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미의 이 말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졸도해버리고 말았다.
“에잇, 재수 없으려니 미친 연놈들을 상대하게 되네.”
“이봐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봐주자고.”
이런 대화를 하면서 이들은 순간적으로 달천과 아이미 앞으로 날아와 날카로운 검을 휘둘렀고, 이것을 본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퍼퍼벅. 뚜둑. 팡팡!
“케에엑! 으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며 그와 동시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그래도 미친 자들인데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먼지가 걷히자 그러한 동정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허억! 저, 저럴 수가.”
여기에는 기사들이 어째서 저렇게 널브러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 상황을 그나마 유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이미뿐이었다.
“어머, 달튼 씨. 좀 살살 하시라니까요. 너무 심하잖아요.”
처음에는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던 그 말이 코피 터진 놈을 필두로 다리 부러진 놈, 팔 병신 된 놈. 거시기 붙잡고 뒹구는 놈 등을 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다가오면서 으스스한 한기가 들었다.
“으으음, 너희들의 정체가 대체 뭐냐?”
사이먼은 눈앞의 상황이 잠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하급이라 해도 방금 전의 기사 넷은 모두 팔라딘 급이었다. 자신이 싸웠다 해도 물론 이길 수는 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만들어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이미 양, 제비한테 내 족보를 말해도 괜찮은 거요?”
“당연히 안 되죠. 제비들이 얼마나 악착같은데요.”
이때 사이먼의 약삭빠른 부관은 자신의 주인이 화가 머리끝 났음을 감지하고 힘차게 명령했다.
“이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모두 나서서 저것들을 없애버려!”
“와아아아!”
상급 팔라딘인 부관을 비롯해 1왕자의 기사단을 상대하러 나온 무시무시한 병력들이 마치 분노한 해일처럼 두 연놈(?)들을 덮쳐갔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그 수많은 기사들이 동시에 날아가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사이먼 후작이 근위기사단장을 그만두고 낙향했다지만 그가 보유하고 있는 사설 기사단은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을 때부터 소드 마스터 급인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젊은 기사들이 많이 있었고 그가 낙향한 후에도 그를 따라 나선 기사가 꽤 있었다. 게다가 그가 전부터 따로 가르치던 기사들도 실력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에 왕국 내에서도 그의 사설 기사단은
‘철의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 ‘철의 기사단’이 왕자 일행을 납치할 목적으로 그 힘의 6할 이상을 오늘 이곳에 집결시킨 것이다.
이 기사단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완벽한 합격술에 있다. 하나하나가 팔라딘 급인 기사들이 모여서 펼치는 합격술은 소드 마스터 중급에 해당하는 기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것은 거의 사실에 가까웠다.
조금 전만 해도 이스턴 경이 불안에 떨었던 것은 후작 자체도 소드 마스터 급의 기사이지만 그의 기사단의 힘을 알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철의 기사단이 지금 단 두 사람(하나는 엘프이지만)에게 그 무서운 합격술로 날아든 것이다.
중인들은 방금 전에 달튼이 어떻게 운이 좋아 네 명의 기사들을 물리쳤지만 그의 운도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개인의 힘으로 넘어설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아…… 비록 잠깐 본 것이지만 아까운 인재 하나가 죽겠구나.”
1왕자 카라얀은 안타깝게 말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거대한 은빛의 해일이 상대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둘을 덮치는 그때 모두의 생각은 동일했다.
‘난도질당하겠구나. 끔찍하게.’
베고, 찌르고, 가르고, 치고 빠지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날 이 순간…….
짜짜자자짜악!
챙그랑, 챙그랑…….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 소리 전문가에게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아, 저 소리는 따귀 맞을 때 나는 소리와 칼 떨어질 때 나는 소리입니다.’
라고 대답할 게 분명한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다. 이질적인 소리에 급하게 그곳을 바라보던 중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짧은 시간에 모두 드러누웠다. 아니, 둘은 서 있었다. 뺀질뺀질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달천과 그 옆에서 기지개를 펴는 아이미.
병사들이 집결할 때를 위한 장소인 듯한 넓은 공터와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잘 닦인 도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고요했다.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소리가 날 정도로 사방은 침묵 속에 있었다.
휘이잉.
