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크얀을 얕보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몬스터들과 상대하다 보면 내가 다치거나 죽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적당히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빨리 베어 숨통을 끊느냐가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 카인과의 대련 또한 몬스터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죽어라 달려들었던 것도 차례대로 생각이 났다.
‘내가 왜 그걸 간과했을까.’
처음에도 그랬다. 내 장점인 스피드를 쓸 생각을 가졌으나 전부다 보여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지크얀을 무시하고 적당히 풀자는 마음으로 대련에 임했다. 게다가 기술을 걸어 보기만 할 뿐 어떻게 지크얀을 쓰러뜨려 이길까 하는 필사의 생각은 해 보질 않았었다.
“하하, 저놈은 그걸 알고서…….”
나를 바보라고 불렀던 카인의 대련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녀석은 아까의 나와 반대로 항상 매사에 무관심하며 쿨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 검을 들기만 하면 저런 필사적인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졌다, 졌어! 에이, 지독한 놈!”
쉴 새 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에 못 버티겠는지 란슬로가 이내 재빨리 등을 돌려 카인에게서 멀찌감치 도망가며 괴성을 질렀다. 목검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도망가는 란슬로의 모습에 카인도 제법 숨이 찼는지 가쁘게 호흡을 내뱉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지크얀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란슬로가 먼저 달아나다니, 카인 녀석 대단한데?”
“대단해요.”
카인의 모습에 감탄을 터뜨리며 도울이 칭찬하자 나는 카인에게서 분함을 느겼다.
‘쳇!’
“지크얀! 나랑 한 판 더 해!”
“헙! 아, 아리스?”
“한 판만 더 하자.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아.”
“오, 오늘은 나도 힘들어서…….”
강압적으로 떼를 쓰듯 지크얀에게 목검을 주어 내미는 나를 향해 지크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인에게 도움을 요정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뭔데?”
“아! 카인, 네 말뜻은 이제 알았어. 흥! 잘 봐. 다시 제대로 보여 줄 테니. 그러니까 지크얀, 한 판만 더 해. 응?”
“하하하. 아리스으!”
“바보!”
“또?!”
지크얀의 팔을 잡고 늘어지는 나를 보며 카인이 다시 성질을 돋우었다. 이번엔 제대로 보여 준다고 했는데도 바보라 약을 올리자 슬슬 화가 솟아났다.
지크얀과 대련하지 말고 간만에 저놈과 생사를 건 대련을 다시 할까 하는 생각으로 씩씩거리며 팔을 걷어붙이자 카인은 그런 나를 무시하고 란슬로와 지크얀을 데리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걱! 저놈이 이젠 나를 무시하네?’
“카인! 지크야안!”
“아리스! 내일 하자. 식사 시간이라니 밥은 먹어야지!”
연무장에 도울과 단둘이 남게 되자 자택으로 가는 세 사람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나의 행동을 보다 못했는지 란슬로가 대뜸 우리 쪽으로 등을 돌리며 약속을 해 주었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란 소리에 나는 고급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잽싸게 도움의 손을 잡으며 앞의 세 사람에게 달려갔다.
“약속했다. 앙? 밥 먹자, 도울!”
***
챙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묵직한 고통이 손을 울렸다.
하지만 내 가 쥔 목검은 움직이지 않았고 상대방 란슬로의 손에 든 목검이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헉! 졌다, 졌어! 아리스, 넌 카인보다 더 독하다.”
“흐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숨을 헐떡이던 란슬로가 팔이 저런지 손을 주무르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땀으로 인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으아, 땀 튀겨욧!”
“시끄러워! 이 팔에 든 멍이 안 보이냐, 아리스? 어떻게 무지막지하게 나를 팰 수가 있어. 흑! 이 오라빈 슬프다.”
옆쪽에 앉은 란슬로의 땀이 튀자 놀라 한마디 던지는 내게 란슬로가 붉게 멍이 든 자신의 팔을 보여 주며 훌쩍인다. 다 큰 아저씨가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투정을 부리는 게 웃기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해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주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크얀이 내 눈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크얀, 한판 해요!”
“아아! 봐줘, 아리스. 어제 간만에 몸을 움직여서 근육통에 걸렸단 말이야!”
오늘은 도저히 무리라는 듯이 허리를 휘청거리며 약한 모습을 보이는 지크얀의 행동에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혀를 찼다.
“거짓말을 해도 정도껏이란 게 있죠, 지크얀. 용병이라는 사람이 무슨 근육통이예요?”
“어어? 못 믿네. 진짜래도. 에구, 허리야…….”
“그나저나 아리스, 너무해. 지크얀에게는 살살하고 왜 나만 두들겨 패는 거야.”
