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겨워하는 나와 반대로 라휀은 제 아버지(가르보 백작)처럼 조신하게 앉아서 조심스레 고기를 썰어 얌전하게 입 안에 집어넣어 먹는다. 어떻게 보면 식사 예절은 깔끔하나 어떻게 보니 맛없는 것을 억지로 먹는 듯해 보여 나는 옆에서 슬쩍 라휀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먹는 게 그게 뭐냐? 남자란 자고로 나처럼 잘 먹고 탐스럽게 먹어야지. 이런 걸 먹어야 키도 쑥쑥 크고 몸도 튼튼해져. 먹어.”
“알아서 먹고 있다, 뭐…….”
먹기 쉽게 잘라서 가지런히 자신의 접시에 올려 주는 나의 행동이 싫지 않은지 라휀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입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일행들은 내가 백작의 아들에게 아무렇게나 말하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런 것에 신경을 전혀 안 쓰는 지 오히려 허허 웃으며 자신의 아들의 사교성을 칭찬해 주었다.
“허허, 우리 라휀이 벌써 아리스 님과 친해졌구나.”
“응. 부탁할 게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는 라휀의 말뜻을 알게 된 나는 고기를 씹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부탁할 게 있다니? 너 필요한 게 있어서 일부러 나에게 접근한 거냐?”
“응.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서 접근했겠어?”
나의 질문에 라휀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놈을 그냥 다시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아버지 앞이라 그러는 건지 몰라도 아까에 비해 상당히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라휀의 모습에 실망감이 들었다. 쪼끄만 게 벌써부터 까져서 자기 이득을 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사람을 놀리다니.
그런 나의 모습에도 전혀 놀리지 않고 라휀은 자신의 아버지인 가르보 백작에게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나, 어린이 토너먼트에 참여할 거야. 물론 스승은 이 아리스로 하고.”
“뭐?”
“흠.”
“?!”
깜짝 놀라는 나와 함께 우리 일행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과는 다르게 가르보 백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냅킨을 쥐고 자신의 입가를 닦는 여유로움마저 보여 주었다. 그러다 메이드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고서 나직이 내뱉은 한마디.
“안 돼.”
거부할 수 없는 듯한 가르보 백작의 말에 라휀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집스레 입을 열었다.
“나갈 거예요.”
“안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널 수도로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재주껏 따라와 보려무나.”
“윽! 치사해.”
자신을 저택에 두고 간다는 말에 라휀은 다시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쩍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이 토너먼트 가지고 왜 저리 백작은 완고한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인지라 나는 재빨리 둘 사이의 말을 자르고 조심히 백작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가르보 백작님.”
“네, 아리스 님?”
“라휀이 어린이 토너먼트에 참가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저리 나가고 싶어 한다면 한번 경험 삼아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렇지? 아리스, 고마워!”
나의 말에 애매모호한 웃음을 짓는 백작의 모습에 뭔가 내가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는 걸로 라휀은 좋다고 한다.
버릇없는 라휀을 보자니 내가 괜히 도와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달라붙으며 좋아하는 라휀을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다 란슬로와 지크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둘도 역시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보이자 나는 슬쩍 어린이 토너먼트도 위험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헉! 백작님, 내가 실수한 거예요? 어린이 토너먼트 무기 들고 싸우나요?”
나의 말에 란슬로가 백작을 대신해 설명해 주었다.
“아냐, 아리스. 어린이 토너먼트는 그냥 단순하게 맨손 격투다.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손이나 무릎 같은 데는 보호구를 차고 대련하게 되지.”
“그럼 심하게 다칠 염려는 없단 소리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지? 설마 라휀, 너 격투술도 모르면서 그냥 참가하려고 하는 거야?”
“아, 아냐!”
“그럼 된 거 아냐? 원래 애들은 싸움도 해 보고 맞아도 보면서 자라야 하는 법이야.”
문제될 거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웃으며 말하는 내게 조용히 식사를 하던 카인이 한숨을 쉬며 내게 입을 열었다.
“어린이 토너먼트는 신청 대상 제한이 없다.”
“그게 뭐? 나이는 10에서 14세라며? 나이 제한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넌 바보라는 거다.”
나의 말에 카인이 다시 한숨을 쉬며 나를 나무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울컥해 오만상을 찌푸리며 으러렁거렸다.
“확실한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자꾸 놀리기나 할래?”
분해하는 내 모습에 보다 못했는지 치르윈이 나섰다.