정적 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쯔쯧, 기사란 작자들이 고작 귀싸대기 한 대에 자빠지네그려. 이렇게 허약해서야 어디 써먹을 데나 있을까? 안 그래요, 아이미 양?”
귀싸대기 한 대.
이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팔라딘 급 기사가 귀싸대기 한 대에 기절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지금 눈앞에 철의 기사단으로 불렸던 기사들이 부챗살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기절해 누워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이 분명했다.
“하긴 제비가 데리고 다니는 기사들이니 오죽하겠누. 클.”
모두의 놀람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노옴!”
웅호한 기합소리와 함께 참고 참았던 사이먼 후작이 검을 치켜들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의 검이 찬란한 오러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 과연 그가 소드 마스터 경지에 들어섰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앗! 조, 조심해요!”
멍청하게 서 있는(다른 사람 눈에 보이기를) 달천을 보며 카라얀 왕자는 힘껏 외쳤다.
까앙! 빠악!
딱 한방이었다. 딱 한방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사이먼 후작이 멋들어지게 날아오며 자신의 마나를 몽땅 집중해서 내리쳤던 칼은 달천의 주먹과 부딪치는 순간 반 동강이 났고, 이에 멈추지 않고 날아간 주먹에 맞은 그의 면상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이 수많은 사람들은 집단으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이런 일이 현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귀싸대기와 주먹.
한나라 왕실의 근위 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이먼 후작과 철의 기사단이라 불리며 전설을 이뤄가던 강력한 기사단이 단지 이 두 가지로 박살났다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현실에 맞는 이야기라 하겠는가.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역시 일국의 왕자답게 카라얀 왕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뜻하지 않은 은혜를 입었군요.”
“킁, 은혜는 무슨. 난 원래 나한테 대드는 놈은 용서 못하는 체질이야.”
그러면서 슬쩍 이스턴 경을 바라보았다.
찔끔. 그의 시선을 받자 이스턴 경은 안절부절못했다. 비록 충성심의 발로였지만 방금 전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자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는가. 평소 간담이 크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이 순간 오금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도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당신의 이름을 말해줄 수 있나요?”
달튼도 눈앞의 이 소년이 왕자 신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상대가 어떤 신분이든 거리낄 것이 없었다. 중립계의 지존으로 불리는 플래너의 친구가 그의 신분이나 마찬가지이니 감히 누가 그와 신분을 논할 것인가.
그런 그였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 소년이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하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아우가 될 사람이니 알려주지. 내 이름은 달튼이야.”
이스턴 경을 비롯해서 왕자 측 일행들은 끝까지 고귀한 왕자님한테 반말을 찍찍 하는 그가 괘씸했지만 그 무섭던 대장마저 입도 벙긋 못하는 터라 끽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역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이 진리는 진리였다.
“이쪽의 레이디 분은 엘프이신 듯한데…….”
“반가워요, 전 칼슨 산맥의 엘프 마을에서 온 아이미예요.”
“두 분 다 반갑습니다. 전 슬리버 왕국 제1왕자인 카라얀 폰 도히치리히입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오늘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 모르겠군요.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낮추는 듯하지만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으며 온몸에 기품이 넘치는 것이 일국의 왕자다웠다.
“어허, 난 격식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오늘 일은 의도했던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나.”
어쩐 일로 겸손하게 말하며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폼이 조금은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사실 그의 속마음은 따로 놀고 있었다.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저희와 동행하실 수 있을까요? 신세도 졌는데 어떤 식으로든 갚고 싶습니다.”
달튼은 그래도 명색이 왕자인데 만일 신세를 갚으려 마음먹었다면 혹시 횡재라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이미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어머, 왕자님. 신세라니요. 그리고 여기 계신 달튼 씨는 이런 일로 번잡스럽게 하는 걸 싫어하시니 신경 쓰지 마세요. 호호.”
‘으, 그놈의 할망구가 동행하라 할 때부터 찝찝하더니만 날이 갈수록 내 일을 방해하네그려. 어휴.’
보는 눈이 많으니 내색은 못했지만 그의 속은 뒤집어지고 있었다.
“아하하. 맞네. 난 그런 거 싫어하니 신경 쓰지 말게. 다만…….”
“다만 무엇이지요? 말씀만 하세요.”
“음, 다른 건 필요 없고 혹시 주변에 어여쁜 아가씨 있으면 하나…….”
