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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17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데일리게임]
17화
반행성연합(1)

이슬휘는 약속 장소인 대형 마트로 갔다. 대형 마트의 주차장에 전에 보았던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이슬휘가 승합차 가까이에 다가가자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내렸다.
이슬휘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승합차에 올랐다.
두 남자가 이슬휘의 양 옆에서 슬휘의 팔에 팔짱을 꼈다. 동시에 앞에 마주 앉았던 남자가 검은 두건을 슬휘의 머리에 씌웠다.
“뭐하는 거야!”
이슬휘가 반항하며 소리쳤다.
“보안을 위한 절차이니 곱게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여기에 나올 때부터 어떤 상황이라도 각오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이슬휘는 반항을 멈추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차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주변의 차 소리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봐서 시 외곽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거의 30분 이상을 달려서 차가 도착했다.
이슬휘는 두 사람에게 결박당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지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시 2~30미터를 걸어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슬휘를 의자에 앉힌 다음 머리에 씌운 두건을 벗겨 주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이슬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기를 안내한 두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슬휘는 그들의 뒷모습을 힐끗 본 다음 방 안을 살펴보았다.
회의실 같았다. 방 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주위로 몇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이슬휘는 그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

이슬휘는 빈방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태까지의 일들로 봐서 이슬휘가 아무리 다그쳐도 이들은 자기들이 할 말만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냥 이들에게 맡겨 두고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앤지나 박형준의 상태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지만 어차피 칼자루는 이들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슬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한 남자가 양손에 컵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슬휘는 남자를 쳐다봤다. 나이는 50대 정도. 안경을 쓰고 있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키는 175cm 정도에 몸매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남자는 컵 하나를 이슬휘 앞에 놓았다.
“커피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테이블을 돌아 이슬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슬휘는 컵을 들고 커피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맛이 나쁘지 않은데요.”
이슬휘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남자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저는 여기 이름으로 양은모라고 합니다. 이슬휘 씨처럼요.”
“네, 반갑습니다. 양은모 씨. 근데 앤지 씨는 언제 만나게 해 주실 건지요?”
“아, 그건 좀 있다가. 먼저 이슬휘 씨가 정말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앤지 씨를 만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들과 뭘 같이해야 하는 거죠?”
“먼저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시죠.”
양은모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이슬휘를 지그시 쳐다봤다.
이슬휘도 양은모를 마주 쳐다봤다.
약간의 침묵 후 양은모가 말을 꺼냈다.
“이슬휘 씨는 역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며칠 새 두 번째 듣는 질문이다.
“왜 그게 궁금하시죠?”
“이슬휘 씨가 역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우리에게 중요하거든요.”
이슬휘는 박형준에게 대답했던 대로 대답했다.
“역사는……. 사람이 자기 의지에 의해 행동한 것들이 시간 속에 축적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겁니다. 됐습니까?”
“그러니까 이슬휘 씨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이슬휘 씨가 행성역사위원회 소속으로 하시는 일은 뭔가요?”
이슬휘는 흠칫했다.
이들은 나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구나.
“그거야 역사가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게 문제를 일으키는 버그를 제거하는 일이지요.”
“역사가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아시겠지만 아카식레코드에 의해 정상적인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과거는 그렇다 치고, 현재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가는 것?”
“네.”
“이런 건 어떨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도 먼 미래에서 봤을 때는 과거의 한 시점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먼 미래에서 봤을 때는 정상적이지 않은 걸로, 즉 버그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상적인 의지와 활동이라면 정상적인 역사로 남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말이죠. 명성황후께서 일본 낭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걸 알고 피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럼 그건 그분의 의지에 의해 그렇게 됐어야 하는 게 오히려 정상적인 역사 아닌가요? 우리에겐 그게 과거의 일이지만 그분께는 현재의 일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명성황후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명성황후가 자기에게 던졌던 질문도 되살아났다.
“만약에 말입니다. 이슬휘 씨가 앤지 씨와 이대로 영영 이별하는 것이 이슬휘 씨가 말하는 그 정상적인 역사라면, 그럼 이슬휘 씨는 이대로 앤지 씨를 잊어버리고 다시는 안 볼 수 있겠습니까? 앤지 씨가 바로 옆방에 있는데도?”
“뭐라고요?”
“이걸 한 번 보십시오.”
양은모는 회의실 한쪽 벽면에 있는 모니터를 켰다. 모니터에 아카식레코드가 떴다.
양은모가 펼쳐 보인 페이지에는 이슬휘와 앤지의 영원한 이별이 기록되어 있었다.
“저건…….”
“저건 우리가 행성역사위원회에서 최상위 비밀취급인가자를 통해 빼낸 자료입니다. 그러니 저게 정상적인 역사인 거지요. 그렇다면 저대로 가게 놔둬야 하는 건가요? 이슬휘 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으음…….”
이슬휘는 신음을 내뱉었다.
양은모가 시계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죄송한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예정된 회의가 있어서요.”
양은모가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슬휘는 혼란스러운 머리가 너무 무거워 두 팔을 책상에 고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앤지는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앤지는 수시로 전화기를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던 그 사람을 오늘 볼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생각해 보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처음 이슬휘가 찻집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이슬휘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사람들을 따라 무엇에 홀린 듯 여기에 온 것도 평소의 자기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행성연합이니 행성역사위원회니 하는 황당한 이야기들도 믿을 수 없었다.
이들이 보여 준 그 증거 자료들도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이들이 그 황당한 실체를 보여 주자 이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도 이들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닌 건 확실했다.
자기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했지 겁박하거나 완력을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주처럼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슬휘가 보고 싶었다. 이슬휘에게서 직접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슬휘가 진실을 이야기해 주면 모든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앤지가 얼른 전화기를 확인했지만 자기 전화가 아니었다.
앤지를 돌보는 여자 요원의 전화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여자 요원은 한참을 듣고 있다가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앤지를 향해 말했다. 얼굴 표정이 밝았다.
“이슬휘 씨가 기지에 와 있답니다. 조만간 미팅이 끝날 것 같다고 앤지 씨를 기지로 모시라는 연락입니다.”

