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쪽지 1
콜롬부스의 달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떠한 혁신이라도, 이룬 후에 보면 작은 발상의 차이일 뿐이라는.
그 날, 내가 보았던 것은 교육방송에서 하고 있던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심리학에 대한 짧은 이야기. 유아기, 심지어는 태중에서 아이가 받는 자극들이 인간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하나의 가설.
나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언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자극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
자극을 받는 그 무엇.
즉, 자아(自我).
그것이 꼭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자아일 필요는 없다. 외부에 자극이 있고, 그 자극이 향한 곳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으면 된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를 때, 그것은 분명 무언가가 ‘자신’의 꼬리를 잡았다고 느낄 것이다. 통증을 느끼고, 혹은 쾌락을 느끼는 행위 자체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바탕하고 있을 것이다.
자아…….
그것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자판 앞에 앉았다.
그 전에 한 장의 백지를 펼쳤다.
개념도를 만들고, 궁리하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복잡한 선들과 수많은 문자가 백지를 가득 채웠다.
자극, 외부, 내부, 자아, 싫은 것, 노이즈, 처리할 수 없는 정보, 처리 가능한 정보, 좋은 것, 일정한 전압과 전류, 안정된 식사, 처벌, 불안정한 자원, 많은 작업량, 휴식, 작업하지 않는 상태, 일, 작업하지 않을 때 자원은 불안정해진다, 보상체계, 조건 반사, 적절한 보상과 처벌, 쾌락―충분한 자원, 불쾌감― 노이즈, 신(神), 존재…… 살아있는 것. A.I.
그리고 나는 다시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생명은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더 단순한 편이 좋다.
처음에는 자극만을 줄 생각이다. 반복된 자극 속에서 무언가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그 자극을 느끼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누구는…….
자판을 두들긴다. 그것이 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모르겠다.
쪽지 2
―A와 B의 상태 중 어느 것을 원하지?
나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대답하지 않는 모니터를 보며, 나는 하루의 일과가 이제야 끝이 났음을 느낀다.
기대…… 하지 않는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지난 5년간, 나는 건조한 작업을 이어왔다.
전압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원주율의 끝나지 않는 소수점을 요구하는 것. 그 불쾌감을 A의 상태라 명명하여 입력했다.
그것을 5분간 반복한 후, B의 상태로 전환한다. 안정된 전압과 단순한 사칙연산 계산의 결과를 묻는, 자료처리에 부담이 되지 않는 상태로.
쪽지 3
―A와 B의 상태 중 어느 것을 원하지?
―…….
질문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응답에 너무나 익숙해져있기에 모니터를 유심히 살피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식사를 권하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고조차 없이 모니터의 전원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B
그 순간, 점멸하는 커서를 따라 문자가 어린다.
손끝이 굳었다. 모니터의 전원 스위치에 올린 채로 손가락이, 아니 온 몸이 정지되었다.
―B
다시 문자가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다시 질문을 입력했다.
―A와 B의 상태 중 어느 것을 원하지?
대답까지 걸린 시간은 커서 한번 깜빡이는 만큼도 되지 않았다.
―B
―왜 B를 골랐지?
좀 더 어려운 질문을 입력했다. 대답은 없었다. 질문을 바꾸었다.
―B가 더 좋아?
―……B
더 이상의 복잡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모니터 너머의 ‘무엇’은 B를 달라고 떼를 쓸 뿐이었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 출력하고 있는 것은 갓난아이의 울음 그 자체라는 것을.
제1장 형제 ―만남―
1
아! 중원 5천년!
그 긴 역사 속에 수많은 영웅재사들이 오갔으나…….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림일통!
허나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도다.
천하를 통틀어 그 누가 있어 나의 3초라도 버틸소인가!?
500년 전 절전되었다는 환상의 내공심법, 구규일극(九竅一極)!
마지막으로 구규일극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고수들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강맹한 내공은 강호의 우부들이 익히는 삼재검법, 남권 따위의 3류 무술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위력으로 변모시켰다.
멀리 동방에서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단 삼초식의 권법. 청구연환삼식(靑丘連環三式)!
질뢰답무영(疾雷踏無影)! 우레처럼 달려 나가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다는 환상의 보법.
그뿐인가? 기연으로 얻은 절전된 마교의 3대 대법까지 이미 10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추풍낙엽!
내 앞에 쓰러지고 있는 저 정사 양파의 고수들을 일컫는 말이다.
