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드래곤답게 정확한 추측을 하는 아스마엘이었다.
“내 생각 역시 그러네. 결국 마왕의 첫 번째 카드가 달튼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것이겠구먼.”
“그런데 플래너 님,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달튼 형님의 검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아스마엘의 말에 플래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겨우 언데드 병사들을 상대하는 데 달튼이 검을 썼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 빠른 검술에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세밀하게 말해보게.”
달천이 검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플래너는 말했다. 아스마엘은 오늘 달천이 검을 이용해 적들을 상대한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했다.
“쯧, 어지간히도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구만. 자네는 달튼의 검술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나? 그 정도라면 나도 충분히 가능하다네.”
“아니, 그럼 달튼 형님이 그보다 더 강하단 말씀이십니까?”
믿기지 않는 플래너의 말에 아스마엘은 목소리가 조금 격앙 되었다.
“만일 달튼이 진정한 검술을 펼쳤다면 그들을 처리하는 데 단 일 검이면 끝났을 걸세.”
플래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져가는 아스마엘이었다.
“플래너 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달튼 형님께서 저녁식사 후에 잠시 보자고 하셔서…….”
평소 같으면 얼마든지 핑계를 대가면서 버티고 있었겠지만 이제 플래너보다 달천이 더 무서운 아스마엘이었다.
4
발랑까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늘의 감동이 너무 커서 도저히 잘 수가 없는 것이다. 백여 명의 사람들 속에서 유독 자신을 지목한 위대한 달천 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맴도는 듯했다.
‘발랑까, 자네 검을 좀 빌리세.’
이 한마디. 그리고 그때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던 동료들의 눈빛들.
사실 발랑까는 이름이 그래서인지 못생겼다. 아니,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누구든지 한 번 보면 외면을 하든가 웃음을 참지 못하든가 하는 정도의 외모였다.
어느 세계나 사람들은 인물이 너무 못나면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왕따 당하는 현실을 극복해보려는 그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늘 동경해오던 기사단에서도 차별은 있었다. 같은 기사라도 그는 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고 다들 기피하는 임무를 주로 해왔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달천의 그 한마디는 삶의 희망이 되었다. 조금 전 성에 돌아올 때까지도 동료들은 발랑까 주변을 맴돌았다.
‘자네, 달튼 님이 부르실 때 기분이 어땠는가?’
‘자네 혹시 달튼 님과 원래 아는 사이인가?’
온갖 질문과 관심을 보이며 그를 대하는 동료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발랑까는 행복했다. 따돌림 1순위였던 그는 이제 동료들 사이에 인기인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빙그레 웃던 그는 갑자기 인상을 쓰며 혼잣말을 했다.
“에잇, 기분 째지는데 하필 이럴 때 오줌이 마렵다니.”
발랑까의 막사에서 화장실은 꽤 떨어져 있다. 하지만 어차피 한밤 중인지라 그는 사방을 살펴보다가 으슥해 보이는 숲속으로 가서 시 원하게 볼일을 보고 말았는데…….
“아악! 갑자기 이 뜨거운 물은 뭐야!”
숲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며 외치는 게 아닌가. 기절하게 놀란 발랑까는 그만 오줌을 누던 자세 그대로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아니, 이 인간은 대체 뭐여?”
마치 깡통으로 땅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낯선 자는 말했다.
“으으, 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 나는 츠부야라고 해. 네크로맨서지.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에 발랑까는 자신의 흉측한 자세도 잊고 인사부터 했다.
“난 발랑까요. 그런데 네크로맨서라면 오늘 잡혀 들어온 자들 중 하나?”
“응? 그건 무슨 소리지? 야, 말하는 건 좋은데 제발 바지나 올리고 말해라. 남들이 보면 내가 널 덮치는 줄 알겠다.”
츠부야의 말에 벌떡 일어나며 바지를 추켜올리는 발랑까의 모습은 달빛에 반사된 얼굴과 함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으크큭, 너 무지 웃기는 놈이구나.”
하지만 이렇게 웃고 있는 츠부야의 모습도 남의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머리털 다섯 가닥에 화려한 그 입이 웃을 때마다 씰룩거렸던 것이다.
“캬하하! 너도 만만치 않은데.”
뚝!
갑자기 웃음을 그친 그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암만 봐도 너무 웃기게 생겼어.”