“아리스, 어린이 토너먼트는 신분 제한이 없어요. 그 말은 귀족, 일반 시민들, 용병들이 참여할 수도 있다는 소리죠.”
“그런데?”
“용병들이야 대부분 나이가 20세가 넘기 때문에 어린이 토너먼트에 나올 확률이 적어 대부분 시민과 귀족들만 참여하게 되지만 실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반 시민들이에요.”
“그렇겠지.”
치르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카인이 말을 받아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귀족과 시민이 대련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
“그냥 싸우는…… 아!”
카인의 말뜻에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귀족과 시민이 싸우게 되면 나 같아도 시민이기 때문에 귀족을 곱게 보지 않아 전력을 다할 것이다. 물론 귀족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실력 있을 수도 있지만 격투술은 어떻게 보면 치고받고 하는 일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보호구가 있다 하더라도 아픈 건 똑같다. 그런 싸움에 평소에 맞아 보지도 못한 귀족이 맞게 된다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겠지,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무료로 입학, 전액 학비 지원까지 해 주는 부상이 걸려 있다면 시민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집안 형편상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그 행운을 잡기 위해 참여하는 거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집스레 나를 바라보는 라휀을 보며 란슬로와 지크얀에게 물었다.
“먼젓번 어린이 토너먼트에 참가한 귀족은 몇이야?”
“한 명이었지?”
“음, 신청했다가 싸우는 걸 보고 기겁해서 기권했어.”
나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던 지크얀이 기억이 났다는 듯이 설명해 주었다. 지크얀의 말이 끝나자 란슬로가 과일을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추가적으로 보태 주었다.
“그렇군. 백작님은 그걸 알기 때문에 그만두라고 하신 거군.”
나의 말에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라휀이 왜 어린이 토너먼트에 참여하고 싶은지 설명을 해 주었다.
“사 년 전 다섯째 왕자께서 한번 그 어린이 토너먼트에 참가하셨습니다.”
“으에?”
“16세의 나이셨죠, 뭐 그때 당시만 해도 어린이 토너먼트의 나이 제약은 13세부터 16세까지였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듯이 백작은 조용히 나에게 왕자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물론 왕자라는 건 저희 몇몇 귀족들뿐만 알고 있었습니다. 서자 출신이기에 제대로 그분이 왕자라는 걸 아는 자는 극히 드무니까요. 물론 진행자는 알고 있었겠지만 대련하면서는 절대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 놓지 않았습니다. 왕자라는 신분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상대방 어린이들이 주눅이 들 수 있으니까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왕자께서 명령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왕자께서는 대련을 하면서 일반 성인들 못지않은 몸놀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보통 어린이들의 대련은 격투술이라 볼 수 없을 정도의 난잡함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냥 상대방을 쓰러뜨려서 위에 올라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때리는 게 대다수죠. 그리고 그게 제일 빠른 승리 방법이고요. 하지만 왕자께서는 그런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달려드는 상대방을 피해 기술을 걸어 쓰러뜨리고 얼굴 부분에 닿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재서 일격을 가해 상대방에게 항복을 선언하도록 유도를 하셨죠.”
“헤에!”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저희들은 그야말로 대혼란이었습니다. 왕자의 신분으로 어찌 그런 데에 참여를 하시는지 말이지요. 잘못하다 다쳐서 왕의 노여움을 사 이런 행사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생겼지요. 왕 역시 관람을 하다 왕자의 모습을 보고 엄청난 혼란에 빠지셨는지 대련을 중지하라는 둥 어서 데리고 오라는 둥 명령을 내리시다 시작 소리에 땀을 흘리시며 노심초사하셨답니다. 그러다 왕자께서 승리하시고, 다음 대련에서 승리하시고, 계속 승리하다 우승까지 거머쥐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셨지요.”
“햐! 왕도 그렇고 왕자라는 사람, 얼굴 한번 보고 싶네.”
백작의 설명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느낌에 감탄을 연발하며 왕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카인도, 도울도, 란슬로와 지크얀 역시 그런 사람이 있다는 데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말에 살짝 동의를 해 주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치르윈이 웃으며 안경을 치켜세웠다.
“어머, 어머! 제 예감으로는 아마도 이번 그 왕자가 참여할 것 같은걸요.”
“음, 시기를 보면 이번에 참여할 수도 있겠군요.”
