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대단? 완전 바보지.”
“캬악! 너, 하현! 오늘 한번 너 죽고 나 살아(?) 보자!”
“저, 저기…… 도후 형.”
하현의 말에 완전 돌아 버린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하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는 은호가 말리려고 나를 잡았다가 하현의 사나운 눈초리에 다시 주눅이 들어 서둘러 손을 떼었다.
아니, 저놈의 자식이 제가 뭔데 은호를 자꾸 주눅 들게 만들어?
아무래도 한 번쯤은 저놈이랑 제대로 붙어야 할 것 같다. 바로 지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달려드는 나를 보며 하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 놈의 밉살스럽고 얄미운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이를 갈며 스팀이 팍팍 으로는 것을 느꼈다.
오냐. 어차피 죽은 몸, 한번 피처지게 싸운다고 달라지는 게 있었냐. 염라대왕님도, 저승사자도 나의 이런 심정을 이해해 주는 건 물론이요, 네놈 버릇 잘 들였다고 칭찬해 줄 거다.
이놈의 자식!
나름대로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하현에게 달려들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귀로 미세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뭐냐?”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나팔…… 소리?”
나의 말과 함께 하현이 슬쩍 귀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웬 나팔 소리?
내 귀에는 이상이 없다. 하현도 노래 소리가 들린다고 중얼거렸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 나팔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하현과 나는 조그맣게 들리는 나팔 소리를 잡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도후 형, 위를…….”
등 뒤에서 은호가 내 위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호의 말에 나와 하현은 고개를 들어 위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뭔데? 헐!”
저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허공을 올려다본 나와 더불어 하현과 은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은호가 가리킨 허공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나팔이라기보다는 색소폰 같은 부드럽고 중후한 소리였다.
아름다운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공에서 한 줄기 찬란한 빛줄기가 우리 쪽으로 문이 열리듯 뿜어져 왔다.
눈이 부실 정도의 강한 빛에 망막이 익숙해질 즈음 부드러운 빛에 감싸인 꽃잎이 한두 송이씩 떨어졌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맞으며 각기 한 쌍의 새하얀 날개를 지닌 아기 천사가 우리 쪽으로 우아하게 하강했다.
세 천사 중 유일하게 큰 가운데 있는 천사는 대빵인 듯 커다란 날개와 무언가 멋들어진 옷을 입고 천천히 날개를 파닥이며 내려왔다. 엄청 느리게 내려오는 대빵 천사의 양옆에 작은 날개를 지닌 아기 천사들이 춤을 추듯 주변을 맴돌았는데, 한 명은 색소폰을 불고 다른 한 명은 커다란 대빵 천사에게 꽃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천사라는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모습을 보고 감동에 벅차 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었겠으나, 아무래도 우리 셋 중에 그런 신자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세 천사의 모습이 근엄하기는커녕 한 편의 코미디로 보였기 때문이다.
열정을 쏟아 붓듯 땀을 흘리며 색소폰을 부는 어린 천사나, 까르르 웃으며 춤을 추듯 꽃가루를 날리는 저 어린 천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또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큰, 천사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후광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리고 저 어마어마한 속도는? 도대체 언제 내려와? 이 어이없음이란…….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 듯싶었다.
“뭐지? 저 바보들은?”
하현도 어이가 없었는지 특유의 싸가지 말투로 씹어 댔다.
“좀…… 우스꽝스럽네요.”
은호도 하현 못지않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마치 피아노 줄에 매달린 것처럼 천천히 내려오며 근엄한 포즈를 취하던 대빵 천사는 서서히 눈을 떴다. 즉, 계속 눈을 감고 양손을 벌리며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쪽으로 다 내려온 대빵 천사는 두 눈을 뜨고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무척이나 감동에 찬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다.
“……?”
“……?”
“…….”
우리를 기다렸다는 천사의 말에 나와 은호, 하현은 그저 묵묵히 천사를 바라보았다.
“오오, 우리의 구세주를 지금에서야 만나게 되었나이다.”
대빵 천사가 혼자서 감동에 벅찬 듯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양쪽의 꼬맹이 천사들이 더욱더 오버를 한다. 대빵 천사에게 꽃가루를 날리는 것도 모자라 우리 쪽으로까지 와서 꽃을 날리다니, 이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그들의 오버하는 행동에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빈혈기가 나서 잠시 주춤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빵 천사에게 물었다.