오밤중에 이렇게 황당하게 만나도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 네크로맨서인 게 사실이면 어서 도망가야 돼.”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던 것일까?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왜지?”
영문을 모르는 듯한 그의 질문에 발랑까는 친절하게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헉! 벌써 왁센이 일을 저지른 모양이네.”
“네가 그를 어떻게 알지?”
발랑까의 의심스러운 눈치에 정색을 하고 대답하는 츠부야였다.
“사실 그는 나와 어릴 때 친구야. 그가 제정신이라면 절대 이런 큰일을 겁 없이 저지를 사람이 아닌데…….”
츠부야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그자가 제정신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는 지금 마왕의 지배를 받고 있어.”
“헉! 마, 마왕의 지배를?”
발랑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봐, 그 말이 사실임이 틀림없나?”
확인을 하는 듯한 물음에 츠부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틀림없어. 며칠 전에 내가 똑똑히 봤거든.”
츠부야의 확신에 찬 말에 발랑까는 이 일의 심각성을 느꼈다. 아무리 발랑까가 가끔 바보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바보가 기사단에 들어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바보처럼 보이는 것은 너무 착하고 순수하기 때문일 뿐이다.
“음, 어째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실은 내가 생긴 게 이런 데다가 네크로맨서면서도 주술실력이
형편없다 보니 같은 부족사람들한테도 왕따를 당하거든. 이 사실을 알렸는데도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주는 거야! 휴우.”
침통한 듯 말하는 츠부야를 보면서 발랑까는 그 심정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늘 일 때문에 그나마 나아졌다 해도 그 역시 항상 왕따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카운티 영지 기사들에게라도 이 일의 심각함을 말하려고 왔는데 아까 성 입구에서 말 한마디 못해보고 쫓겨났어.”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발랑까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 이제부터 나랑 친구 하자.”
감정이 북받친 발랑까의 말에,
“넌 가만 보니 기사단의 일원 같은데 나 같은 네크로맨서와 친구하다니, 네가 너무 손해 아닌가?”
오늘 처음 만났지만 호감이 듬뿍 가는 발랑까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는 츠부야였다.
“친구를 사귀는 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난 이제부터 너를 친구로 여길 테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라.”
“고, 고마워, 친……구.”
아무리 외모 때문에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이런 모습은 실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런데 친구,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츠부야의 걱정 어린 말에 발랑까는 큰소리를 쳤다.
“넌 아무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내가 이래 봬도 엄청난 분과 친분이 있거든.”
머릿속에 달천을 떠올리며 큰소리를 치는데…… 말 한마디만 나누면 엄청난 친분이 생기는 걸까?
“내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분께 말씀드려서 이 문제를 상의하도록 주선해볼게.”
자신 있는 발랑까의 말에 그제야 안심하는 츠부야는 자기가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몰래 같은 처소에서 밤을 샌 발랑까와 츠부야는 내성 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발랑까. 이렇게 일찍 어딜 가는가?”
“응, 달튼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가는 중이야.”
동료기사의 인사에 손을 흔들며 대답하는 발랑까였다.
“억, 그럼 조심해서 갔다 오게나.”
이 동료는 발랑까 옆의 수상한 인물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달천의이름이 나오자 바로 보내는 것이었다.
한편, 이제 막 아침식사를 마친 달천 일행들은 접견실에 모여 앉아 식사 후 여유를 만끽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달튼 님, 기사 한 명이 달튼 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경비기사의 말에 달천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하라.”
잠시 후 기괴한 모습의 괴인과 발랑까가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던 중 그들의 모습이 확인되자마자…….
“푸하하하! 진짜 웃기게 생겼네.”
아스마엘의 웃음을 시작으로 장내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둘이 함께 들어오자 보는 것만으로도 참지 못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당황한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이런 분위기일 줄 몰랐던 츠부야는 발랑까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웃으면 저분들이 민망하시잖아요.”
마음 착한 아이미의 말이 있었지만 그들은 달천의 눈치까지 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모르자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발랑까와 알 수 없는 괴상한 놈의 등장으로 자신의 기사단 전체가 망신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살기에 가까운 눈빛으로 발랑까를 노려보았는데 이를 접한 발랑까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단지 츠부야의 말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온 것 뿐인데…….
