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보아하니 아직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데 죽이는 것은 조금 그렇고 잠시의 교육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나게 해야겠구나.”
날아가서 거의 실신 지경이 되었던 자이루는 눈이 시퍼렇게 멍 든 채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방자한 놈 같으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행패냐.”
“왕자, 저 녀석이 누구냐?”
“네, 타솔 공작의 큰조카이며 왕실 내군의 대장을 맡고 있는 자입니다.”
“호오, 그래? 겨우 내군의 대장 따위가 왕자한테 무례하단 말이지.”
끝말이 채 다 나오기 전에 어느덧 자이루 코앞에 선 달천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넌 일단 가볍게, 말하는 법부터 배우자.”
빠박! 퍼퍽! 찰싹찰싹!
불과 눈 깜짝할 시간에 수십 대는 얻어터진 자이루는 기절도 못하는 상태였다. 달천이 힘을 조절해가며 정신을 잃지 않고 고통만 느껴지게 패고 있기 때문이다.
“으악! 사람 살려! 거기 누구 없느냐. 미친놈이 사람 죽인다아!”
그의 비명에 인근에 있던 경비병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딱 벌렸다. 분명 궁내에서도 권력의 핵심에 있는지라 평소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자이루가 생전 처음 보는 자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심은 고소하더라도 일단은 제지해 보는 그들이었다.
“멈춰라. 웬 놈이냐.”
칼을 빼 들고 달천을 내리칠 듯한 자세를 잡는데,
“너희들 눈엔 내가 보이지도 않느냐.”
아직은 어린 목소리이지만 위엄이 넘치는 호통이 나왔다.
“헉! 왕, 왕자님.”
“자이루는 나에게 무례를 범했다. 그래서 지금 교훈을 주는 것이니 나서지 말라.”
병사들은 아무리 자이루가 무섭다 하더라도 왕자가 직접 명하는데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자이루는 얻어맞고 있었는데 이제는 비명 지를 힘도 없는 듯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제야 손을 멈춘 달천이 말했다.
“이 정도에 엄살을 떨기는, 그나마 내가 마음이 좋아서 이 정도로 끝내는 줄 알아라.”
자이루는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직도 비몽사몽을 헤매며 비틀거렸다. 명색이 소드 마스터 입문 단계에 이르는 자신이 생판 알지도 모르는 놈한테 이렇게 맞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새 누가 가서 고자질은 했는지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며 수십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날렵해 보이는 자가 장내에 들어섰다.
“대장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부관, 말이 필요 없다. 저 녀석을 당장 죽여라.”
자신들의 대장이 눈이 어디고 코가 어딘지 모르게 뭉개진 채로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칼을 빼 들던 그들은 그제야 왕자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뭣들 하느냐. 늦장 부리는 놈들은 내가 가만 안 두겠다.”
X개도 제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던가. 다 죽어가던 자이루는 자신들의 부하가 나타나자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저자를 쳐라!”
자이루의 더러운 성격을 아는지라 좀 찝찝하긴 했지만 부관은 공격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멈춰라! 다들 왕궁 안에서 뭣들 하는 짓이냐.”
이때 날카로우면서도 결코 천박하지 않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장내는 잠시 조용해졌다.
“포미아 누님.”
“카라얀 왕자, 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
마치 얼음의 조각을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단아하면서 기품이 넘치는 그녀는 포미아 공주였다.
“자이루가 저에게 무례를 저질러 형님이 잠시 교육을 시키던 중이었습니다.”
“형님이라니, 무슨 말이냐?”
살짝 아미를 찌푸리는 그녀는 갑작스러운 동생의 말에 당황 했다.
어느 누가 왕자의 형으로 불린단 말인가.
“어차피 누님께 말씀드리러 가는 중이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드리겠습니다.”
카라얀 왕자의 말에 포미아 공주는 동생의 현명함을 일단 믿었다.
“그래, 알았다. 자초지종은 조금 후에 듣자꾸나.”
차분한 어조로 말을 하던 포미아의 눈이 달천에게로 가서 머물렀다.
“그런데 저분은 도대체 누구시냐? 성함이라도 알아야겠다.”
어쨌든 장내 상황의 정리를 위해선 그의 이름이라도 알아야겠다고 판단한 포미아 공주가 이렇게 묻고 있는 동안에도 달천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달튼이오.”
씨익.
제 딴에는 멋진 미소였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다정한 오누이 느낌의 그림이었다. 오른쪽 벽면 한가득 차지한 이 그림은 인물들이 마치 실제로 정원에 서 뛰어놀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림에 문외한 이랄 수 있는 달천이 보기에도 한참 시선을 끌 만큼 아름다웠다.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네요. 혹시 저 둘은 공주님과 카라얀 왕자?”
