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용(2)
대광은 새벽빛이 뿌옇게 밝아오자 포구로 향했다.
그때였다.
“저기다!”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소란해졌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달려와 대광을 둘러쌌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칼이 들려 있었다.
대광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다섯 명.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검술의 고수들 같았다.
그렇지만 감히 자기를 상대하는데 다섯 명밖에 동원하지 않았다니,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인단 말이지?’
대광은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대광이 칼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가자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이 칼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띠었다.
어느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에 가득했다.
이렇게 포위된 상태에서는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렇다면…….’
대광은 그들을 향해 빙글빙글 돌다가 그들 중 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한 명을 향해 쾌속 돌진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섯 명도 대광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대광은 나머지 네 명의 공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명을 향해 칼을 뻗었다. 공격해 들어오던 그 한 명은 자기를 향한 칼끝을 보고 얼른 칼을 돌려 방어 자세로 바꾸었다.
챙.
칼이 서로 부딪치며 둘의 몸이 교차했다. 대광은 얼른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섰다.
대광은 그들이 숨도 고르기 전에 자기와 교차했던 남자에게로 칼을 찔러 갔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칼을 움직여 남자의 얼굴로 햇빛을 반사했다.
그 바람에 남자의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다. 남자가 눈을 찡그리며 급히 칼을 올려 대광의 공격을 막았다.
챙―.
남자가 대광의 칼을 밖으로 쳐 냈지만 대광은 어느 틈에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위에서 칼을 내리찍었다. 기겁한 남자가 다시 칼을 올려 대광의 칼을 막아 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대광은 어느새 남자의 가슴을 향해 칼을 찔렀고 칼끝은 남자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헉…….”
남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광이 남자의 가슴에서 칼을 뽑자 남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넷.
서둘러야 했다. 이제 곧 떠날 배를 놓치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지체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게 뻔했다.
순식간의 상황에 네 명이 잠시 흠칫 하는 사이에 대광은 오른쪽 가까이에 있는 남자를 향해 칼을 뻗었다.
대광의 칼이 남자의 왼쪽 가슴에 닿기 직전 남자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 칼을 피했다.
그러면서 대광의 등을 노리고 칼을 휘둘러 왔다.
남자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던 대광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남자 쪽으로 틀면서 엎어질 듯이 몸을 숙여 남자의 칼을 피했다. 그러면서 비어 있는 남자의 복부를 향해 깊숙이 칼을 휘둘렀다.
서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아랫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대광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제 셋.
순식간에 두 명을 잃은 남자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한꺼번에 대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칼과 칼이 어지럽게 부딪치며 춤을 췄다.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다 보니 공격은커녕 방어만 하기에도 힘이 부칠 지경이었다.
간혹 한 명에게서 허점이 보여도 다른 두 명 때문에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대광은 점점 지쳐 갔다.
뿌우―.
그때 출항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대광이 타야 할 배임에 틀림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묘수가 필요했다.
대광은 피하는 척 몸을 날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바닥이 모래와 흙이 섞여 부드러운 곳이었다.
대광은 계속 방어를 하면서 오른발을 모래흙 속으로 깊숙이 넣었다. 그러고는 냅다 발을 차올려 세 명을 향해 모래흙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셋의 동작이 잠깐 흐트러졌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대광은 칼을 휘두르며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하나 사이를 빠져나갔다.
베었다!
왼쪽 가까이에 있던 남자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왼쪽 가슴까지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리며 깊숙하게 칼날이 그어지는 느낌이 손에 전달되었다.
대광은 이어서 그 힘 그대로 오른쪽에 있는 남자의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칼을 내리그었다.
하지만 남자는 재빨리 몸을 돌려 칼날을 피했다. 남자가 피하는 모습을 본 대광은 팔을 더 쭉 뻗었고 칼끝이 남자의 옆구리에 살짝 박혔다가 나왔다.
대광은 칼을 거두며 그대로 포구를 향해 내달렸다. 대광이 타야 할 배는 이미 계선주에서 밧줄을 풀고 천천히 바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멈추시오!”
대광은 소리 지르며 배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대광은 속도를 더 높이며 잔교 끝까지 달려가서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휙.
그때 무언가가 등 뒤에서 날아와 어깻죽지에 박혔다. 화살이었다. 그 충격에 대광은 배에 닿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
대광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작은 방 안이었다.
대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침상 옆에 자기 보따리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대광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보따리를 끌어와 내용물을 확인했다. 대통은 그대로 있었다.
안심한 대광은 다시 주위를 살피며 여기가 어딘지를 가늠해 봤다.
일렁거림이 있는 걸로 봐서 배 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대광은 침상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갑판으로 나가니 선주가 대광을 보고 반겨주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떠시오?”
대광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저를 살려 주셨구려. 고맙소이다.”
선주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고맙긴 뭘. 보아하니 우리 신라 사람 같은데 왜인들에게 쫓기는 게 안돼 보여서 구해 준 것뿐이오.”
