인과 정을 나눌 만큼 가깝게 지내는 것은 그의 임무에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하여, 그는 오늘도 희로애락의 세상에서 분리된 채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커피를 마신다.
우우웅.
왼 손목에 진동이 느껴졌다. 탐지기를 보니 버그의 출현을 알리는 빨간 불이 깜빡거렸다. 그는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처음 지구에 왔을 때는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대기했었다. 버그가 발생하면 바로 가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여유가 생겨서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버그가 생기면 그 여파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그 순식간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버그를 제거하는 것이지 시간이 아니었다.
버그가 제거되어 역사가 바로잡히면 사람들은 버그에 의한 역사의 오류를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버그에 의해 잠시 변했던 세상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에 속해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우리의 우주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책장의 책을 한 권 빼고 그 안에 있는 비밀 단추를 눌렀다.
삐걱.
책장이 문처럼 열리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타임머신을 1층 거실로 옮겨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에 올 사람도 없고, 설령 누가 와서 보더라도 이게 무슨 장치인지 알 수가 없을 터였다.
게다가 타임머신은 버그 발생 경보와 그의 유전자 정보가 일치할 때만 작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꼭꼭 숨겨놓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임머신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너무 크고 복잡해서 도저히 옮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 불편함과 귀찮음을 감수할 수밖에.
그는 타임머신의 캡슐 속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은 다음, 탐지기에 나타난 버그 발생 시점을 확인하고 도착 시간을 그 71시간 50분 전으로 세팅했다.
그러고는 동작 단추를 눌렀다.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