은근슬쩍 자신도 그림에 조예라도 있는 듯 그럴듯한 자세로 바라보며 한마디 하는 달천이었다.
“네, 맞아요. 왕자가 좀 더 어렸을 때까지는 제가 많이 돌보았거든요.”
포미아는 자신의 거처를 방문하면서 첫마디로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고급스러운 테이블이라든지 또는 방주인에 대한 칭찬이라든지 아니면 업무적인 이야기 등을 먼저 했다. 그런데 달천이 그림부터 주제삼아 이야기를 꺼내자 어쩐지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하하, 꼭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그림 속의 남매인 듯한 두 사람이 무척 가까운 듯하며 생동감 있는 배경 등이 보통 솜씨 같아 보이질 않아서요.”
달천이 이렇게 말할 때 눈치 없이 끼어드는 자가 있었으니,
“공주님, 저 그림을 그린 화가가 혹시 볼로테르 아닌가요?”
그는 바로 잘난 척의 일인자 아스마엘이었다.
“아, 저 그림의 화가를 아시다니 대단하신 분이네요. 맞아요. 저 그림은 저의 그림 스승이신 볼로테르 님이 그리신 거예요. 저 그림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셨죠.”
스승이 그리운 듯 사르르 눈을 감으며 대답하는 포미아였다.
“아마 그는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떠나셨을 겁니다. 저도 그분과 친분이 있거든요.”
아스마엘의 이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볼르테르는 사실은 유희 중인 블랙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어머! 너무나 반갑네요. 스승님의 지인이시라니, 스승님이 떠나신 후 많이 그리웠는데 이렇게 지인이라도 만나 뵈니 기쁩니다. 혹시 스승님의 소식은 아시는지요?”
“요즘은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못 만난 지가 3년은 넘은 것 같군요.”
순식간에 대화 주체가 아스마엘로 바뀌자 달천의 몸에서 서늘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누님, 두 분의 대화는 조금 있다가 하시고 우선 형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시지요.”
달천의 분위기를 눈치 챈 카라얀 왕자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스승님 지인이신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전 아스마엘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공주시여.”
자아도취에 점점 빠져들던 아스마엘은 이때 잠시 후에 자신에게 닥쳐올 후환을 몰랐다.
“네, 아스마엘 님. 나중에 다시 한 번 꼭 들러주세요. 오늘은 우선 왕자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이걸로 아스마엘의 보충교육이 결정되었다. 물론 달천만 아는 결정이지만.
“너무 죄송합니다. 초대해놓고 제 개인적인 일만 이야기했네요.”
확실히 공주라는 지위는 타고나는 것인 듯 품위가 자연스럽게 넘치는 포미아 공주는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예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공주님께서 스승을 그리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기만 합니다.”
달천은 평소와 달리 나름대로 체면을 지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거처로 손님들을 모신 것은 아까 카라얀 왕자의 말 때문입니다. 궁에서 부왕님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그가 형으로 모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거든요.”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도가 약간 달라지며 진중해지는 포미아였다.
“물론 여기 계신 분이 최근 명성이 자자하신 달튼 님이라는 것에도 놀라긴 했지만요.”
포미아의 말에 카라얀 왕자가 나섰다.
“누님, 제가 이분을 형님으로 모시게 된 것은…….”
카라얀 왕자는 이제까지 달천을 만나서 있었던 이야기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그 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심정까지 들어가 있었으며 자신의 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으리라는 결심도 있었다.
“아……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타솔 공작, 그가 권력욕에 설마 1왕자까지 노릴 줄이야.”
카라얀 왕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시각각 표정의 변화를 보이던 포미아 공주는 이야기가 끝나자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포미아 공주는 최근 들어 수없이 많은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달천에 대해 왕실 정보담당에게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실력이 그랜드 마스터 급에 이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달튼 님, 당신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카라얀 왕자를 동생으로 삼기로 결심했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포미아 공주였다.
“흠, 어떤 마음이라……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은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 제가 왕자를 처음 보았을 때 어린 나이에도 사물을 공평하게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가 이렇다 하고 결론지었을 때에도 그는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지요. 이것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평소 뚜렷한 가치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본래의 그답지 않게 무게를 잡으며 말하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공주님은 제가 카라얀이 왕자이기 때문에 접근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포미아 공주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글쎄요. 아직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그러나 그런 면이 아주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 힘드네요.”
포미아 공주의 말에 달천 일행들은 짐짓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나 달튼은 아무나 동생 삼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가능하지요. 여기에서 자격이란 그의 지위가 아니고 그의 인격입니다.”
어떻게 보면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듣는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포미아 공주도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두 분 말씀 중에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던 아이미가 말을 꺼냈다.
“아, 엘프님이시군요. 말씀해보세요.”
