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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15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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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15화
너는 누구냐?(1)

이슬휘는 탐지기를 보며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나운의 옆에 양반다리로 앉으며 나운을 향해 달려오는 군졸들을 힐끗 봤는데 그중 한 사람의 얼굴이 왠지 낯익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슬휘는 현재로 돌아왔다.
이슬휘는 그 얼굴을 어디서 봤을까 잠깐 생각하다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까짓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슬휘는 시간이 빌 때마다 찻집으로 갔다.
아무래도 거기는 앤지가 사라진 현장이 아닌가. 그러니 단서가 있을 만한 유일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무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머릿속만 복잡해서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음에도 몸이 파김치가 되어 축 늘어졌다.
이슬휘는 거실의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저 눈만 껌뻑이며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머릿속을 어찌할지 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이슬휘의 눈이 책장 쪽으로 스쳐 가는 순간, 이슬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슬휘의 눈이 바짝 긴장하며 커졌다.
이슬휘는 조심조심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책장 한쪽에 지하의 타임머신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여는 단추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단추는 책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슬휘는 오래전 장난 삼아 그 책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 놓았었다. 그런데 그 표시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슬휘는 책을 꺼내 유심히 살펴보았다. 누군가가 침입해서 책을 꺼내 본 게 확실했다.
이슬휘는 지하로 내려가는 단추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이슬휘는 계단 벽에 붙어 조심조심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슬휘는 컴퓨터를 비롯한 장비들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다행히 모두가 원래대로였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긴 누가 와서 본다 하더라도 무슨 장치인지 알 리가 없었고 그들 마음대로 장치를 작동시킬 수도 없었다.
이슬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슬휘는 다시 1층으로 올라가 거실을 비롯해 안방, 주방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없어진 것도 없었고 이상이 있는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슬휘는 탐지기를 조작해 카메라나 도청 장치가 있는지를 검사해 보았지만 그것도 깨끗했다.
단순한 도둑은 아니었다. 도둑이 우연히 침범할 만큼 보안 장치가 허술하지도 않았고, 도둑이 왔다가 그냥 나갈 만큼 진귀한 보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자기의 주변을 살피기 위해 들어왔었다는 이야기다.
혹시 이게 앤지의 실종과 연관이 있는 일일까?
이슬휘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
도둑이 아니라면 또 들어올 수도 있었다.
이슬휘는 집안 구석구석에 소형 카메라를 장착해 놓았다.
하지만 그가, 혹은 그들이 전문가라면 이런 카메라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잠깐 생각하던 이슬휘는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살피던 이슬휘는 집 근처 가로등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자기 집 쪽을 향해 고감도 소형 카메라를 설치했다.
***
“안녕하세요, 이슬휘 씨?”
역사학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자리였다. 누가 이슬휘 곁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이슬휘가 쳐다봤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슬휘가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제가 궁금한 게 있어 교수님께 여쭤 봤더니 이슬휘 씨와 이야기해 보라고 하셔서요. 저기 저쪽에 계신 교수님이요.”
“아, 그러세요?”
이슬휘는 대답하며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봤다. 교수인 듯한 사람이 몇 있었지만 자기 학교 교수는 없었다. 이슬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날 알지?’
“저는 박형준이라 합니다.”
박형준은 이슬휘에게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었다.
이슬휘는 대답하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교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질문들이 귀찮으니까 자기에게 떠넘긴 것 같았다.
그래도 이슬휘는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
이슬휘의 대답을 듣고 있던 형준이 빙긋 웃으며 질문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요, 아니면 주어진 운명에 따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인가요?”
이슬휘는 뭔가가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눈을 크게 뜨며 박형준을 쳐다봤다.
“아,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그런 게 궁금해서요. 우리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이미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고들 하잖아요. 그건 바꿀 수가 없는 거라고…….”
그건 민자영, 그녀에게서 질문을 받고 여태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아닌가.
이슬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되물었다.
“그럼 박형준 씨는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박형준이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연히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운명이라는 건 누군가가 우리를 통제하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상이 아닐까요?”
“누가, 왜 우리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시죠?”
“그야 알 수 없죠. 어쩌면 우리가 잘되는 게 자기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를 감시, 통제하면서 우리가 잘되는 걸 방해하는 거죠. 운명이라는 틀 속에 가둬 놓고…….”
