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돌변한 사내의 태도. 그런데 돌변하며 말하는 그 폼이 무척이나 익숙했는데, 설마 보는 눈을 의심케 하는 그는 바로 달천이 아니던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천방지축 단순무식 하던 달천이 정말로 방금 전 매너 좋아 보였던 그 사내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돌이켜 보면 너무도 고달프고 힘든 여정이었어. 그 고생이 바로 오늘처럼 저렇게 어여쁜 아가씨를 만나기 위한 시련이었나 보구나. 달천아! 너에게도 이제 청춘의 황금기가 오는구나. 으흐흐.”
방금 전만 해도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게 예의 바르고 상냥하던 그는 사라지고 음흉하고 방정맞은 달천만이 남아 있었는데,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가 또 다른 수련을 플래너와 함께 시작한 지도 어느새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50년, 결코 짧지 않은 이 시간 동안 과연 어떠한 수련을 했을까?
“으음, 빌어먹을 플래너. 그동안 괘씸했지만 오늘 이후로는 다 용서해준다, 암.”
소녀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달천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자네가 오늘부터 수련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침묵일세.”
“아니, 이봐. 나더러 또 입을 다물라고? 난 그렇게는 못해. 얼마만에 대화할 상대가 생긴 것인데 침묵이라니. 그따위 수련이 어디있나?”
“자네, 장가가기 싫으신가?”
“으으,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하면.”
플래너가 그동안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갖은 예법에서부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말을 아끼라는 것이었다.
“누구나 말을 아낄 줄 알면 어디서나 달변가로 인정받게 되지. 아직 자네는 이해를 못할 것이지만 내 말 뜻을 알게 될 때가 올 걸세.”
하나의 신념을 위해 달천은 배우고 또 배웠다. 그나마 나은 것은 예전엔 혼자였지만 이번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그의 진전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랐다. 하지만 그를 가르치는 선생은 지식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이기에 그가 배울 것 또한 엄청났으며 그로 인해 그 많은 세월이 또다시 흐르게 된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퍼뜩, 달천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돌아서는데, 마치 한 겹 가면이 씌워지듯 방정맞아 보이던 표정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쁜 레이디를 기다리는데 시간의 흐름을 알 수나 있나요. 하하하.”
윽, 가증스러운 놈.
“다행히 어머님이 손님을 모셔 오래요. 만나보고 결정하시겠다고. 저희 엘프들은 일반 사람을 거처에 잘 들이지 않거든요.”
‘허걱! 에…… 엘프……!’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느낄 뻔한 소녀를 다시 살펴보던 달천은 그녀의 귓바퀴가 조금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이런 비극이 있나.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엘프라니. 으으.’
플래너의 가르침에 따르면 엘프들은 자연 친화적 종족으로서, 고고하고 오랜 세월 동안 베풀며 살기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종족이라했다.
하지만 달천은 인간이기 때문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엘프와 인간이 결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아무리 교육을 다시 받아도 그 뿌리가 중원인이었던 달천에게 다른 종족과의 결합은 쉽게 받아들여질 문제가 아니었다.
“아, 엘프님이셨군요. 몰라보았습니다. 말로만 전해 듣던 고귀한 엘프님을 만나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특히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분을 만나니 눈이 다 밝아지는 것 같군요.”
얼마나 철저한 수련을 쌓았는지는 몰라도 내심과는 달리 그의 입술은 기름을 발라놓은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머, 듣기 좋은 말씀을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호호.”
그의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 듯 그녀의 볼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아우! 저 미소, 진짜 미치겠네. 이참에 종족을 떠난 사랑을 해버려?’
그러한 그녀의 수줍은 미소가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뛰게 만들었다.
“전 거짓말은 못합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직은 어리지만 저도 엘프랍니다. 진실과 거짓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요. 당신은 참 진지하신 분이시군요.”
달천은 비록 중원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오게 되자 잔뜩 들떠 있었다. 비록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이지만 이 대륙에도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플래너의 거처를 떠나왔는데 하필 첫 이성과의 만남이 엘프여서 이것
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생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며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는 달튼이라 합니다. 레이디 성함은?”