“백작님 말씀대로 4년 전이 16살이었으면 금년이 20세이니 자유 토너먼트 쪽에 참여가 가능하겠군요.”
“로열 토너먼트보단 확실히 자유 쪽에 하시겠군.”
치르윈의 말에 백작과 란슬로, 지크얀이 치르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에 백작과 란슬로, 지크얀이 치르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왠지 이번에 그 왕자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내가 참여하게 된다면 왕자라는 사람과 대련도 해 보고, 그리고 여차해서 마족을 끌어……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리스?”
갑작스레 시무룩해지는 내 얼굴을 보던 라휀이 걱정스러운 듯 내 팔을 잡고 물었다. 나는 서둘러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라휀에게 물었다.
“그럼 라휀은 그 왕자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되고 싶어서 참가하겠다고 한 거야?”
“응! 그때 보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4년간 아빠 몰래 꾸준히 연습했단 말이야.”
나의 질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라휀이 두 눈을 반짝였다.
“흠! 백작님, 우리 수도로 언제 출발합니까?”
“아, 모레 출발할 예정입니다.”
“대회 시작은요?”
“수도에 도착까지 7일 정도. 도착한 수 7일 정도 후에 대회가 개최됩니다.”
“그럼 저도 참가해도 되나요?”
수도에 도착해 시간적 여유가 많다는 말을 들은 나는 라휀과 마찬가지로 두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 내 말과 함께 카인도 백작에게 입을 열었다.
“저도 참가합니다.”
“하하,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지요.”
백작의 승낙에 나와 카인은 슬쩍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내 옆쪽의 라휀이 나를 향해 자신을 가리키자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 백작에게 요청했다.
“백작님, 라휀도 한번 참가해 보도록 하는 게 어때요? 그냥 참가하라는 건 아니고 수도에 갈 때까지 지켜보고 실력이 괜찮겠다 싶으면 참가해도 되잖아요. 혹시 알아요? 라휀이 제 2의 왕자처럼 승리해 우승을 거머쥐게 될는지요?”
“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제 2의 왕자가 되어 모두에게 주목받을 수도 있다는 나의 말에 백작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를 접고 승낙을 해 주었다.
백작의 승낙에 라휀은 기뻐 만세를 부르다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양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해 주며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단호히 라휀에게 인지시켜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카인, 란슬로, 지크얀에게 승낙을 받아야 해. 안 그럼 못 보내. 대신 내가 확실하게 왕자 같은 격투술을 가르쳐 주지.”
“우와! 진짜?!”
신나서 팔짝팔짝 뛰는 라휀의 모습에 나는 진짜라고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태권도와 호신술의 잡기 기술을 잘만 가르쳐 주면 다치지 않고 왕자처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란슬로와 지크얀은 투덜거리며 나와 카인을 향해 부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에, 카인과 아리스가 각각 출전한다면 우리는 이번에 참여할 기회가 없겠군.”
“쩝! 결국 또 내후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어머, 어머! 항상 말만 그리하고 대회 전날 도망가는 게 누구와 누구시더라?”
“에? 진짜 그랬어요?”
“그럼요. 배가 아프다는 둥, 날씨가 흐려 옛날에 다친 상처가 아프다는 둥 변명만 수십 가지 나열해서 도망만 치는 걸요.”
도울이 재미있다는 듯이 란슬로와 지크얀을 바라보았다. 치르윈의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웃겼기 때문이다.
키득거리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도울의 모습에 란슬로와 지크얀은 멋쩍은 듯 뒤통수만 긁어 대었다.
제 8장 여행의 길
화창한 날씨였다.
격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네 마리의 큐링이 옹기종기 모여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몰래 숨어 지켜보면서 나는 몇 마리를 가져가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큐링! 푸―!”
많이 있어 봐야 짐만 되고 한 마리론 부족할 듯싶어 나는 두 마리로 결정을 짓고 슬며시 예전 마스테마에게 부탁한 도를 쥐었다.
팟―!
“큐링!!”
녀석들이 열매를 따 먹고 있는 틈을 타 나는 재빨리 수풀에서 뛰어나와 눈여겨봐 두었던 파란색 털의 두 놈만 남겨 두고 나머지 두 마리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놀라 도망가려는 녀석 둘의 꼬리를 재빨리 발로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딜 도망가.”
“큐링! 큐링!”
오늘 오전 뤼튼에서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다.
아침 식사 후 일행들과 함께 마차와 말을 타고 수도로 향하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잠시 짐을 풀고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류현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