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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7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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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7화
동해의 용(1)

늦은 밤,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방 안에서 두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비록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다부진 풍채에 상대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앞에 놓여 있는 주안상에서 잔을 들어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꺼냈다.
“그래, 자네 몸은 좀 어떤가? 먼 길 다녀왔는데 쉴 틈도 안 주고 이리 오라 해서 미안하네.”
“아니옵니다. 돌아왔으니 당연히 제일 먼저 폐하께 보고를 올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앞에 앉은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내는 깡마른 몸매에 얼굴에 피곤함이 쌓여 있었지만 눈매만큼은 상석의 남자 못지않게 형형했다.
“고맙네. 자, 이리 와서 내 술 한 잔 받게.”
사내가 무릎걸음으로 주안상 가까이로 다가왔고 상석의 남자는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사내가 술을 받아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상석의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지금 당과 신라의 형국은 어떻던가?”
“예, 폐하. 당은 서로는 토번의 잔도를 격파하고 북으로는 돌궐의 반란을 진압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이제 그들에게는 동쪽의 신라만이 눈엣가시로 남아 있을 뿐이옵니다. 그래서 아마도 신라에 대해 직접 침략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신라 조정을 강하게 압박해서 굴복시키려 들 것으로 보입니다.”
“음, 그렇군……. 그럼 지금 신라는 내부적으로 어떤 형세이던가?”
“네, 현재 법민 대왕께서 당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계시지만 자기네 세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한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사옵니다.”
“진골 귀족들이?”
“네, 대표적인 인물이 김흠돌이온데……. 아무래도 왕권이 강화되면 귀족들의 힘은 약해질 것이 뻔하니…….”
상석의 남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소식은 없는가?”
사내는 상석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보장왕께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꾀하다 당에 의해 유배당하셨다 하옵니다.”
상석의 남자는 흠칫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표정에는 많은 회한과 안타까움 등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참 후에 상석의 남자가 사내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수고했네. 이제 그만 가서 좀 쉬도록 하게. 더 많은 이야기는 내일이나 언제 다시 하도록 하세.”
사내는 상석의 남자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

깊은 생각을 안주 삼아 혼자 술을 마시던 상석의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원에는 고요한 달빛을 받은 나무와 풀 들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봤다.
고향 고구려를 떠나온 지 몇 해던가.
지난날들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개소문.
이것이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의 이름이었다.
자기네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외치며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는 당에 맞서 싸우기를 수십 년, 연개소문은 이런 식의 전쟁으로는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당과 대등한 크기의 영토와 힘을 가진 대제국 건설이었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영토를 합친 하나의 나라.
거기다가 등 뒤에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며 신경을 분산시키는 왜까지 하나로 합친다면 모든 힘을 당에 집중시켜 당과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그것만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주변 정세를 살핀 연개소문은 자기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접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백제가 멸망한 상황에서 백제계가 장악하고 있던 왜의 집권층에도 빈틈이 보였던 것이다.
그 틈을 노려 왜의 실권을 장악한다면 고구려, 신라와 왜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큰 뜻을 가지고 왜로 와서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장악하고 천황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사이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당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냥 고구려에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고구려의 영토는 지켰을지 몰라도 왜를 얻지는 못했을 터였다. 결국,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법민이 신라의 왕위를 무사히 이어받았다는 것이었다.
법민이 신라왕으로 있는 이상 자기의 웅대한 계획을 실현할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비록 자기 손으로 이룰 수는 없겠지만.
연개소문은 법민을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남겨두고 왔던 세 아들을 생각했다. 안타깝고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

