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지(3)
슬휘는 소전거사와 함께 천보산 중턱을 걷고 있었다.
“내가 여기 천보산에 들어온 것은 여기 어딘가에 틀림없이 우리 상고사에 관한 자료가 숨겨져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라오. 먼 옛날 누군가가 그 자료들을 여기 천보산 어디에 숨겨 놨다는 게 내 생각이오. 어디에도 그런 증거는 없지만 난 확신하고 있다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소전거사는 열변을 토하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슬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이슬휘는 한 갈림길에서 멈추어 그에게 물었다.
“저쪽으로 가면 어디로 통하는 길입니까?”
소전거사는 이슬휘의 손이 가리키는 쪽을 힐끗 보더니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쪽은 조금만 더 가면 낭떠러지라오. 길이 없다는 말이지요.”
“아,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오. 갔다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질 뻔하였다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저쪽으로는 절대 안 간다오.”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저는 저 길이 궁금한데……. 저랑 같이 가 보지 않으시렵니까?”
“아니, 나는 됐소. 그럼 나는 여기서 잠시 쉬고 있을 터이니 다녀오시구려.”
할 수 없이 이슬휘는 혼자 그 막다른 오솔길로 들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끌고 같이 가고 싶었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과연 오솔길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나고 발 아래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낭떠러지에는 삐죽이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바위틈에서 무질서하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아래로 내려가 볼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보였다.
이슬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위험하니 그 동굴 속의 자료들이 여태 보존된 것이겠지.
동굴은 그 절벽 중간쯤에 있는 큰 바위 두 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이슬휘는 나무와 바위들을 잡고 조심스레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 땀을 흘린 후에 슬휘는 겨우 동굴 앞 바위에 다다랐다.
바위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래쪽으로는 또 다른 바위들이 있어 계곡에서 올려다볼 때 동굴을 가려주었다.
그런 식으로 동굴은 사방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뭘 숨기기에 참으로 완벽한 곳이었다.
잠시 후 땀이 식자 슬휘는 바위 아래로 내려가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그냥 조그마한 틈 같았다. 하지만 그 틈을 지나 들어가면 최소 어른 대여섯 명은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이슬휘는 탐지기를 조작해서 조명을 켰다. 동굴의 끝부분에 나무 궤짝이 하나 있었다. 궤짝 위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가 지나간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슬휘는 동굴 내부를 살펴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제 소전거사를 이리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
“거사님, 저쪽 낭떠러지 아래 어디에 몇 십 년은 족히 묵은 더덕이 있나 봅니다. 향이 엄청 강하게 올라오던데요?”
이슬휘는 소전거사에게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소전거사는 더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전거사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요? 그럼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요. 어디쯤입니까?”
소전거사는 이슬휘를 앞장세우고 막다른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소전거사는 벼랑 끝에 서서 코를 벌름거려 보더니 이슬휘를 향해 돌아섰다.
“향이 안 나는데……. 이쪽이 맞습니까?”
슬휘도 같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분명 이 아래였습니다. 아깐 제가 저 아래로 좀 더 내려갔었는데……. 거사님도 좀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소전거사가 깜짝 놀라며 이슬휘에게 소리쳤다.
“아니, 이 낭떠러지를 내려가라고요? 자칫하다간 저 아래 계곡까지 굴러 떨어질 텐데?”
“수십 년 묵은 더덕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못할 것도 없지요. 아까 제가 저기 저 바위까지 내려갔었는데 그 근방에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거기까지만 가 보시지요.”
“그럼 이 공이 내려가 보시오. 나는 당최…….”
“하하, 저는 더덕을 거사님만큼 좋아하지를 않아서요.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혹시 압니까,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묵은 것일지…….”
이슬휘의 그 소리에 마침내 소전거사는 결심한 듯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슬휘는 위에서 발 디딜 곳, 손 잡을 곳을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소전거사가 드디어 동굴 위 바위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바위 위에 서서 다소 코를 벌름거렸다.
“거사님! 그 바위 아래로 내려가 보십시오.”
이슬휘가 소전거사에게 소리치자 거사는 알았다는 손짓을 하고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소전거사가 이슬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기서 수백 년 묵은 더덕보다 더 좋은 걸 발견할 테니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나 하세요.’
이슬휘는 사라진 소전거사 쪽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작은 바위 위에 앉아 하늘을 쳐다봤다.
파란 하늘에 한가로이 흘러가는 흰 구름이 절로 콧노래가 나오게 만들었다.
‘자, 지금쯤 나를 부를 때가 됐는데.’
이슬휘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아래쪽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전거사가 바위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 공! 내려가서 횃불 좀 만들어 와 주시겠소? 여기 동굴이 하나 있는데 살펴봐야겠소!”