“저는 아이미라 해요. 그런데 달튼 씨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미는 달튼이라는 사람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자신이 엘프인지라 누구에게든 함부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다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자신들의 거처로 선뜻 데리고 가는 것은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 때문이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마치 존귀한 드래곤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위엄이랄까, 아니면 누구든지 포용해줄 수 있는 광대함이랄까?
아무튼 그런 기운 때문에 거절을 할 수 없었고, 자신을 어리다고 결코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설명했기에 어머니도 호기심이 생겨서 그를 초대하게 된 것이다. 과연 엘프였기에 가능한 느낌이었고 그 느낌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니…….
3
아름다운 연못에는 비단잉어처럼 보이는 물고기가 노닐고 있었다.
나무로 우거진 숲속.
따가운 햇살이 살짝 수줍게 들어와서인지 그 안에는 영롱함이 느껴졌으며, 대지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 포근함이 가득했다. 단지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느껴지는 이곳에 통나무로 지은 듯한 소박한 집이 한 채 보였다.
“저곳이 저의 집이에요. 어머니! 손님 모시고 왔어요.”
한층 밝은 어조로 어머니를 부르는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무척이나 반가운 눈치였다.
“어서 모시고 들어오너라.”
단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푸근함을 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의 내부를 보면 그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매우 정갈하고 소박해 보이는 실내는 가꾸는 사람이 형식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정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어서 와요. 본래 손님 왕래가 많지 않은 곳이라 누추합니다만 편히 앉으세요.”
생각한 대로 소박한 옷차림에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엘프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별말씀을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아늑해 보이는 집은 처음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쁘진 않네요. 호홋.”
달천의 말은 사실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집다운 집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전 엘프들의 대모라 불리는 샤이란이라 해요.”
“아, 엘프님들 중에서도 그 지혜가 하늘에 닿아 있고 대지의 힘을 관장하신다는 그 대모님이셨군요. 정말 영광입니다, 전 달튼이라고합니다.”
“달튼 씨는 말씀을 매우 부드럽게 잘하시는군요. 상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말솜씨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죠. 마치 오랫동안 수련이라도 하신 것처럼 막힘이 없으시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달천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의 머릿속에 플래너가 전해준 지식을 열어보면 엘프들의 대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엘프로 태어난 여성체 중에 날 때부터 정령들과 친화도가 다른 엘프들보다 높아 대지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어야 하며 지혜와 판단력까지 월등해야 비로소 대모로 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다가 막상 만나보니 역시 보통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
다. 잘못하면 자신의 본질까지 드러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과분한 칭찬이시군요. 사실 전 별로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호호. 그렇다고 별다른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미, 저녁시간도 다돼가고 손님도 오셨으니 네가 식사 준비를 하여라.”
“네, 어머니.”
평소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아이미인지라 샤이란은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너, 이 녀석! 정체가 뭐냐. 좋게 말할 때 썩 밝혀라.”
방금 전까지 우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 눈에 핏대를 세우며 달천을 노려보는 샤이란의 모습은 ‘살벌’ 그 자체였다.
“헉!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인간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아닌 자다. 내 앞에서 변명할 생각 마라. 인간인데 너처럼 엄청난 마나를 지니고 있을 자는 없다.”
달천은 아차 싶었다. 플래너와 헤어질 때 그는 마지막 당부라며 마나의 기운을 감추라고 했었다. 너무 엄청난 기운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편함을 겪을 것이라 경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워낙 두뇌가 뛰어난(?) 달천이다 보니 그만 그의 당부를 깜박한 것이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고귀해 보이던 여성 엘프가 어찌 이리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나와 같은 과?’
철저하게 이중성 교육을 받은 달천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아이미가 있는 부엌 쪽을 흘깃 보면서 샤이란은 재촉했다.
“으흠, 대모님. 저는 의도적으로 아이미 씨를 만난 게 아닙니다. 여행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죠.”
“시끄럽다. 그 말이 맞다 해도 넌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아. 좋게 말할 때 대답하지 않으면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아 글쎄, 제가 마나량이 좀 많은 것은 최근까지 수련에만 열중해 와서 그런 것인데 그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달천의 어조에도 짜증이 살짝 섞였다.
“수련만으로 그런 엄청난 마나를 모았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게냐? 넌 틀림없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나를 모았음이 틀림없다.”