연개소문은 신라의 법민 왕에게 편지를 썼다.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형세를 정리하고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법민도 또한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의지를 다시 각성하고자 하는 바람에서였다.
거기에 덧붙여 법민에게 앞으로의 구체적 행동을 제안하는 내용도 추가했다. 그러다 보니 편지가 생각보다 한참 길어졌다.
연개소문은 편지를 둘둘 말아 대통에 넣고 밀랍으로 봉인했다.
연개소문은 다시 사내를 불러들였다.
“자네 몸은 좀 괜찮아졌는가?”
방으로 들어오는 사내를 보고 연개소문이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폐하의 하해 같은 은혜와 배려 덕분에 아주 많이 좋아졌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사실은 내가 신라에 사람을 보내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만 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라네.”
“다른 사람을 왜 찾으시옵니까? 당연히 제가 가야지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자네 몸이 아직 완전한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되지만 자네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 널리 해량해 주게나.”
“오래전에 이미 죽었을 저를 살려 주신 분이 폐하이십니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폐하의 큰 뜻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제 한 목숨 따위는 결코 아깝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명해 주시옵소서.”
“정말 고맙네.”
연개소문은 대통과 함께 반으로 쪼개진 옥 노리개, 그리고 금덩이 몇 개를 사내에게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 대통에 든 편지를 신라의 법민 왕에게 전달해 주게. 그리고 이 옥 노리개는 나와 법민 왕 사이의 정표이니 이걸 먼저 보여 주면 나인 줄 알 걸세.”
“잘 알겠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법민 대왕께 전해드리고 오겠사옵니다.”
“그래, 그래. 이번에 다녀오면 내 자네를 편안히 푹 쉬도록 해 주겠네. 그러니 마지막 임무라 생각하고 조심해서 잘 다녀와 주게. 여기서든 신라 땅에서든 자네를 노리는 살수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심려 마시옵소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겠사옵니다.”
“그래, 좋다. 그럼 언제 출발하겠느냐?”
“지체할 게 뭐 있겠습니까?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하겠사옵니다.”
“그렇게까지 해 주다니 정말 고맙네, 대광.”

***

대광은 집에 들러 행장을 꾸렸다. 여벌의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볶은 곡식과 말린 고기, 약 등을 대통과 함께 넣어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대광은 칼집을 들어 칼을 꺼냈다.
스르릉.
쇳소리를 내며 칼집에서 빠져나온 칼이 불빛을 받아 빛을 냈다.
연개소문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그에게서 받은 칼이었다. 대광은 연개소문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시간 동안 검술을 연마했고 한때는 하늘 아래 자기를 당할 자가 과연 있겠느냐고 자부할 정도까지 되었었다.
하지만 세월의 힘은 무서웠다. 꽃이 피면 반드시 지기 마련이고 인생의 황금기가 있으면 그다음엔 내리막길이 있는 것이다.
대광은 다시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칼집을 보따리 옆에다 조용히 놓았다.
대광은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가재도구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서책과 옷가지, 이부자리 등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자기의 몸 상태로 봐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광은 정리를 끝내고 난 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난 후 보따리를 등에 메고 칼을 집어 들었다.
집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구름이 달을 가려 어둠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었다.
대광은 황궁 방향을 향해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러고는 바람처럼 소리 없이 재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뛰어나와 대광이 황궁을 향해 큰 절을 올렸던 자리로 왔다. 그들은 대광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역시 왕자님 말씀대로군. 난 저놈을 쫓을 테니 너는 얼른 가서 왕자님께 보고하고 사람을 더 데리고 오도록 해라.”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하나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거의 동시에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

대광은 낮에는 숲 속에 숨어 잠을 자고 어두워지면 길을 달려 며칠 만에 바닷가에 도착했다.
대광은 신라 이주민 마을에 숨어들어 신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봤다.
왜로 건너오는 신라의 이주민이 점차 늘어나면서 신라와의 상거래도 빈번해져 오가는 배들이 꽤 자주 있었다.
대광은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배를 찾아내어 선주에게 미리 뱃삯을 치렀다.
“아침 일찍 해 뜨면 바로 출발할 터이니 늦지 마시오.”
넉넉한 뱃삯에 기분이 좋아진 선주가 웃으며 말했다. 대광은 고개만 가볍게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돌아섰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만 아무 일 없기를.
대광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잠이야 배 안에서 자면 될 터였다. 달리 할 일도 없을 테니까.
대광은 종이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희미한 방 안 구석 벽에 기대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연개소문과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그 세월 동안 대광은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어느 누구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연개소문의 곁을 지켰다.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그보다 더 큰 감동과 용기와 희망을 준 사람이 연개소문이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연개소문의 반대 세력과 또 뒤를 이어 황위를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암투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 지금, 하여 연개소문의 안위마저 걱정스러운 이때에 자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꼭 필요한 때인데 신라에 다녀온 후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니, 신라에 무사히 다녀오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 신라에 갔다가 돌아오지는 못하더라도 신라까지는 꼭 가서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사히 배를 타야 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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