***

양은모는 다시 이슬휘가 있는 방으로 왔다. 의자에 앉으며 가볍게 물었다.
“심심하지는 않으셨죠? 생각할 게 많으셨을 테니.”
이슬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굽니까?”
“아, 소개가 늦었군요. 많이 궁금하셨죠? 저희는 반행성연합의 지구 사령부입니다. 반행성연합은 들어 보셨나요?”
“아니오, 처음 듣습니다.”
“그러시겠죠. 저희는 ‘각 행성의 역사는 각 행성에게 맡기자’라는 신념으로 뭉친 비밀 조직입니다. 행성연합에서는 아마 저희들 존재를 짐작은 하고 있을 겁니다.”
“각 행성의 역사는 각 행성에게 맡기자?”
“네. 우리가 아까 토론했던 거,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하자는 거 말입니다.”
“지금은 그게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까도 보셨잖아요. 명성황후의 경우, 이슬휘 씨와 앤지 씨의 경우……. 그 외에도 수없이 많죠.”
이슬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행성연합이 그럴 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그리고 능력이 있다 한들 뭐하러 그렇게 힘들여 가며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그걸 알아보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역사를 이렇게 통제하는지 말이죠.”
양은모가 이슬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이슬휘 씨가 필요한 겁니다. 저희는 사실 이슬휘 씨를 오래 전부터 지켜봤습니다. 현재의 이슬휘 씨도 관찰했고, 과거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슬휘 씨도 관찰했습니다.”
“과거에서도요? 어떻게?”
“그건 차차 말씀드리고……. 그 결과 우리는 이슬휘 씨가 확실히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접촉 계획을 세우던 중에 이번 사건이 터져 버려서……. 계획이고 뭐고 없이 이렇게 모시게 된 겁니다.”
이슬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빠르게 물었다.
“그래요, 맞아요. 이번 사건은 도대체 뭡니까?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양은모가 살짝 웃었다.
“저희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건 했지요. 사실 이슬휘 씨가 소전거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앤지 씨가 존재 변동으로 소멸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그걸 저희가 막은 거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행성연합에서는 앤지 씨의 존재를 소멸시키려고 역사를 비틀었던 거죠.”
“앤지 씨가 왜요? 앤지 씨는 그냥 평범한 지구인일 뿐인데요?”
“저희도 그게 궁금합니다. 그래서 일단 앤지 씨의 에너지 파장을 다른 파장으로 덮어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행성연합에서 앤지 씨의 흔적을 찾지 못할 테니까요.”
이슬휘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아까 아카식레코드에는 앤지 씨의 존재가 있는 걸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행성연합에서 앤지 씨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앤지 씨를 찾아 없애려고 PHC-T17E를 보낸 거고요. 앤지 씨를 제거하기 위해서.”
“T17E?”
“아, 이슬휘 씨가 박형준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앤지 씨는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니 아카식레코드에 그렇게 기록된 거겠죠.”
“참, 그 박형준……. 아니 T17E는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우리가 감금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요.”
이슬휘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올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저희를 믿으시겠습니까?”
이슬휘가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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