그때 어깻죽지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대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본 선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었소. 다행히 내가 어깨 너머로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 급한 대로 조치는 했소만……. 무슨 독인지도 모르겠고 배 안에 필요한 약재도 없어 제대로 치료는 못 했다오. 그러니 감포에 내리면 제일 먼저 치료부터 받으시오.”
대광은 보따리 안에서 비상용 약재를 꺼내 환부에 바르고 환으로 뭉쳐 놓은 약을 먹었다.
하지만 그 약들은 칼에 당한 자상에 사용하는 것이지 독에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잠시 줄여 줄 뿐이었다.
대광은 독이 점차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루? 이틀?
대광은 최악의 순간을 생각했다.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누구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하나.
대광은 선주를 비롯해 배 안에서 본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대광은 선주에게 맡기자고 생각했다. 자기가 여비로 가지고 있는 금붙이들을 다 주면서 애국심에 호소하면 들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서 신라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감포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방 관원이든 군인이든 찾아서 맡기면 될 터였다.
대광은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독이 빨리 퍼지지 않도록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조절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기를 운용하여 온몸 구석구석에 침투하려는 독에 맞서 싸웠다.
***
“여보시오. 괜찮겠소?”
배가 감포에 도착했다.
대광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배에서 내리려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했다. 마침 옆에 있던 선주가 대광을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소. 난 괜찮으니 날 먼저 배에서 내리게 해 주시오.”
대광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모아 선주에게 요청했다.
“그래요, 먼저 내려 드릴 테니 얼른 의원을 찾아가 보시오.”
선주는 다른 사람들을 좌우로 물러나게 하고 대광을 먼저 배에서 내려 주었다.
배에서 내린 대광은 군졸이나 관원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경비를 서고 있던 군졸을 발견하고 한 걸음 옮기는 순간, 발밑이 일렁거리며 마치 사나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처럼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대광은 중심을 잡으려고 했으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광이 쓰러진 걸 본 한 사람이 달려와 쓰러진 대광을 안고 소리쳤다.
“여보시오. 무슨 일이오? 어디 아프시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로 몰려왔다.
“그 사람, 지금 독에 중독되었소. 그러니 얼른 의원에게로 데려다 주시오.”
선주가 배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대광을 안고 있던 사람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침 내가 의원이오. 이 사람을 저 마차에 좀 실어주시오. 내가 데려가서 치료하리다.”
***
이슬휘는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과 아카식레코드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어느 역사책을 보아도 대광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광의 역할이 있었기에 7세기 후반부터 8세기까지의 신라, 일본, 그리고 발해의 역사가 성립되는 것이었다.
이슬휘는 씁쓸한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이름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지만, 기록에 남는 것은 그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들뿐인 것이다.
어쨌든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고, 자기는 역사를 바로잡으러 가야 했다.
대광은 배에서 내린 후 몇 시간 내에 죽어 버린다. 그는 죽기 전에 관원이나 군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편지의 전달을 부탁하는데, 버그가 발생해서 그 사람과의 만남이 어긋나 버리는 것이었다.
이슬휘는 대광과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줄 계획을 세우다가 좀 더 대담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자기가 그 편지를 전달받아서 대광의 역할을 하면서 문무왕에게 가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광에게서 그 편지를 받아 문무왕에게 전해 주는 사람도 역사의 기록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문무왕을 직접 보고 싶었다.
문무왕은 연개소문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나중에는 발해), 신라, 백제, 일본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물론, 나아가 서방과의 교류를 꿈꾸었던 인물이었다.
만약 모든 일이 문무왕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터였다.
이슬휘는 아카식레코드를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 본 후 681년, 대광이 도착하기 세 시간 전의 감포로 갔다.
먼저 이슬휘는 아카식레코드의 기록대로 비교적 외딴 곳에 있는 빈 집을 하나 찾아서 대충 정리한 다음, 숲길 옆에서 수년 전 누군가가 떨어뜨린 금붙이를 찾아내서 그걸로 마차를 하나 샀다.
그리고 마차를 끌고 감포 바닷가로 내려갔다.
배 한 척이 천천히 들어왔고 밧줄이 내려져 잔교에 있는 계선주에 묶였다.
이슬휘는 마차를 한쪽에 매어 놓고 잔교 쪽으로 걸어갔다.
배에서 한 사람이 내리더니 비틀거렸다. 대광이었다. 슬휘는 대광을 향해 달려갔다. 대광이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슬휘는 얼른 자세를 낮춰 쓰러진 대광을 안아 들었다.
“그 사람, 지금 독에 중독되었소. 그러니 얼른 의원에게로 데려다 주시오.”
배 위에서 선주가 소리쳤다.
이슬휘는 얼른 그 말에 대꾸했다.
“마침 내가 의원이오. 이 사람을 저 마차에 좀 실어 주시오. 내가 데려가서 치료하리다.”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