“달튼 씨! 지금 우린 서둘러 가야 하잖아요. 뭐 해요? 어서 가요.”
“으응, 알았어요. 가요, 가면 되잖아요.”
속으로야 별소리 다 하지만 아이미에게 꼼짝도 못하는 달천이었다.
“노, 농담일세. 우린 바쁘니 이만 가네.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보세나. 저들의 뒤처리는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죽진 않았지만 아마 한 달은 열심히 요양해야 걸어 다닐 걸세.”
달천과 아이미가 이런 말을 하며 함께 돌아서는데,
“으…… 으……음…… 자……자……까아.”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서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긴 하지만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뒤를 돌아보았더니 사이먼 경이 입이 묵사발 나서 더듬으며 겨우 뭔가 말하고 있었다.
“잠깐 서라고?”
끄덕끄덕.
“왜? 아직도 볼일이 남았나?”
“대……체…… 다…… 다…… 당……신…… 저…… 정……체……느……는?”
힘겹게 물어보는 사이먼,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는데 달튼은 매정하게 단 한마디로 대답했다.
“나? 그냥 지나가는 사람.”
꼬르륵.
달튼의 대답과 동시에 기절하고 마는 사이먼이었다.
제5장 시작되는 어둠의 전조, 그러나……
1
플래너는 요새 하릴없이 뒹굴고 있었다. 달천 때문에 수면기에 접어들기를 포기했던 터라 폴리모프도 푼 채 본신으로 그 넓은 레어를 좁아라 뒹구는 것이 유일한 취미가 되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이 처음으로 친구로 인정했던 달천이 잘 적응해 나가는지 체크해보는 게 고작이었다.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뒹굴어 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라. 누구라도 보고 있자면 답답해서 울화통이 터질 짓거리일 텐데 정작 당사자는 콧소리까지 흥얼거리며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긴 그가 드래곤이라는 특이한 생물이니 사고방식이 우리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도 한참을 뒹굴다가 마법통신구슬을 꺼내 놓고 말했다.
“아스마엘, 보고해보게.”
“넵! 평안하셨습니까, 위대하신 플래너 님. 여전히 아침 햇살은 밝고 그 밝은 빛이 마치 플래너 님을 보는 듯합니다. 날씨는 에,가만있자…… 좀 맑은 듯하지만 조만간에 비가 올 듯도 하고, 습도는 약간 높은 편이라 인간들 같으면 하루가 짜증스러울 수 있는 어쩌고저쩌고…….”
플래너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특별히 이번 일에 적임자라 생각한 아스마엘은 블랙 드래곤이다. 워낙에 민첩한 데다가 은밀한 행동 등 이번 일에 적임자임에는 분명한데 유일한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과 같이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저렇게 말이 많으면서 어떻게 그런 민첩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너…… 지금부터 딱 5초 줄 테니 당장 내 레어로 날아와라.”
“넵, 당장 가겠습니다. 위대하신 플래너 님을 뵙는데 제가 어찌 시간을 지…….”
“당장 날아왓!”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래너의 레어 한곳에서 밝은 빛이 빛나는가 싶더니 짙은 검은색 머리에 기름을 발라 붙인 듯 귀에 딱 붙이고 앞머리는 올백으로 쓸어 넘긴, 척 보기에 이십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너 이노무시키, 내가 보고할 때는 간단명료하게 하라고 했어, 안했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분노한 플래너의 꼬리가 날아갔다.
퍼억!
철푸덕!
“시, 시정하겠습니다.”
엎어짐과 동시에 벌떡 일어난 아스마엘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다시 보고해봐.”
“넵, 달튼 씨는…….”
퍼퍼퍽.
“아니, 달튼 님은 방금 전에 바알산에 들어가셨습니다. 여전히 일행은 엘프족 여아 하나이고, 달튼 님과 엘프 여아는 여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달튼이 도와준 왕자 일행은 어디로 갔나?”
“넵, 그들은 말과 마차로 이동하는 데다가 급하게 이동했기 때문에 방금 전에 바알산을 벗어나 관도에 접어들었습니다.”
“흠, 자네는 내가 자네에게 너무한다고 생각하는가?”
“아,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내가 자네에게 조금 심하게 하는 것은 자네를 아끼기 때문일세. 장차 우리 드래곤 일족의 기둥 역할을 해야 될 자네가 경망스러워서야 되겠는가.”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