포미아 공주의 말에 아이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달튼 오빠는 그동안 제가 보기에 지위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엘프들은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만 인간을 오빠라 부르진 않지요. 엘프들은 진실을 직시하는 눈이 있습니다. 제가 오빠로 모시게 되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달튼 오빠는 세상 누구보다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요. 어떻게 보면 힘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뭐가 아쉬워서 굳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겠습니까. 오빠는 카라얀 왕자님을 오히려 도와주러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말은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뜻에는 수틀리면 그냥 갈 수도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또한 얼마나 달천을 믿고 있는지 그 정도를 나타내었다.
“그렇군요. 그 말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을 말씀드리지요. 벌써 나와 카라얀은 형과 동생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마디로 남자대 남자로서 그 뜻이 통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결정은 불변인 것이니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상관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포미아 공주는 아직도 달천이 왕자의 형이라는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듯 말을 이어가려는데 도중에 말을 자르고 단호한 어조로 달천이 말했다. 그와 함께 달천의 몸에선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위엄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어설피 누가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드래곤 피어처럼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힘이었다.
실내는 순간 고요해졌다.
드래곤 일족인 아스마엘이나 감정이 없는 듯하던 샬론까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미아 공주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해보았다. 처음 그녀가 회랑을 나섰던 것은 감히 궁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서였고, 낯선 자가 방금 다녀간 자이루 경을 죽도록 팬다는 시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원래부터 밥맛없는 자라고 경원시하긴 했지만 그의 배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해오던 공주 입장에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지는 몰라도 잘한다는 응원을 하게 되었는데, 카라얀 왕자도 같이 있다는 말에 부랴부랴 나갔던 것이었다.
그녀가 막 회랑에 도착할 때는 그 꼴 보기 싫던 자이루가 얼마나 맞았는지 인사불성이었고 그에 비해 낯선 자는 무척이나 즐겁다는 태도로 있었다.
하지만 곧 들이닥친 자이루의 부하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나선 것이었는데 그 낯선 자가 이름을 밝히자 그곳에 있던 모든 기사들의 눈에 흠모의 빛이 일어나며 그 자리에서 부복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순간, 직감이랄까, 어떤 기대감이 생겼던 포미아 공주였다. 최근 급부상한 영웅에 대한 소문은 공주도 숱하게 들은 터였다. 인간 한계의 끝이며 꿈의 경지라는 그랜드 마스터로 벌써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 카라얀 왕자의 형이라는 사실에 맘속으로는 살짝 기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일국의 공주 신분 아닌가. 보통 사람들처럼 그때그때 감정을 나타내기엔 너무도 엄격한 교육을 받은 탓도 있고 바로 도움을 청하기엔 너무 속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냉정하게 보이려 했던 것이다.
한데 지금 그의 전신에서 퍼져나가는 저 위엄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심지어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보일 수 없는 위엄에 그만 다리가 다 떨릴 지경이었다. 당연히 이것이 달천의 고도로 계획된 연출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으니 연약한 소녀의 의지만으론 감당이 어려운 것이었다.
“제가 너무 속 좁게 생각한 것 같군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용서를 비는 포미아 공주를 보면서 달천은 처음으로 시도해본 플래너의 가르침 중 ‘여성체 꼬리 내리게 하기’편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내용의 요체는 이랬다. ‘여성체가 계속 믿음을 갖지 못할 때는 거만한 자세로 입술 끝을 말아 올리고 약간의 마나를 사용해서 힘의 우위를 드러내며, 마치 화를 내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꼬리를 내리면 바로 당신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주라’는 내용이었다. 일명 ‘겁주고 달래기’라고 부르기도 하는 최고의 비법이었던 것이다.
결과에 만족한 달천은 이 비법을 두고두고 써먹어야겠다는 굳은 다짐까지 하고 있었으니, 앞날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제가 가야 할 길은 따로 있습니다. 굳이 왕실까지 온 것은 아우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기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일 뿐이지요.”
당연히 지상최대 목표인 장가를 가야 하니 갈 길이 따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그가 뭔가 원대한 꿈이 있는가 보다 하고 착각하게끔 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카라얀 왕자, 참 좋은 분을 형으로 모셨구나.”
결국, 달천을 카라얀 왕자의 형으로 인정하는 포미아 공주를 보며 모두는 그녀가 무척이나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녀가 계속 달천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왕실에 닥친 위기극복은 꿈도 꾸기 힘들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달튼 님, 저는 언제나 왕자 편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대신들이나 귀족들은 반발이 심할 거라 생각됩니다. 부왕께서 건강하시다면 저와 왕자의 건의로 마땅한 지위라도 드리겠지만 지금으로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군요.”
진심으로 힘이 못 되어주는 것이 미안하다는 듯 말하는 포미아 공주는 왠지 지금의 현실이 서글프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