“야! 이 할망구야. 대체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내
마나 내가 모았다는데 할망구가 보태준 거라도 있어? 있냐구!”
결국 얄팍하게 포장했던 가식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그의 본성이 드러나고 말았다. 장장 50년에 걸친 수련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뭐…… 뭐시라? 할망구라고?”
그녀가 분노로 발작하기 일보 직전에 상냥한 아이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음식 다 되었어요. 손님 모시고 식당으로 나오세요.”
“오냐. 알았다, 내 딸아. 오홍.”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음성. 그야말로 우아함의 극치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달천은 세상에 다시 첫발을 내밀자마자 엄청난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분명 폭발 직전이었는데 어찌 저리도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아이미 덕에 일단 산 줄 알아라. 식사 후에 밖에서 만나자.
물론 각오는 단단히 하고 나오는 게 좋을 게다.”
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식당으로 향했고, 달천도 어깨를 으쓱하고 뒤따라 들어갔다. 식사시간은 내내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자…….
“아이미, 치우고 있어라. 난 손님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오겠다.”
“네, 어머니.”
누가 봐도 다정스럽게 밖으로 나온 둘은 나오자마자 서로 노려보았다.
“여기서는 곤란하니 따라오너라.”
어느덧 해는 기울고 어슴푸레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얼마를 올라온 것인지 숲의 종족답게 날렵하니 신형을 움직이던 샤이란은 자신조차 호흡이 조금 가빠 옴을 느꼈다. 자신이 이 정도면 뒤에 오는 놈은 아예 쓰러질 정도가 아닐까 싶어 돌아보니, 이 얄미운 놈은 유유자적 뒷짐까지 지고 빙그레 웃으며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역시 보통 녀석은 아니군.’
이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높이 올라가자 정상이 보였는데,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널찍한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 이제 정체를 밝혀라. 만일 거짓을 말하면 용서 없음을 알아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달천의 눈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최근 수련의 성과로 반달 모양의 눈이 자연스러운 미소와 잘 결합되긴 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되고 보니 역시 반달의 눈매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더욱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위엄을 보이려 할 때는…….
“어험! 이봐, 할망구. 난 요즘 마음잡고 살려고 수련까지 혹독하게 한 몸이야. 별로 이런 일로 화내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지?”
플래너가 비록 달천을 만나는 바람에 경박해 보이는 면이 생기긴 했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드래곤 로드였고 그런 그가 가끔씩 위엄있는 포즈를 취할 땐 달천도 은근히 기죽기 일쑤였다. 지금 그런 플래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름대로 근엄한 표정으로 대모를 위압해보려는데 역시 문제는 그놈의 눈매였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감히 할망구 소리도 모자라 이젠 희롱까지 하려 해? 마나량이 조금 많다고 까부는가 본데, 어디 혼 좀나봐라. 대지의 정령왕이시여, 어서 나와 이 건방진 인간을 혼내주소서.”
샤이란은 달천의 그 눈매를 보고 자신을 우습게본다고 착각했다.
그녀는 말릴 틈도 없이 화를 내며 결국 대지의 정령왕을 불러내고 말았다.
콰우우우웅!
“누가 나를 소환했는가.”
엄청난 울림과 함께 등장한 거대한 존재감. 정령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는 정령들의 왕이 등장한 것이다.
“정령왕이시여, 저 무례하고 건방진 인간이 감히 저와 당신을 비난했나이다. 부디 강력하게 처벌하여주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던 정령왕을 비난했다고 누명까지 씌우는 그녀를 보며 달천은 아이미같이 청순하고 순수한 엘프가 과연 진짜 그녀의 딸인지 의심스러웠다.
“우워어, 누가 겁도 없이 나의 계약자와 나를 비난했다고?”
휘감아 돌고 있는 무서운 회오리 속에서 눈으로 여겨지는 번뜩이는 구체가 서서히 움직여 달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허어업! 호, 혹시 다, 달튼 님 아니십니까?”
“어라? 넌 지난번에 플래너랑 정령에 관한 공부를 할 때 왔던 그 땅꼬마?”
“윽, 너무하십니다. 땅꼬마라니요.”
“어쭈, 이 녀석 보게. 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원래 모습으로 현신 안 해? 맞고 나타날래?”
휘리리릭.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