이슬휘는 피식 하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상력 하나는 대단하군.’
“글쎄요, 그건 지나친 상상이 아닐까요? 그런 게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박형준은 다시 빙긋 웃었다.
“그야 알 수 없죠. 어쨌든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 네. 뭐, 그러시죠.”
둘은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박형준은 이슬휘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 세미나장 밖으로 나갔다.
이슬휘는 박형준의 뒷모습에서 묘한 느낌을 받으며 한참이나 그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았다.
***
박형준이 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슬휘는 피곤하기도 했고 또 만나서 실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계속 피하려고 했지만 박형준의 집요한 요청에 할 수 없이 만나기로 했다.
대신 이슬휘의 집 근처, 찻집에서 잠깐만 보기로 약속을 정했다.
이슬휘가 찻집에 가니 이미 박형준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앉아 있는 곳이 하필이면 자기와 앤지가 앉던 자리였다. 이슬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다가갔다.
박형준은 이어폰을 쓰고 무언가를 듣고 있다가 이슬휘가 나타나자 이어폰을 벗었다.
“음악 듣고 계셨나 봐요?”
이슬휘가 인사치레로 물었다.
그러자 박형준이 이어폰을 이슬휘에게 내밀었다.
“아, 네.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이슬휘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박형준은 억지로 이슬휘의 귀에 이어폰을 끼워 주었다.
음악을 들은 이슬휘는 깜짝 놀랐다. 믹 재거의 애절한 음성이 앤지를 부르고 있다.
갑자기 이슬휘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슬휘는 애써 침착을 되찾고 이어폰을 벗으며 물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세요?”
박형준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랩니다.”
그래, 좋아하는 노래가 같다고 앤지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
박형준이 가서 커피를 사 오는 동안 이슬휘는 자리에 앉아 지나친 추측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커피를 가져온 형준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잘 지내셨죠?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전에도 느꼈지만 표정이 좀 어두우신 것 같아서…….”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요?”
“아, 네. 뭐, 특별한 건 없고요. 저도 이슬휘 씨처럼 역사학도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제가 많이 실례했나요?”
이슬휘는 ‘네, 많이 실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박형준이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지난번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는데……. 역사가 무엇이냐는 질문. 혹시 지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다른 뜻은 없고 역사학도들의 인식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해 제가 소논문을 쓰는 게 있어서…….”
이슬휘는 박형준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에는,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번 말씀하셨던 그런 황당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 즉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자기 앞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역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운명 같은 건 안 믿으시겠군요.”
이슬휘는 운명이란 말에 앤지를 떠올렸다.
“물론 운명이란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건 아닐까요?”
“아, 네. 좋은 말씀이네요. 어떤 사람이 사라지고 없어도 그 사람이 내 운명이라 생각되면 끝까지 찾아나서는 것,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죠?”
이슬휘는 처음에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이 사람이 내게 접근한 건 우연이 아니다!
이슬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형준의 멱살을 잡았다.
“넌 누구야? 넌 뭐야?”
빙긋 웃던 박형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박형준이 빠른 동작으로 이슬휘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가며 말했다.
“이슬휘 씨, 오늘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박형준은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슬휘도 박형준을 따라 문밖으로 달려 나가 봤지만 어디에도 형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
이슬휘는 다시 찻집으로 돌아와 박형준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이슬휘는 또 전화를 했다.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슬휘는 문자를 남겼다.
‘전원이 켜지는 대로 연락 바랍니다. 꼭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슬휘는 다시 전화를 해 봤다.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슬휘는 역사학회 세미나에 참석했던 교수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전화해서 박형준을 아는지 물어봤다.
―박형준? 글쎄, 우리 학교에는 그런 학생이 없는데?
모든 교수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
며칠 후 이슬휘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박형준이었다.
화면에 박형준의 이름이 뜬 걸 확인하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수도 없이 전화를 했지만 계속 꺼져 있던 번호였다.
이슬휘는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앤지 씨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앤지 씨는 지금 어디 있어?”
그러나 박형준은 이슬휘의 윽박에도 아랑곳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아마 이번에도 길게 뵐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보자고. 보고 이야기하자고. 언제? 어디?”
이슬휘의 말이 짧게 나왔다. 길게 이야기하다가는 나오기도 전에 속에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이슬휘는 임무 수행 때만 가져가던 레이저 권총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박형준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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