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어둠.
아무리 눈을 부릅떠 보아도 사물의 형태조차 파악할 수 없는 검은 공간이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푸른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푸른 줄기는 눈을 멀게 할 만큼 강한 빛을 발산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푸른 빛줄기가 가득 뿜어지다 이내 서서히 가라앉으며 잔잔한 녹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이 검은 공간 아래에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빛줄기를 쫓아간 공간 안에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것들이 즐비했다.
벽을 가득 메우는 책장엔 기괴한 문양과 그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투명 물통과 함께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병에서 정체 모를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 가득히 뒹굴고 있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난 시체들. 그 사이로 흐르는 가느다란 핏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걸로 보아, 시체가 조각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퀴퀴한 냄새와 습하고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방 한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이 그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복잡한 문양이 마법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마법진 위에는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소년이 누워 있었다.
파직―!
새하얀 육체가 감전이라도 된 듯 푸른 정전기를 발산하며 떨렸다. 그 옆으로 새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짙은 그림자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찬찬히 새하얀 육체의 소년을 건드려 보더니 이윽고 김이 빠진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이상하군. 이게 맞는데.”
또다시 앞서 했던 일을 하자니 눈앞이 깜깜해진 그였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기에 남자는 짜증스러운 투덜거림을 멈추고 가운을 벗어 던졌다.
“영혼을 구해야겠군.”
스륵.
남자가 어깨에 흐르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 넘기자 보라색 머리카락이 푸르스름한 빛 아래 드러났다. 가볍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남자는 짧게 주문을 외우고는 방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새하얀 피부의 물빛 머리카락의 소년만을 남겨둔 채.
제 1장 선택받은 자
심장이 떨린다.
이번엔 정말 잘돼야 하는데.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옆 반 미연이의 행동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장미꽃이라도 주면서 고백할 걸 그랬나?’
보통 여자들은 분위기를 먼저 따진다는 어느 잡지의 앙케이트가 불현 듯 생각났다. 꽃이나 반지 같은 선물을 받으면 여자의 기분이 상승세를 타 ‘이미 절반은 성공’ 이라는 부분이 떠오르자 꽃이라도 미리 사 두지 않은 것에 후회가 들었다.
‘으, 제길! 이번 달 용돈을 게임기에 지르지만 않았어도 장미꽃 따위 백 송이도 넘게 살 수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머리를 싸매고 벽으로 달려가 온 힘을 다해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미연이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몰랐다구, 이렇게 미연이에게 고백을 하게 될 줄이야.
그놈의 콩깍지가 뭐기에. 아니지, 쓰라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한계치를 넘어 폭발해 버렸기 때문에 내가 잠시 미쳤던 것뿐이야.
‘그래. 미쳤지, 내가. 나는 미쳤어! 아하하하!’
이런저런 수많은 변명과 원인이 춤추듯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자 덩달아 심장까지 미친 듯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고백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항상 이 자리에 서면 이토록 심장이 난리를 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이 모습을 눈앞의 미연이에게 보여 주기 싫은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온갖 폼을 다 잡고 태연한 척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아! 말해.”
미연이가 뭔가 다짐한 듯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를 불렀다.
‘드디어!’
우물거리며 말을 제대로 못하는 미연의 행동에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작은 기대감으로 눈을 번쩍였다.
좋아! ‘자, 나의 품이 안겨!’까지는 아니더라도 OK해 주는 센스를 발휘하라구!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술을 최대한으로 잡아 내리고 유명 연예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눈웃음을 한 방 날려 주기 위해 각도를 맞춰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미연이에게 보일 내 완벽한 포즈와 웃음을 머릿속으로 체크한 뒤, 그녀의 입에서 나올 허락의 말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을 보여 주려고 고개를 들려는 순간.
나의 최고의 미소를 보지 못한 채 그녀는 힘껏 허리를 숙여 나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
‘크억!’
쿠킁―!
그녀의 한마디가 강하게 나의 복부를 강타했다.
“미안하지만 내 타입이 아닌걸.”
‘커억!’
데미지에 어깨를 숙인 나를 일으키려는 듯 그녀가 결정타로 잔인한 어퍼컷을 날렸다.
“그럼.”