“구세주라뇨? 아니, 그전에 여기가 어딘가부터 좀 말해 주세요.”
그래, 저 대빵 천사라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 터, 중요한 일부터 짚고 넘어가자.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은호 역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는…… 죽은 건가요?”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던 대빵 천사는 우리의 질문에 서둘러 눈물을 닦고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오! 깜빡하고 말씀을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우선 도후,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자면 이곳은 저희 차원의 갈림길인 중간계랍니다. 천계로 모시고 싶지만 이건 다른 종족이 알아서는 안 되는 극비 사항인지라 현재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이곳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호, 그대들은 그대들의 차원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대들의 차원에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일로 인해 제가 명계로 가는 그대들의 영혼을 소환해 부른 것이니까요.”
“…….”
“또 다른 질문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질문을 묻는 대빵 천사를 보며 우리 셋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진짜로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름대로 약간은 이 모든 게 꿈이라고, 깨어나라고 말해 줄 사람을 바랐던 것이었다.
‘쳇! 정말 죽은 거구나.’
하현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은호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자 충격을 받았는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낀 나는 화제를 돌려 대빵 천사에게 물었다.
“근데 구세주라뇨?”
“아아, 중요한 말씀을 드리지 못했군요.”
대빵 천사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손바닥을 치며 오바하더니 우리 셋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깊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들은 저희들을 구원하실 선택받은 자랍니다.”
“네엣?”
“…….”
“……?”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웬 선택받은 자?
나와 하현, 그리고 은호는 대빵 천사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빵 천사는 감동한 듯 두 손을 포개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희가 다루고 있는 차원에 무서운 음모가 싹트고 있습니다. 이 음모를 막고 음모의 주동자를 잡기 위해서는 그대들 필요하다는 계시를 받아 제가 이렇게 모셔 온 것입니다. 물론 그대들의 환생은 늦어지겠지만 저희를 위해 한 번만 도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모신 것입니다.”
이게 무슨 영화, 아니 판타스틱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즉 저 대빵 천사의 말을 정리하면, 천사가 있는 세계가 위험에 빠져 점을 쳐보니 천사들의 신(뭐, 하느님이나 그 위겠지?)이 우리 세 사람을 지목해 이들이야말로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라는 신탁을 내렸단 말이 아닌가.
그렇다는 건……!
“저기, 그럼 우리들은 이 모습으로 그쪽으로 넘어가는 건가요?”
두 눈을 반짝이며 내가 질문을 던지자 천사는 감동에 벅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대들의 육첸 이미 소멸되어 없기 때문에 저희 세계에 있는 존재로 환생합니다. 물론 원하신다면 환생을 한다 해도 지금의 기억은 없애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오.’
대빵 천사의 말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구미가 당겼기 때문이다. 대빵 천사의 말에 나는 호기심이 왕성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현과 은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지 그저 나와 천사를 번갈아 보며 잠자코 얘기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두려운 눈빛을 하는 은호를 보며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음을 짓고 다시 대빵 천사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존재로 환생하는 거죠?”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걱정하지 말라는 천사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래요? 그 세계에는 인간 말고 또 뭐가 있는데요?”
“종족을 말하는 거라면…….”
“네, 그 종족이요.”
싱글싱글 웃음을 띠며 대빵 천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천사는 재빨리 종족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사는 곳엔 다양한 종족들이 있답니다. 인간, 천의족과 엘프, 드래곤…….”
“스톱!”
“네?”
좋아. 내가 원하는 게 있군.
몇 가지밖에 나열하지 않았다며 아쉬워하는 대빵 천사의 표정을 가볍게 묵살하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사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저 할래요.”
“뭐? 도후. 너!”
“도후 형!”
화를 내는 하현과 놀라 나를 부르는 은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승낙에만 대빵 천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주변에서 돌고 있던 꼬맹이 천사들과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즐기며 보고 있자 하현이 나의 어깨를 잡았다.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의 하현의 얼굴에 나는 그들에게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대빵 천사 씨.”
“네?”
“잠시 얘들과 얘기 좀 하게 기다려 주세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대빵 천사에게 말을 남긴 뒤 나는 은호와 하현의 어깨를 끌고 대빵 천사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나직이 나의 생각을 얘기했다.