“예, 그러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슬휘는 몸을 일으켜 산 아래로 내려갔다.
***
이슬휘는 태소암에 가서 횃불을 만들어 소전거사에게 전해 주었다.
“거사님, 제게 급한 기별이 와서 저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슬휘는 동굴 속의 소전거사에게 횃불을 전해 주며 말했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소전거사는 흥분된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하며 횃불을 받아 들었다.
이슬휘는 동굴 입구에 얼굴을 대고 동굴 안을 살폈다.
소전거사는 횃불을 높이 들어 동굴 이쪽저쪽을 살피더니 안쪽에 있는 궤짝을 발견하고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이슬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언덕을 기어 올라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탐지기를 보니 역사가 바로잡혔다는 신호가 떴다.
그래, 이제 돌아가서 앤지를 만나자.
이슬휘는 현재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며 천천히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이 맑고 따사로운 공기를 두고 가기 아쉬워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 속에 가득 담아서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하는 동안에 머리도 맑아지고 가슴 속이 더 상쾌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슬휘가 다시 갈림길로 나왔을 때 한쪽 방향에서 갑자기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워워, 서! 서라고! 서란 말이야!”
그리고 남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잠시 후 산 아래쪽에서 이슬휘가 있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말과 그 말 등에 타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말이 무엇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남자는 말 위에 꼭 매달려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이슬휘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가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회전시켜 말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고삐를 한쪽으로 당기면서 말을 진정시켰다. 말은 갈림길의 공터를 빙글빙글 돌며 속도를 늦췄다.
말이 제자리에 서자 이슬휘는 말 등에서 내려왔다. 이슬휘에게 눌려 납작 엎드려 있던 남자가 몸을 들어 슬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오늘이 제 생의 마지막 날이 될 뻔했습니다.”
이슬휘는 남자의 목소리가 참 좋다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아닙니다. 마침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말이 무척 놀란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가 내려가시지요.”
“같이 내려가시지요. 저희 아버님이 크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아니오, 저는 바빠서 이만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이슬휘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재빨리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바로 현재로 돌아왔다.
***
슬휘는 타임머신에서 나오면서 버릇대로 힐끔 탐지기를 보았다.
‘응? 이게 뭐야?’
탐지기의 알람이 켜져 있었다.
현장에서 확인할 때는 분명히 알람이 꺼져 있었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이슬휘가 탐자기를 쳐다보며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알람 불이 저절로 꺼졌다. 그리고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아마도 탐지기가 잠시 오작동한 모양이었다.
이슬휘는 얼른 집에서 나와 앤지가 있는 찻집으로 달려갔다.
찻집 가까이 가면서 보니 자리에 앤지가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슬휘는 찻집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 앤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앤지는 이어폰을 낀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이슬휘는 앤지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앤지 씨.”
앤지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이슬휘도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누구시죠?”
앤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놀란 눈을 하며 이슬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이슬휘는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인 줄 알고…….”
여자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슬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버그가 생겨서 앤지가 사라졌었다. 버그를 제거했으면 앤지가 원래대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어째서?
‘아!’
이슬휘의 머리가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그를 제거하고 이 찻집까지 오는 동안의 시간. 그 시간 동안에 앤지는 반대로 이슬휘가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워 그냥 집에 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슬휘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 앤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앤지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슬휘는 카운터로 가서 종업원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좀 전에 저쪽 자리에 저와 함께 앉아 있던 여자분 혹시 언제쯤 가셨나요?”
종업원이 이슬휘가 가리키는 자리를 보고 다시 이슬휘를 쳐다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기 계셨었나요? 제가 좀 전에 근무 교대를 해서요. 근데 저 여자분은 제가 근무 시작할 때부터 계속 저기 혼자 계셨었는데요…….”
***
이슬휘는 밤새 잠 못 자고 앤지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다음 날, 이슬휘는 자기가 앤지와 함께 있을 때 근무했던 종업원을 만나 전날의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종업원은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아, 네. 두 분이 여기서 만나 같이 커피를 드신 건 기억납니다만……. 근데 두 분이 따로따로 나가셨나요? 여자분만 혼자 남아 계셨었다고요?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이슬휘는 찻집을 나서며 다시 앤지에게 전화를 했다.
이슬휘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전화기가 꺼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번호라는 것이었다.
이슬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역사가 왜곡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앤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슬휘는 집으로 돌아와 아카식레코드를 다시 면밀히 살펴봤다.
자기가 과거에서 막 돌아왔을 때 탐지기의 경보등이 잠시 켜져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자기가 다녀왔던 1330년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도 모두 정상이었다.
확실히 앤지는 현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