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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2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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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2화
소녀를 만나다(1)

1865년 8월, 조선 경기도.
그는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로 왔다. 소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소녀는 나중에 이 나라의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그는 현장에 도착해 탐지기를 통해 아카식레코드의 정보를 살펴봤다.
산에서 길을 잃게 되는 단순한 사고였다. 그는 현장을 둘러보며 어떻게 오류를 바로잡을지 계획을 세운 다음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다음 날 그는 여주로 가서 소녀의 집 근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종일 그 소녀를 관찰했다.
소녀는 성격이 활달한 것 같았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강단도 있어 보였다. 이야기로만 만나던 역사적 인물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생생한 생동감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소녀의 운명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그는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출발하는 것을 보고 먼저 산길로 갔다.
어두워질 무렵 산에 도착한 그는 한 지점에 자리 잡고 가만히 앉아서 그들을 기다렸다.
산에서는 금방 밤이 찾아왔다. 해가 지자 바로 어두워졌고 조금 있다가 소녀와 어머니가 나타났다.
그들이 길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걸 보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다시 가 보자꾸나. 내가 살펴보니 저쪽 산길이 아마 지름길인 것 같으니 그리로 가도록 하자. 좀 험할 것 같기는 하지만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네, 어머니.”
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숲 속 길을 벗어나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 누구시오?”
어머니가 경계하는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아, 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빠져나오는 참입니다. 근데 두 분은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밤길에 위험할 텐데…….”
그는 막 위험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네. 저희는 산 너머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그쪽 길이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어머니가 한 팔로 소녀를 자기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저도 지금 이쪽에서 헤매다 나오는 길인데, 이쪽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큰길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둘러 인사를 하고 소녀와 함께 큰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돌려 힐끔 그를 쳐다봤다. 그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얼떨결에 입꼬리를 가로로 최대한 늘려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풋.”
소녀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기 표정이 좀 이상할 것 같기는 했다.
“쩝.”
그는 표정을 풀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임무는 끝났다.
그는 탐지기를 봤다. 그런데 아직 알람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급히 머리를 굴려봤다.
‘아, 그렇다면 이건…….’
그는 급하게 소녀와 어머니가 사라진 숲길을 향해 달려갔다.

깊은 숲 속에서 몇 명의 불한당이 소녀와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얍!”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기합을 넣으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가 가진 모든 힘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놈들을 공격했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고 발과 발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놈들의 완력도 대단했다. 놈들도 쉬운 상대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칼을 꺼내들었다.
스르릉.
한기를 느끼게 하는 쇳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칼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가 몸을 날리며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주변 환경이나 다른 것들을 활용해서 놈들을 제압하거나 따돌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레이저 권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칼을 피하며 몸을 굴려 놈들과 거리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그게 뭔지 모르는 놈들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칼을 짓쳐들어왔다.
푸슝, 푸슝.
레이저 광선이 놈들의 가슴에 명중했고 놈들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겨우 상황을 수습한 그가 큰 숨을 몰아쉬며 쳐다보니 소녀의 어머니는 기절한 듯 쓰러져 있고 소녀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경우를 이중버그라고 한다. 두 개의 역사 버그가 겹쳐서 나타나는.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람에 소녀에게 자신을 노출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낭자, 너무 놀라지 마시오. 이제는 편안히 길을 갈 수 있을 게요. 그나저나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소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를 향해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소녀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이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소녀 앞에서 그냥 사라져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를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어디 사시는 뉘신지요? 존함을 알려 주시면 나중에 제 어머니와 함께 찾아뵙고 꼭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는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녀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내…… 이름?’
“아, 전 E3라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그는 이 생소한 이름에 대한 소녀의 반응을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좀 그럴 듯한 이름으로 하나 만들어 놓을 걸…….
“아, 네. 이슬휘 도련님.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소녀의 입에서 발음 된 그 이름에 귀가 번쩍 열렸다.
‘이슬휘? 흠, 괜찮은데?’
“저는 민자영이라 하옵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딴생각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또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네? 저를 아십니까?”
그때 소녀의 어머니가 깨어났다. 소녀의 시선이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순간 그는 현재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에게도 이름이 생겼다.
이슬휘.
그는 자기에게 이름을 준 그 소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운명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

