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럼 명령할 거야.”
‘치사한 놈!’
꼭 제 뜻대로 안 되면 명령으로 약점을 잡이. 어우 재수.
차마 본인 앞에서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에 나는 그저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머릿속으로 7일간의 여유밖에 없다는 걱정으로 좋른 방법이 없는지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혹시 마스테마, 던전 만들 수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묻는 나의 말에 마스테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던전이야 바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내가 만들어 둔 던전도 몇 개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 던전 안에만 시간을 정지시켜 둔다거나 오래 연장시키는 마법을 걸 수는 없어?”
“시간? 자세히 좀 말해 봐.”
나의 어설픈 설명에 마스테마는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스테마에게 설명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견을 정리한 다음 차근히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응. 예를 들어서 밖에서의 하루라는 시간을 던전 안에서는 일 년으로 만든다든지, 아니면 몇 주 정도라도 차이 나게 하는 마법 말이야. 그런 마법 있어?”
“호오! 있긴 하지. 그래서?”
“밖에서 7일이라면 던전에서는 7년이라는 소리잖아. 그렇게 시간의 마법을 걸고 던전도 단계를 나누는 거야. 15단계로.”
단계를 나눠 달라는 말에 마스테마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15단계? 15층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이야? 그건 왜?”
“층이 상관없고 그냥 단계만 15단계로 나누면 돼. 우리가 훈련할 수 있도록 1단계부터 15단계까지의 난이도로 몬스터가 있는 던전을.”
“아하! 쉬운 몬스터에게 차례로 난이도를 어렵게 해 달라는 말이군.”
“그래. 1단계의 몬스터를 다 전멸시키면 2단계로 넘어가는 순차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하면 실전 경험까지 할 수 있게 되잖아. 대신 앞에 세 단계쯤은 우리에게 약한 몬스터여야 해. 아직 우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말이야.”
기왕 연습을 할 바엔 실전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게 실력을 더 빨리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처음 몇 단계는 휘두르는 연습만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약한 몬스터를 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몸놀림이 빠른 것들로 말이다.
그런 나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스테마는 내가 말한 의견을 정리하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름. 꽤 좋은 생각이군. 던전에서는 칠 년이지만 이쪽에서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니까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고, 직접 사냥과 전투로 훈련을 하는 거니 실전 경험까지 터득하고. 좋은 생각인데?”
“그치? 게다가 몬스터들의 특성이라든지 약점을 알아둘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마왕을 처치할 때 주변에 끌고 다니는 몬스터는 쉽게 처리할 수 있잖아. 그렇군, 15단계까지 끝내고 나서 인간계로 내려가면 되지.”
“좋군. 알았어, 내가 그 던전을 만들어 주지. 15단계라 했으니 단계별로 내가 적절한 몬스터들을 배합해서 넣어 주면 되겠어.”
내 발상으로 학구열(?)이 불타올랐는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마스테마는 요리조리 계산을 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나 역시 만족감을 느끼며 뭔가 또 필요한 게 없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나만의 상념에 빠져 있는데 앞에서 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몬스터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세서 죽을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해요?”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빼먹었군!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직접적인 전투니 죽을 위기에 처하는 건 당연할 테니까 말이야.”
몬스터가 우리의 명령을 듣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달려들 테니 분명 죽을 위기에 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대응 방법을 고민하는 나와 달리 마스테마는 쉽게 은호의 질문을 해결해 주었다.
“그런 거야 뭐 간단하지. 명령만 내리면 자동으로 실패로 인식해 처음으로 되돌려 놓도록 하지.”
마스테마의 말에 나는 만족스레 웃음을 지었다. 왠지 지금 우리가 가야 하는 던전이 즐겨 하던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은호에게 신나게 설명까지 해 주었다.
“아, 좋아. 그럼 시작 명령을 하면 자동으로 미션이 시작되는 거고, 도중에 위험하다 싶을 때 명령만 내리면 다시 대기 중인 상태로 간다는 말이군.”
나의 말에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제일 무난하겠어. 마스테마, 비슷한 무기로 싸우는 동작을 보여 줄 수 있는 건 없어?”
하현의 주문에 이것저것 생각을 하던 마스테마가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았다.
“그건 왜?”
“필요할 때마다 참고해서 봐 두면 나쁠 거 없잖아?”
