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지의 비밀(3)
박형준이 눈을 떠 보니 낯선 방 안이었다.
오래되었지만 품위 있는 가구들로 잘 정돈된 침실이었다.
박형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밖으로 내려온 박형준은 옷을 들추며 자기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총에 맞은 자국들은 잘 아물었고 흉터로만 남아 있었다.
아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그리고 여긴 어디지?
박형준은 창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자기가 있는 집은 단독 주택이었고 침실은 2층인 것 같았다. 창밖으로 멀리까지 단독 주택 단지가 펼쳐져 있었다.
박형준은 방 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이 박형준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슬휘였다.
“아, 박형준 씨. 마침내 깨어나셨군요. 기분은 좀 괜찮아요?”
박형준은 좀 얼떨떨해져서 뭐라 대답도 못 하고 이슬휘에게로 다가갔다.
“어, 어떻게 된 거죠?”
“기억나세요? 우리가 만나던 날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던 거.”
“아, 물론 기억나죠. 저는 그때 총을 맞고 강물에 빠졌었는데…….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박형준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눈 주위를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맞아요. 저는 강 하류 쪽으로 도망가다가 숨어 있었는데 형준 씨가 떠내려오기에 구해서 저희 집에 데리고 왔죠.”
“아, 그랬군요. 근데 오늘이 며칠이죠? 제가 얼마나 있었나요?”
이슬휘가 웃으며 대답했다.
“외상은 치료 키트로 그날 바로 치료했는데 여태 계속 혼수상태로 있었어요. 오늘이 25일이니 2주 정도 되는군요. 다행입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2주나 되었다고요? 그럼 혹시 위원회에는 보고하셨습니까?”
이슬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감찰국 소속이라지만 정말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박형준이라는 여기 이름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보고하겠습니까? 당신이 깨어나면 이야기를 더 들어 보고 보고를 하든 말든 하려고 생각했지요.”
박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감찰국 소속이 맞고요. 제 코드네임은 PHC-T17E입니다.”
이슬휘가 박형준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T17E라……. 근데 당신 진짜 임무가 뭡니까? 괜히 타임머신과 앤지를 바꾸자는 등 헛소리는 하지 마시고.”
“아, 제 임무는요……. 죄송합니다만 위원회와 연락해서 경과보고부터 먼저 하고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제가 2주 동안이나 연락이 없었다면 위원회에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르니까요.”
***
박형준은 이슬휘의 안내에 따라 지하로 내려가 위원회와 통신을 했다.
통신을 하기 전에 이슬휘에게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청해 이슬휘는 박형준을 놔두고 거실로 올라왔다.
이슬휘는 편안한 표정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느라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한 방을 노려야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박형준이 거실로 올라왔다.
“위원회와는 잘 이야기하셨나요? 형준 씨 없는 동안 정말로 난리가 났던가요?”
이슬휘는 장난기를 머금고 물었다.
그와 달리 박형준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슬휘 씨. 제가 없는 동안 혹시 주변에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수상한 사람이라든지…….”
이슬휘도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실종된 걸로 판단한 위원회에서 저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지금 연락 두절 상태랍니다.”
“그래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요? 아니, 그럼 왜 저한테 연락을 안 했을까요? 저한테 비밀로 한 이유는 뭐랍니까?”
“아, 그, 그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형준이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이슬휘는 박형준이 자기에게 그들의 목적을 숨기는 것으로 봐서 위원회가 자기를 믿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참, 그럼 형준 씨 임무는 뭐죠? 저는 이미 징계가 끝난 게 아닌가요?”
“아, 맞습니다. 징계 절차는 이미 끝났고요. 제 임무도 오늘 바뀌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들 찾는 걸로.”
***
이슬휘가 박형준에게 모니터를 보여 주었다.
“이걸 보세요. 제가 전에 위원회에 앤지 씨의 실종 건으로 보고서 올렸을 때, 앤지 씨가 잠시 소멸되었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슬휘는 마우스를 클릭해 모니터의 화면을 바꾸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건 며칠 전에 임무를 하나 수행하고 왔을 때의 아카식레코드 변화를 기록한 겁니다. 보세요, 여기서도 앤지 씨는 잠시 소멸되었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박형준은 묵묵히 화면만 보고 있었다.
“당신도 그렇고 실종되었다는 비밀 요원들도 그렇고. 당신들 임무라는 게 모두 앤지 씨의 소멸과 관련 있는 게 아닙니까?”
“아, 저, 그게 말입니다…….”
박형준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제가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됩니까? 저를 못 믿어서 이러는 겁니까? 이건 위원회 결정 사항입니까?”
이슬휘는 흥분한 목소리로 박형준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이슬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지구의 현장 담당 요원으로서 당신들의 임무를 정확하게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면 현장 관리 수칙에 의거, 당신을 이 지구에서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박형준이 무겁게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근데 말입니다. 만약 제 임무가 진짜 앤지 씨와 관련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슬휘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힘 있게 대답했다.