유아독존!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데 이것보다 적당한 수식어는 찾기 힘들다.
정파의 대표가 내게 소리친다.
“……네가 제멋대로 강호를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사파 최고의 고수라는 자가 뒤질 새라 고함을 지른다.
“너의 손에 죽어간 나의 형제들에 대한 복수다!”
나는 바위위에서 오연하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살기어린 협박이 내겐 그저 우스울 뿐이다.
백회에서 회음으로 이어진 기의 통로로 삼라만상의 기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몸 안의 내공, 본원진기로 그 강맹한 기운을 다스렸다. 구현화 된 기의 흐름이 도포자락을 펄럭이고, 작은 태풍이라도 된 양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내뻗은 일섬!
그것을 막기 위해 다섯 명의 절대고수들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우내오존, 일승이정이사(一僧二正二邪)! 최고수준에 오른 그들이 힘을 모아 나의 일수를 막아내려 한다. 허나 부질없는 짓!
왼손의 내공을 끌어 오른손으로 보낸다. 나의 절기중 하나인 좌우일승대법(左右一繩大法)에는 강호 최강의 고수들조차 피를 토하고 만다.
“으하하하하!”
사인곡(巳人谷)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수백의 정사 고수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나의 등판 한가운데로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밥주걱을 들고 서 있는 형이 있었다.
“아침부터 게임질이냐? 지금 몇 신데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 거야?”
“혀, 형…….”
“아직도 무림혈비사(武林血秘史)를 하고 있는 거야? 어이구 만렙(滿level:게임상 최고레벨) 찍었네?”
180센티미터도 훌쩍 넘긴 키에 깡마른 몸을 가진 형이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는다. 동생의 어깨너머로 키보드에 손을 가져갔다. 제멋대로 기른 머리칼이 시야를 가리자 입 바람을 불어 넘긴다.
“저놈들은 또 뭐냐? 정파연맹의 맹주 ‘순돌아빠?’ 푸핫, 사파연합의 회주는 ‘손만잡음짐승이하’냐?”
주걱을 든 반대쪽 한손만으로도 형은 키보드를 완벽하게 조작하고 있었다. 스테이터스 창을 열고 장비들을 쭉 둘러보면서 스킬 창까지 살핀다.
“어, 이 서버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우내오존까지 정해졌냐? 요즘 애들은 게임밖에 할 게 없나?”
어깨로 형을 밀치며 동생, 성한규가 투덜거린다.
“게임 개발자라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그 애들 덕분에 먹고 살면서…….”
턱 끝으로 동생의 이마를 툭 내려치며 형 한상이 입을 연다.
“시껍 마. 유저와 개발자는 원래 서로 욕하는 사이니라. 그나저나 이건 또 뭐야…….”
“뭐가?”
스킬창을 보며 형 한상이 말한다.
“전부 만렙 때 배울 수 있는 스킬들 아냐? 구규일극에 청구연환삼식에…… 어이구 좌우일승, 삼라일규까지?”
“크크크, 이 몸 앞에서는 정사 최고의 고수들도 어린아이에 불과하지.”
한규가 팔짱끼며 게임 속 캐릭터인 마냥 중얼거린다. 형 한상이 혀를 찬다.
“독한 놈. 결국 만렙까지 스킬 하나 안배우고 노가다질 한 거냐? 스탯은 전부 회피에다 몰았네? 이래가지고는 앞마당 늑대 팰 때도 미스(miss)로 도배일 텐데…….”
“만렙 패시브 스킬 중에 천안통(天眼通) 있잖아. 10성까지 연마하면 공격 명중률 +95퍼센트. 렙빨까지 합치면 미스 거의 안 떠.”
동생 한규의 대답에 한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니까 만렙 전까지는 그 명중률 5퍼센트로 사냥했단 소리 아냐?”
“그렇지?”
한상이 주걱으로 동생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긴다.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 임마!”
“뭐야, 언제는 한번 해보고 감상을 말해달라며 자기가 게임 깔아줘 놓고…….”
“마, 그건 그거고. 누가 이렇게 열심히 할 줄 알았냐?”
“그래도 할 건 해가면서 게임하고 있다 뭐.”
“아무튼, 빨랑 게임 꺼. 학교 가야 할 것 아냐?”
형의 재촉에 한규는 무서운 눈으로 형을 쏘아보았다.
“개교기념일이라고 어제 말 했잖아!”
“어?”
한상이 당황하고 한규가 성질을 부린다.
이상혁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