하지만 이때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던 달천이 무슨 생각에서 인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이야, 이거 발랑까 군 아닌가. 이 시간에 날 찾아오다니 정말 반갑군그래.”
마치 친한 친구를 맞이하듯 말하는 게 아닌가. 일동은 이 소리와 함께 웃음을 뚝 그쳤다. 발랑까가 혹시 달천과 절친한 사이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에 감히 더 웃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 다 이리 오시게. 모르자크, 미안하지만 여기 차 두 잔만 더 가져오게 해주게.”
친절하게도 달천은 차까지 시켜 주는 것이다. 이에 발랑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감동이 일어났다.
“다…… 달튼 님, 너무 과분한 대우이십니다요. 저같이 모자란 사람한테…….”
행여 자신 때문에 달천이 비웃음이라도 당할까봐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더욱 낮추는 발랑까였다.
“허어! 누가 자네보고 모자란다고 하던가. 그런 자가 있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슬쩍, 처음에 웃었던 아스마엘을 쳐다보며 달천은 단호히 말했다.
아스마엘은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험험, 맞습니다. 두 분이 어떻다고 모자란단 말입니까.”
잽싸게 맞장구치는 그였다.
“난 어제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네. 다들 기세가 꺾여 있었는데 자네만큼은 투지를 불사르며 싸우더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네의 검을 빌렸던 것일세. 기사는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진짜 멋진 기사는 자네처럼 전장에서 물러설 줄 모르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를 가리키는 것일세.”
달천의 말에 발랑까는 그동안 어릴 때부터 쌓여 있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다, 달튼 니임! 어허헝!”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발랑까였다.
그의 눈물에 장내는 모두 숙연해졌고, 아이미의 눈에는 달튼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 뿌듯함의 눈물이 조용히 흘러 내렸다.
그랬다. 그는 이런 사람이기도 했다.
5
아스마엘이 영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써먹을 데가 있었다.
바로 마왕의 금제 때문에 얼이 빠졌던 왁센을 대체 어떻게 했는지 제정신이 돌아오게 한 것이다.
“흠, 아스마엘. 자네도 쓸 데가 있긴 있군그래.”
놀랍다는 듯한 달천의 말에 아스마엘은 우쭐해졌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저도 드래곤입니다. 남들은 드래곤이라면 껌뻑 죽는다고요. 제 능력으로 마왕의 금제 정도를 푸는 것은 식은 죽 먹기거든요. 특히 저는 저주나 주술에 관해서 연구를 좀 해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형님께선 드래곤들을 너무 쉽게 보시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래 봬도 샤벨 님께서 이 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생명체로 창조하셨단 말입니다.”
슬슬 아스마엘의 열변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었다.
달천의 눈이 반달모양에서 세모꼴로 바뀌는 것을 눈치 챈 아이미가 아스마엘을 보며 눈짓을 했다.
“아스마엘 오빠.”
그럼에도 알아차리질 못하자 아이미가 마침내 슬며시 불렀는데 모처럼 입을 놀리기 시작한 아스마엘은 불행히도 이를 듣지 못했다.
“형님께서 자꾸 이 동생을 너무 무시하시면 이는 창조신이신 샤벨님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또…….”
퍼억! 퍼퍼퍽!
“입 다물고 카라얀 왕자나 모셔와.”
“눼…….”
결국 오늘 역시 본전도 못 찾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나가는 아스마엘이었다.
잠시 후, 카라얀 왕자가 아스마엘과 함께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응, 앉으시게나.”
달천은 어찌 되었든 중원 출신인지라 카라얀 왕자를 동생으로 삼긴했지만 그가 한 나라의 왕자임을 감안해 그나마 존중하는 말투를 썼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왁센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마왕의 두 번째 카드가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달천의 말에 문득 짚이는 게 있는지 잠시 뜸을 들이는 왕자였다.
“그래, 자네의 짐작처럼 현재 왕실의 누군가 핵심인물이 마왕의 두 번째 카드인 것 같네. 아마 그자가 자네가 여기 올 때 습격을 지시하고 자네를 납치하려 한 것 같네.”
달천의 말에 아픈 표정을 지으며 왕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동생 측근 중 하나인 듯싶습니다.”
“맞았네. 왁센의 말로는 그의 이름이 타솔인가 타올인가 그러는 것 같았네.”
“으음, 역시 타솔 공작 그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왕자는 달천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