아직도 아픈지 팔을 주무르는 란슬로의 말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몰라서 실수한 거예요. 오늘은 그 실수를 안 하려고 죽기 살기로 대든 거구요.”
“흐음, 그렇군. 그나저나 엄청나게 빨랐다고. 너, 어떻게 그렇게 빠른 거냐?”
내 말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란슬로는 궁금했었는지 내 스피드에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전 모든 몬스터들의 장점을 흡수한 괴물 생명체 키메라예요!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나는 잘난 척 허리에 손을 짚고 웃어 주었다.
“핫핫! 타고난 거죠.”
“아무리 타고나도 그런 스피드는 쉽게 낼 수가 있는 게 아닌데, 그러고 보니 너처럼은 아니지만 카인 녀석도 꽤 빨랐단 말이야. 힘도 무식하게 세고.”
“에이! 적당히 요령껏 한 거죠. 진짜로 란슬로랑 힘겨루기를 하면 어떻게 이기겠어요. 란슬로는 이렇게 등치도 있고 근육도 무지막지하게 많은데 말이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재빨리 란슬로의 근육을 칭찬해 주었다. 그런 나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란슬로는 싱글벙글 웃다 계속되는 칭찬에 부끄러웠는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흐흐흐,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져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챙기는 란슬로의 모습에 나도 상황이 종료가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주변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였다.
덥썩―!
“엥?”
“?”
“누구냐, 그 꼬만?”
목검을 주워 원래 있던 자리로 놓고 등을 돌려서 가려는 나를 누군가 멈춰 세웠다. 무언가 뒤쪽에 내 옷이 걸렸나 싶어 돌아보니 옷자락을 잡은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잡은 게 꼬마란 것을 알았는지 란슬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나에게 물어도 내가 이 꼬마를 아는 것도 아니고.
란슬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옷자락을 쥐는 손을 따라서 눈을 굴렸다.
작은 손의 정체는 내 가슴 정도의 키에 붉은 곱슬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리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나를 또렷이 보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
“나?”
나는 눈앞의 꼬마의 얼굴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혹시 내가 맞는지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나밖에 없어서 이 소년이 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 말이니, 꼬마야?”
퍼억―!
“으갸갸갹!”
“꼬마라 하지 마!”
꼬마라는 나의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소년은 재빨리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방심한 틈을 타 날린 발차기로 인해 지잉 하고 울리듯 저려 오는 고통으로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나는 꼬마에게 으르렁거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어디서 어른에게 행패를 부려, 앙?”
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꼬마의 행동에 나는 잽싸게 날아오는 소년의 발을 손으로 낚아챘다. 이번엔 제법 높게 내 배를 겨냥해서 차려고 했는지 쉽게 소년의 발을 잡자 소년은 내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움직이며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내 힘이 힘인지라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발 때문에 소년은 결국 얼굴이 벌게졌다.
“왜? 또 차 보시지?”
“이씽! 너, 울 아빠한테 이른다. 울 아빠가 누군지나 알아? 이거 안 놔?!”
“못 쓰겠구만, 이거. 결국 제가 시비 걸어 놓고 안 되겠으니 고자질이냐? 고얀 것! 내가 그 버릇을 고쳐 주마!”
바동거리는 꼬마의 발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중심을 잃은 녀석이 내 품 안으로 덥석 안겨 왔다.
“우, 우왓! 뭐, 뭐야!!”
“아리스!”
내 품에 안긴 꼬마는 얼굴이 뻘게지며 빠져나가려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빠져나가려는 녀석들 들어 아래로 향하게 한 다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손바닥으로 녀석의 엉덩이를 두들기듯 때려 주었다.
찰싹―! 찰싹―!
“우악! 이거 안 놔! 아파! 아프다고!! 어디 여자가 남자의 엉덩이를 만지래!!!!”
처음엔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던 녀석은 맞아 보니 별로 세게 안 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이제는 쪽팔린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란슬로는 이미 못 봤다는 듯 저택 안으로 들어가 이곳에 남은 건 꼬마와 나 둘뿐이었다.
클클거리며 놓아주질 않고 계속 때리자 못 참겠는지 멀찍이서 걸어오는 치르윈을 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닌가?
“치르윈!!”
“어머, 어머, 라휀 님! 아리스 님!”
“안녕, 치르윈. 벌써 식사 시간이야?”
울상을 지으며 치르윈을 부르자 치르윈이 꼬마를 아는지 이름을 부르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아리스 님?”
“이 꼬맹이가 건방지게 입을 놀려서 버릇 좀 고쳐 주려고.”