“이 지구의 담당 요원으로서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앤지 씨와 가깝게 지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도 행성연합, 역사위원회 소속 요원입니다. 제가 비록 앤지 씨와 잠시 알고 지내긴 했지만 제 본분에 대해서는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앤지 씨와 관련된 어떤 일이라도 제 임무라면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앤지 씨를 소멸시키는 임무라고 해도요?”
박형준의 말에 이슬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이슬휘가 고개를 들어 형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해야죠. 그게 제 임무라면.”
***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슬휘 씨와 협조해서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고요.”
박형준이 지하실에서 거실로 올라오며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슬휘가 벌떡 일어섰다.
“저를 믿기로 한 겁니까?”
형준이 손을 들어 가로저었다.
“아니, 우리가 왜 슬휘 씨를 못 믿겠습니까? 다만 임무가 중요하다 보니…….”
“그럼 이제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이슬휘와 박형준이 소파에 앉았다.
박형준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두 손을 깍지 끼고 말했다.
“제가 실종된 요원들 건을 좀 조사해 봤는데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걸로 봐서는 지난번 우리를 공격했던 놈들 짓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일단 그 사건은 놔두고 앤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임무의 우선순위가 앤지를 찾는 것이니까요.”
“앤지 씨를 찾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앤지 씨에 대한 아카식레코드 분석은 어떻게 되고 있답니까?”
“계속 분석 중인가 봅니다. 근데 이상한 건 앤지의 고유 파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답니다. 아마 그놈들 짓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대체 뭘 하는 놈들일까요?”
“위원회에서도 행성연합에 보고를 했답니다. 근데 이건 떠도는 소문이긴 합니다만, 행성연합을 전복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원회에서는 아마 그 세력이 아닐까 짐작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행성연합 본부가 있는 곳에서 활동해야지 이 먼 우주 변방에 와서 뭘 한다는 겁니까?”
박형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저야 모르죠. 어쩌면 그놈들이 아닐 수도 있고요.”
“제가 지구에 있습니다만, 여기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고 문명도 떨어지는데 뭐가 그리 중요한 게 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위원회에서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이슬휘는 앤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양은모를 생각했다.
‘잘 진행하고 있겠지?’
***
―앤지 씨, 죄송한데 이리로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앤지가 안가에서 쉬고 있는데 양은모가 연락을 했다.
“네? 무슨 일 있나요?”
앤지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가 앤지 씨께 간단한 수술을 좀 해 드려야 해서요?
“수술이라고요?”
―아, 그렇게 안 놀라셔도 됩니다. 귀 뒷부분을 1cm 정도 째고 마이크로칩을 이식하는 수술입니다. 뭐, 사실 수술이라고도 할 수 없죠.
“마이크로칩……요? 그게 먼데요?”
―하하, 그게 앞으로 앤지 씨를 보호해줄 중요한 장치랍니다.
“네, 알겠어요. 근데 가는 동안에 또 누가 공격해 오지는 않을까요?”
―그럴 염려는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앤지는 요원들과 차를 타고 사령부로 갔다.
의무실로 들어가니 의료진과 함께 양은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간단한 수술이니 금방 끝날 겁니다. 그러니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앤지가 침대에 비스듬히 눕자 부분 마취를 하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은모의 말대로 수술은 금방 끝났다.
마이크로칩을 이식했다는데 이물감도 없었고 아프지도 않았다.
“이건 무슨 역할을 하는 건가요?”
앤지의 질문에 양은모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앤지 씨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장치인 거죠.”
“네? 그게 무슨……?”
“하하, 그렇다고 앤지 씨를 실제로 소멸시키는 건 아니고요. 들어서 아시겠지만 아카식레코드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 파장이 저장됩니다. 앤지 씨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행성연합이 그 파장을 보고 앤지 씨가 살아 있다는 걸 아는 거죠. 근데 이 칩은 앤지 씨의 파장을 흡수해서 변형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앤지 씨가 소멸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아, 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근데 제 파장이 변형된 걸 또 알아차리지는 않을까요?”
“아카식레코드에는 전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파장이 저장됩니다. 그 양도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양이고, 그 파장이 체계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모이는 것이라, 그 속에서 한 개인의 파장을 분석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 건 해냈잖아요?”
“그건 그들에게 특수한 목적이 있어 집중적으로 찾아낸 거겠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백 수천 대의 슈퍼컴퓨터와 엄청난 시간이 동원됐을 겁니다.”
앤지가 입을 벌리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하며 절 찾았을까요? 도대체 제가 뭘 가졌기에?”
그들은 앤지 씨를 제거하는 게 목적입니다.
양은모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하지만 앤지에게 그걸 알릴 필요는 없었다. 이슬휘의 신신당부도 있었다.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데 자기가 제거 대상이란 걸 말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양은모는 슬휘를 생각했다.
‘잘하고 있겠지?’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