다시 한번 사과의 인사를 건네고 멀리 사라지는 미연이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준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휘이잉!
벚꽃 잎이 허무하게 내 몸을 감싸듯이 휘날렸다. 마치 내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 주듯 처음엔 잔잔하고 조용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며 주변을 어지럽혔다.
그래, 지금의 내 심정도 이 바람과 똑같아, 크윽!
정신적인 타격으로 힘을 잃은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양손을 땅바닥에 받치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아, 허무한지고!
철푸덕―!
“윽!”
불쌍한 내 자신에게 쓴웃음을 짓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언가 내 얼굴을 뒤덮어 앞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시야를 빼앗긴 나는 놀라 얼굴에 붙은 것을 떼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쿨럭!”
달그락!
헛기침을 하며 떨어뜨린 것이 무엇인가 확인해 보니 주변에 나뒹굴던, 우리 학교 매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 봉지였다.
“…….”
나는 오늘 점심에도 저 녀석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짓다가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다름 아닌 이 빵 봉지가 요란하게 빈 소리를 울리며 눈앞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달그닥, 달그락.
마치 나를 약 올리기 위해 춤을 추는 것처럼, 여자에게 차인 내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훗.”
나는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눈앞의 빈 봉지를 지그시 바라봐 주었다.
‘네놈마저 나를 비웃는 게냐!’
우직―!
허탈한 심정으로 방과 후에 늘 가는 독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층 건물로, 십여 년도 더 지난 것 같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낡은 독서실은 집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있어 중학교 때부터 다니는 곳이었다. 옆 건물과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다른 독서실과 차이점은 없었다.
뭐, 이 주변에 노래방이라든지 술집이 있는 건물들이 있어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대면 조금 시끄럽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집에서 가까우니 참을 수밖에.
무엇보다 도서관에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아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늘 앉는 내 지정석에 가방을 두고 친구 놈에게 도착했다는 문자 한 통을 날린 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바람이라도 쐴까 하는 생각에 독서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아!”
주변의 건물 사이로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현란하게 반짝였다.
지금 시작은 밤 8시,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주변의 상점들이 영업을 하기 위해 번쩍이는 간판들을 켜 놓은 덕분에 환하게 보였다. 나는 건물 앞쪽에 서 있다가 슬쩍 몸을 숨겨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너도나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자들이 많아 경비 아저씨가 옥상에 못 올라오게 하기 때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숨긴 것이다.
옆 건물의 그림자로 인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라 예상한 옥상의 구석으로 간 나는 널브러지듯 난간에 배를 걸치고 허리를 숙였다.
나직이 한숨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느껴졌다.
“뭐야?”
[뒷모습만 미소년! 내 여친이 그러는데 너, 미연이한테 차였다며?]
“으득―!”
친구 녀석의 염장질 문자를 읽으며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미연이에게 차인 것을 그놈이 알게 된 거지? 여친이 미연이랑 같은 반인가?
제길! 저 수다쟁이에게 정보가 들어갔으니 내일 또 그놈들이 한바탕 난리 법석을 피우며 약 올리게 생겼군. 아이! 왜 내 주변엔 다 저런 녀석들뿐이란 말인가?
다가올 내일의 일에 눈앞이 깜깜해진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다가 이내 체념하고 재빠르게 문자를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냐, 차였다. 내일 나 볼 생각 마라. 저세상으로 가 있을 테니, 이 써글 놈아!]
분풀이 겸 몇 마디의 욕이라도 더 날리고 싶었지만 약점을 잡힌 나로선 이것이 한계다.
나름대로 내일 있을 소문을 막기 위해 불쌍한 척 친구에게 문자로 하소연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사나이의 존심을 생각하자니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까짓것!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될 대로 되라는 생각과 함께 혀를 차며 문자를 전송한 뒤 전원을 꺼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다시 건물 난간에 배를 깔고 등을 숙여 한숨을 토해 냈다.
반에 소문이 쫙 퍼지겠지.
“하아. 제길―! 내일 그냥 확 결석해 버려?”
내일 학교에서 친구 놈들의 놀림받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정말 뭐 같았다.