“네? 하지만 이분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는 치르윈의 표정에 나는 슬쩍 뭐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어 꼬맹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자 꼬맹이는 무척이나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치르윈에게 달라붙어 나를 가리키며 우는 척 연기를 했다.
“흑! 치르윈, 이 누나가 그냥 날 보더니 마구…….”
“말을 바로 하자, 꼬마. 난 남자라서 누나가 아니야. 그리고 네가 먼저 가만히 있는 사람 옷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건방지게 행동했다는 건 기억 안 나냐?”
화가 난 듯한 나의 말에 꼬마는 울던 연기를 멈추고 입술을 깨물며 분하다는 듯이 빽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먼저 날 꼬마라 놀렸잖아.”
“놀린 게 아니라 너의 이름을 모르니 꼬마라고 한 것뿐이야. 나보다 어리고 키도 작은데 꼬마라고 부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바락바락 대든다 해도 네가 이 몸을 이기는 건 몇 십 년 무리다, 꼬마.
분한 듯 노려보는 꼬마의 눈을 가볍게 흘겨보며 치르윈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얘가 백작의 자식이든. 뭐든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치르윈이 만약 백작에게 말하고 싶으면 말해 난 방금 말한 대로 다시 말해 주면 되니까.”
“어머……!”
“이 씽…….”
어쩔 줄을 모르며 조마조마한 말을 하는 치르윈을 보다(말로는 어머 하지, 분명 저 성격에 속으로 즐기되 겉으로는 표현만 안 할 뿐일 것이다) 이내 꼬마는 분한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꼬마의 모습이 퍽 귀여워 나는 화난 표정을 짓다 이내 풀고는 가볍게 꼬마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뭐얏!”
“좋아. 꼬마란 말이 싫으면 이름을 불러 주지. 이름이 뭐야?”
“바보 아냐? 아까 치르윈이 하는 말 못 들었어?”
“…….”
‘이놈을 귀엽다고 본 내 눈이 삐꾸였구나.’
예쁜 점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꼬마의 말에 나는 풀어지던 화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꼬마 역시 다시 내 표정이 아까의 화난 얼굴로 변해 가려는 것을 보았는지 흠칫 떨며 슬슬 뒷걸음을 쳤다.
겁을 먹을 거면 도발이나 하지 말 것이지, 말투는 완전 카인 미니어처네.
“난 치르윈이 아니라 너에게 이름을 물었어.”
“라휀이야. 라휀 가르보.”
팔짱을 끼며 비딱하게 서서 말하는 내 말에 꼬마는 차렷 자세를 하더니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오케이. 라휀, 앞으로 꼬마라 부르지 않고 라휀이라 불러 주지.”
“저, 저기……?”
“왜?”
나의 말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 라휀이 슬며시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름이 뭐야?”
“아리스다, 아리스.”
“성은?”
라휀의 질문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나의 모습에 라휀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옆에서 조용히 쳐다보는 치르윈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성을 뭐라 짓지?’
치르윈에게 기억상실에 걸려 이름이고 나라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는 생각이 퍼뜩 나자, 나는 라휀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쓰다듬어 주며 짓궂게 웃음을 지었다.
“팔아서 국 끓여 먹었다.”
“에?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잖냐. 알면 다치니까 묻지 마라.”
“윽!”
나의 말에 처음엔 믿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나의 웃는 얼굴을 보며 속았다고 깨달은 라휀이 팔을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그런 우리를 보던 치르윈은 조용히 라휀에게 입을 열었다.
“라휀 님, 식사 시간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들고 아리스 님과 노세요.”
“응.”
“오! 밥이다, 밥! 가자.”
어제의 저녁 식사가 엄청 맛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 나는 치르윈의 식사 시간을 알리는 말에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라휀의 손을 잡았다. 내 손에 잡힌 라휀은 쑥스러운 듯 손을 빼려다가 나의 힘에 빠지지 않자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치르윈에게 보여 주며 나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식당 안으로 들어오니 우리가 제일 늦었는지 이미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눈치를 살짝 모두에게 보낸 뒤 조용히 라휀과 함께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서 대기하던 메이드가 하나 둘씩 음식을 각자의 앞에 차려 주었다.
맛깔스럽게 새하얀 접시에 담긴 싱싱한 샐러드가 앞에 놓이며 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잘 익은 스테이크가 고소한 향을 뿜으며 눈앞에 차려졌다. 이미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는지라 나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에 신이 나서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고기를 한 점 썰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흑!’
뜨거운 육즙이 흘러넘치며 입 안 가득히 담백한 고기 맛이 씹혔다. 특히나 좋아하는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류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