“흠, 그렇군. 각자의 무기 사용법이나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내가 적당한 대상자를 찾아 만들어서 보내 주도록 하지. 그럼 여기서 더 둘러보고 있어. 나는 좀 다녀올 데가 있어. 아까 말한 던전에 적합한 곳이 생각났거든.”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마스테마는 실험실 쪽으로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정말로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던전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
바스락―!
우거진 수풀 사이로 미세한 움직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수풀을 해치며 돼지 얼굴을 한 그것들이 나타났다. 오크였다.
세 마리가 무언가를 찾듯이 수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기와 방패로 무장한 채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서 상당히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때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서 수풀 하나가 살짝 열리며 사람의 눈동자가 보였다.
슬며시 나뭇잎을 손으로 젖히고 밖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나뭇잎 건너편에는 오크 세 마리가 우리를 찾는지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삼사 미터 정도의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오크 특유의 고약한 악취가 콧속을 파고들며 속을 메스껍게 했다. 하지만 소리를 내면 애써 몸을 숨긴 게 헛수고가 되기에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세 놈을 눈으로 쫓으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도후.”
등 뒤에서 나직이 하현이 말을 걸어왔다.
“앞에 세 놈만 있어.”
상황을 설명해 주며 하현과 둘이서 각자 맡을 놈을 나누었다. 다치지 않고 가장 신속하게 처리할 계획을 하현과 짧게 나누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짰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슬며시 엉덩이를 들어 사정거리를 잡기 위해 천천히 하현과 발을 옮겼다.
이동하기 전, 뒤에 있는 은호에게 세 마리 중 제일 덩치가 큰 중앙 쪽 놈의 머리를 노려 쏘라고 주문을 했다. 은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목표물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대기 신호를 내린 뒤 하현과 함께 슬며시 숨죽인 걸음으로 오크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크룩?”
“크룩.”
어느새 긴장감이 풀렸는지, 빈틈을 보이는 놈들의 모습에 나는 은호 쪽으로 살짝 손을 들고 신호를 주기 위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
‘하나, 둘, 셋!’
피융―!
“크루―!”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이내 무서운 속도로 화살을 정확하게 중앙에 있는 오크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다 숨이 끊어진 오크의 모습에 당황하던 남은 두 놈을 향해 나와 하현은 재빨리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핫―!”
먼저 움직인 건 하현이었다.
자신이 맡기로 한 왼쪽의 오크가 미처 막기도 전에 손을 뻗어 검을 쥔 팔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상체를 옆으로 틀어 자신의 허리 쪽으로 검을 밀어 달려드는 오크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 넣고 몸을 틀었다.
“쿠……!”
하현에게 공격당한 오크는 옆구리에 밀고 들어오는 검을 빼내기 위해 남은 손으로 검을 쥐었지만 하현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몸속에 박힌 검을 돌려 허리를 베어 버린 것이다.
쿵―!
상체와 하체가 나누어지며 낙엽이 떨어지듯 힘없이 바닥에 곤두박질한 오크의 모습을 확인한 하현은 자신의 일을 끝마쳤다는 듯이 검에 흐르는 피를 떨쳐 내며 검집에 넣고 내 쪽 상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뭐 하냐?”
“에? 아하하하, 그게…….”
하현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마치 한심스럽다는 듯한 행동이지만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나였다.
다름 아닌 내 앞의 오크 때문이었다.
“크룩―!”
눈 깜짝할 사이 동류 두 놈이 차가운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누운 모습을 보고 이놈의 오크는 끈질기게 반항을 하며 나의 공격을 막아내며 맞대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제대로 안 하고 하현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긴 하지만, 도와줄까라는 표시로 하현이 검을 빼내려 하자 나는 서둘러 제지했다.
그리고 눈앞의 오크와의 거리를 제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이건 내 거야!”
내 밥을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마스테마에게 받은 두 개의 도를 양손에 쥐고 양팔을 교차했다. 오크도 슬금슬금 내 쪽으로 걸어오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크루욱!”
휘잉―!
목을 향해 날아오는 도끼날을 허리를 숙여 슬쩍 피하자 서늘한 바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내가 미처 피할 거라 생각 못한 회심의 일격이었는지 오크가 놀란 듯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재빨리 놈과의 거리를 더욱 좁혀 내 단도의 사정권 안으로 오크를 끌어들였다.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붙는 나의 모습에 당황한 오크는 재차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나 손에 쥔 도끼가 생각이 났는지 내 쪽으로 난폭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나는 놈의 단순한 동작을 살짝 피하며 도끼가 회수되는 타이밍에 맞추어 뛰어들었다.