솔직히 얘기랄 것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 얘기해 준다면 이 조건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런 나의 뜻도 모르고 하현이 으르렁대며 인상을 써 댔다.
“무슨 생긱이야?”
“아! 하현, 잠깐. 우선 내 얘기를 먼저 듣고 생각해 봐. 은호, 너도.”
나에게 집중한 하현과 은호에게 재빨리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판타지 세계의 정보를 쉴 새 없이 알려 주었다. 특히 드래곤의 위대함을 강조해서 말이다.
조용히 내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후 하현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나에게 되물었다.
“니가 알고 있는 판타지 세계랑 같다는 보장 있어? 그리고 너는 정말 그 판타지란 세계로 가고 싶단 말이야? 그것도 드래곤으로 환생시켜 달라고 할 거란 말이지?”
“당연하지. 드래곤이 있다잖아, 드래곤이! 드래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아? 마법은 물론이요, 원하는 모든 모습으로 변신도 하고, 오래 살기까지 하지. 어차피 죽어서 환생시켜 준다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환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리고 솔직히 지금의 내가 살던 서울 쪽으로 환생하느니 낭만이 넘치고, 즐겁고, 모험이 가득한 재미있는 세계에서 사는 게 더 낫지 않아? 보통으로 환생하면 지금의 내 기억도 잃기 때문에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도 없을 거고. 안 그래?”
앞날에 대한 벅찬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흥분이 되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선택받았다고 하잖냐.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드래곤으로 환생하여 멋진 용사로 변신해서 아름다운 공자나 엘프와 해피한 생활을 보낸다(목적은 이것). 크! 사나이의 진정한 로망이지!
“나…… 도후 형이 한다면 나도 할래요.”
나의 말을 조용히 듣던 은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동의를 했다. 그런 은호의 행동에 하현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나의 애절한 눈길을 보곤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죽었으니 뭐든 상관없겠지.”
“흐흐, 좋아! 탁월한 선택이야. 나중에 나에게 고맙다고 할걸?”
음흉스러운 표정으로 하현에게 말한 다음 나는 뒤에서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는 대빵 천사를 불렀다.
“결정을 하셨습니까?”
어느새 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는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빵 천사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건을 제시했다.
“원하는 대로 도와드리겠어요. 단! 우리 셋 모두 드래곤으로 환생시켜 주세요. 지금의 기억 그대로를 가지고요.”
“드래곤으로 말입니까?”
난처하다는 대빵 천사에게 나는 안 그럼 안 하겠다는 듯이 배짱을 부렸다. 그런 나의 행동에 대빵 천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항복을 표시했다.
“알겠습니다. 드래곤으로 환생시켜 드리도록 하지요.”
“야호!”
대빵 천사의 말에 나는 기분 좋게 만세를 불렀다.
“그럼 우선 제가 환생의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환생의 문?”
“네. 영혼이 새로운 육체를 얻기 위해서는 환생의 문을 거쳐야 합니다. 세 분이 저희 차원 분이라면 문을 통과하실 필요가 없지만 타 차원 영혼이기 때문에 이 문을 거쳐야 합니다. 그 문을 제가 열어 드릴 테니 그냥 통과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깨어나실 땐 원하시는 드래곤의 모습으로 환생하실 겁니다. 제가 곧 그대들을 찾아가겠습니다.”
“네.”
문이 열리자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쭈뼛거리며 눈치만 살피는 은호의 행동에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 주었다.
“걱정 마. 드래곤끼리는 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쉽게 알 수 있어. 세 명이 동시에 태어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비슷한 또래만 찾으면 되잖아.”
“응…….”
“그럼 들어가자.”
은호의 손을 잡고 문으로 들어서려 하자 누군가 내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하현이었다.
“왜?”
“네 뜻대로 드래곤이 되어 주었으니까 네가 직접 날 찾아와라. 내가 먼저 찾는 건 질색이니까.”
“쿡! 알았어. 가자, 가.”
혹시나 자기를 모른 체할까 봐 나에게 투덜거리는 하현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은호와 하현을 절대 안 잊어버리겠다고 다짐을 한 뒤 나는 둘의 손을 잡고 하얀빛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들어가면서 마룡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간절히 빌며.
류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