그가 현재로 돌아오니 역사는 정상적으로 바로잡혀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그의 마음만 빼고.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이중 버그가 발생했음과 어쩔 수 없이 레이저 총을 사용하게 된 경위 등을 보고했다.
그의 그런 부주의로 인해 또 다른 버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질책성 답신과 경고장이 왔지만 다행히 징계나 소환 등의 내용은 없었다.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역사학도가 되어 지구인의 삶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저녁이 되면 동네 찻집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 소녀의 표정뿐이었다.
맑고 밝은 표정, 따뜻하고 정감 가득한 표정, 두려움을 꾹 누르며 인사를 건네던 표정 등 그가 미행하면서 봤던 소녀의 표정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덧씌워져 보일 뿐이었다.
그가 지구에 온 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 버그를 제거했고, 그를 위해 또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했지만 그 대상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마음이 쓰인 적은 없었다.
이것은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감정이 드디어 표출된 것일까, 아니면 그 소녀의 특별함 때문일까.
그는 그 소녀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타임머신을 작동시켜 달라고 거짓 보고서를 꾸며 올렸다.
그는 구구절절이 자기의 과거 행에 대한 명분을 설명했다.
실수를 해서 자신을 노출한 건 물론이고 레이저 총까지 쐈다. 그러므로 버그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발생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그 시점으로 가서 버그 발생 가능성을 차단하고 예방을 해야 한다…….
타임머신은 버그가 발생했을 때만 자동으로 작동되며 평소에는 마음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잠겨 있었다.
그것은 마음대로 과거를 들락거리며 버그를 발생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원회의 원칙이었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른다.
게다가 ‘Yes’냐, ‘No’냐의 승낙을 기다리는 입장에서의 1분 1초는 마치 블랙홀 속의 시간처럼 더디기만 했다.
빙고!
드디어 승낙의 답신이 왔다.
단, 버그 발생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라면 바로 그 시점보다는 그 이후 5~10년 정도가 지난 시점을 확인해 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아카식레코드를 살피며 어느 시점으로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 봤다.
그러다 1874년을 목표 시점으로 정했다. 그녀가 첫 아들을 잃은 지 3년 만에 다시 아들을 낳은 해였다.
그녀의 인생 중에서 비교적 큰 사건 사고도 없이, 그나마 잠시라도 행복했을 것 같은 시점이었다.

***

그의 생각대로,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향원정에서 아들과 함께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아들을 대하는 그녀의 살가움과 다정함은 그녀의 행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루루, 까꿍!”
아들과 장난할 때 그녀의 표정은 소녀 때의 그 맑고 밝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소녀티를 벗고 한 나라의 국모다운 아름다움과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시아버지와의 힘겨운 관계와 나라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백척간두의 상황 속에서 매일 매일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텐데도 아름다움은 더 빛이 났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흘 동안 내내 향원정을 맴돌며 그녀를 훔쳐봤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혹시 자기를 기억하겠냐고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내실로 들어가면 향원정으로 올라가, 그녀가 기대섰던 기둥에 기대어서 그녀가 바라보던 연못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붙여 준 이름을 되뇌어 봤다.
이슬휘.
그는 그녀가 준 이름에 의미를 더하기 위해 한자 사전을 놓고 며칠 동안 고민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빛나는 푸른 구슬’이라는 의미의 ‘璱輝’가 그것이었다.
이슬휘(李璱輝).

“황후마마, 저는 푸른 구슬 슬 자에 빛날 휘 자를 쓰는 이슬휘라고 합니다.”
어느덧 사흘이 지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멀리 보이는 그녀를 향해 나지막이 혼잣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녀를 향해, 그리고 자기의 존재를 결코 알지 못할 그녀를 향해 이렇게 멀리서나마 인사를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마마,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움 잃지 마시고 의연하게…….”
그는 갑자기 온몸에 열이 확 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져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도대체 자기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을 맺었다.
“그때까지 평안하십시오.”

***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봤으니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이 지구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슬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이 어디 그녀 한 사람뿐이겠는가?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나온다’고.
그만큼 누구에게나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인생인 것이다.
다만 그녀의 운명이 이 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기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컸던 것인데, 그것도 그는 이 한마디로 정리를 해 버렸다.
그것이 역사인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다.
과거를 바꾸면 현재와 미래가 바뀐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 수도 있고 죽을 사람과 살 사람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뒤바뀐 운명을 떠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금방 알게 되었다.
이제는 찻집에서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그녀의 생각을 했다.
그녀의 밝은 표정이 오버랩 되면서 그녀가 앞으로 겪어야 할 가혹하고 슬픈 운명이 떠올랐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일상의 삶이 그 위에 덧씌워지면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지구에 와서 배운 단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것은 ‘망각’이라는 것이었다.
지구인에게는 물론 그의 종족에게도 기억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특별한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진의 빛이 바래듯 희미해져서 결국에는 다 잊히고 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찻집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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