“타핫!”
선을 긋듯 팔을 휘둘러 오크의 목을 향해 도를 움직였다.
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오크는 가까스로 자신을 향한 나의 도를 막나 내었다. 하지만 나의 다른 한 손엔 또 다른 도가 있었다. 나는 남은 도로 오크의 상체를 베어 냈다.
“크루욱!”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 내며 오크는 벌어진 상처를 한 손으로 막고 동료를 부르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다. 오크의 행동을 미리 눈치 챈 나는 발을 굴러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이어 재빠른 솜씨로 검의 손잡이를 손바닥 안으로 돌리며 날을 팔꿈치 쪽으로 거꾸로 돌려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돌려 뒷걸음치는 오크의 목을 베어 버렸다.
털썩―!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휴우!”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주변에 움직이는 소리는 없네요.”
은호가 수풀을 해치고 나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이번 판은 간신히 끝냈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허리에 장착한 뒤 손을 털자 하현이 다가오며 혀를 찼다. 빨리 끝내지 뭣 하러 질질 끄느냐 하는 타박이었다.
“다친 데는?”
“전혀 없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자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의 시체에 눈길을 주다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오크는 죽어서도 엄청난 냄새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오크와 싸운 곳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에서 우리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 단계가 끝나면 어질러진 주변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단 시체들은 하루 뒤에 사라지기 때문에 자리를 옮겨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숲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과일이라든지 사냥할 짐승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게다가 가끔 단계를 끝내면 마스테마가 먹을거리를 보내 주기 때문에 들짐승만 먹는 일은 없었다. 뭐, 가끔 김치와 고추장이 그립긴 하지만.
“하아! 배부르다.”
한가득 만들어 놓은 음식을 두고 제일 먼저 내 몫의 음식을 다 해치운 나는 포만감에 만족스러운 배를 두드리며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하현이 질렀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돼지.”
“시끄러! 원래 난 대식가야. 그리고 이 작은 몸을 봐. 성장기라고. 많이 먹어야 쑥쑥 자라서 너만 한 몸을 만들지.”
“쿡!”
내 말이 우스웠는지 하현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이 마치 무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은호의 말소리 때문에 참아 준다.
“이제 6단계를 끝낸 거죠?”
“응.”
“아직도 아홉 단계나 남은 거네요.”
숫자를 헤아리며 나직이 한숨을 쉬는 은호를 보자 쓴웃음이 났다.
마스테마가 던전을 만들었다며 아무 말 없이 바로 우리들을 이곳으로 밀어 넣은 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솔직히 마스테마가 던전을 만들다 귀찮아서 그냥 인간계로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이라고 하면 동굴로만 생각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던전이 아니라는 생각에 실망을 하고 우리는 이 숲을 우선 나가자고 결론을 짓고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계속 걸어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숲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분명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주변을 보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는 거리에 숲의 끝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스테마와 짠 미션의 시작을 알리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몬스터가 몰려들었다. 마스테마는 인간계의 숲에 결계를 쳐서 하나의 던전을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정말 우왕좌왕했었다.
눈앞에 등장한 몬스터는 그 특유의 징그럽거나 못생기거나, 아름답지만 어딘가 사악한 오라(?)를 풍기는 그런 몬스터라 볼 수 없는, 정말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동물이었다.
사람 얼굴만 한 크기에 솜사탕 같은 두루뭉술한 몸으로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게 정말 몬스터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게 무슨 종(種)인지 알고 넘어가자는 생각에 마스테마가 준 책에 물어보니 몬스터는 맞지만 거의 사람들에게 애완용으로 키워지는 큐링이라는 말에 이번 1단계는 쉽게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고난의 길이었으니…….
데굴데굴 굴러가거나 통통 튀며 도망치는 것을 잡기가 처음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차차 시간이 지나자 적응이 되어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섬뜩할 정도의 공격성도 없기 때문에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따라오라는 듯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늘어선 큐링들을 나와 하현이 차근히 잡아간 끝에는 수백 마리의 큐링이 모여 있었다.
류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