눈앞에 펼쳐지듯 내일의 일들이 빤히 보였다. 몇몇 놈들의 익숙한 말투, 표정,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들이 뻔하게 말이다.
어떻게 잘 아냐고? 큭, 한두 번 겪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다시 한숨을 토해 내고 잊어버리자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있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울컥울컥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절로 가슴에서 용암에 끓듯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슬며시 다물던 이가 좌우로 움직이며 소리가 나도록 갈렸다. 결국 나는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내뱉고야 말았다.
“제길! 어떻게 그 얼굴로 나를 찰 생각을 하냔 말이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일 친구 놈들의 행동보다 더 열받는 게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기분이 상한 이유는 차인 게 원인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 남도후, 살아오면서 마음 있는 여자에게 고백할 때마다 매번 차인 전적이 꽤 많았기 때문에 그런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차일 때마다 겪는 내 친구 놈들의 놀림이며 행동 모두가 똑같았기 때문에 그것도 큰 문젯거리는 아니었다.
그냥 며칠 정도만 쪽팔리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얼마나 많이 차였냐고 묻는다면 간략하게 나의 지난 과거를 설명해 주겠다.
유치원 때 남몰래 짝사랑하던 선생님은 나를 버리고 다른 못난 남자와 결혼을 하셨다.
뭣 하나 잘난 것도 없던 그 남자의 유일한 장점은 단지 선생님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쇼크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 때는 여자를 멀리하고 그저 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유치원 시절의 선생님을 내 고백 대상자 리스트에 넣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몰랐던 천진난만했던 시절이기에 그냥 고이 나만의 비밀스러운(?) 추억이라 묻어 두기로 한 것이다.
아무튼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 노는 데에 쏟으며 세월을 보낸 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맑고 신체 바른, 건강한 정신의 청소년들이 가져야 할 관심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남자의 로망인 이성 교제였다.
즉, 나에게도 봄(여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때의 내 소망은 무척이나 작은 것 이었는데, 바로 매년 초에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라는 행사! 그 하루만이라도 여자에게 초콜릿을 받고 싶은 바람만으로 여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작업 모드로 들어갔다.
하지만…….
첫 번째, 중학교 1학년.
우리 반의 퀸카에게 필이 꽂힘. 그러나 결과는 차임. 이유, 못생겼다 함.
나의 결론, 나의 외모는 문제없었음. 아무래도 그때 퀸이 짝사랑하던 남자 때문에 차인 듯싶음.
두 번째, 중학교 1학년 세 번째, 중학교 2학년.
이때도 얼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얼굴 기준으로 고백함. 역시 결과는 차임. 이유, 얼굴값을 하라고 함.
나의 결론, 두 번째는 임자가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실수, 세 번째는 예전에 내가 한 번 자기를 놀렸다고 복수 심리로 말한 듯싶음.
네 번째, 중학교 3학년 다섯 번째, 고등학교 1학년 여섯 번째, 고등학교 2학년.
이젠 외모를 기준으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함. 얼굴이 반반한 것들은 성격이 괴팍해서 연예인 수준의 외모가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 공주병이 있는 듯함. 그래서 성격이 좋다는 애들을 찍어 보기로 함(그래도 얼굴은 평균은 돼야 함.) 결과, 이상하게 차임. 이유,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고 함.
총평, 요즘 다들 연약한 미소년에 심취되어 있는 것 같음. 나의 근육질 몸매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 우선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음. 근육질의 몸이 아깝긴 하지만 해피한 미래를 위해 우선 내가 참기로 함.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드디어 완벽한 모습을 일궈 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만들기 위해 여동생의 비싼 샴푸를 몰래 훔쳐 쓰기도 하고, 매끈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 여동생의 마사지 팩도 한두 번 훔쳐 쓰다 결려 결국엔 눈물을 머금고 인터넷 쇼핑으로 사서 썼으며, 가냘픈 몸매를 만들기 위해 그 좋은 고기를 거부하고 절간의 스님처럼 풀떼기만 먹고 산 지 어언 일 년.
길을 걷다 보면 여자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거나 나를 보기 위해 앞장서서 걷는 행동도 자주 보던 일상생활이었다.
그런데, 미연이 걔가 왜 날 거절하냐고!
류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