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공주님, 별 걱정을 다하시는군요. 제가 왕자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알 지 못하는 정보와 갈 방향만 제시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호쾌하게 말하는 달천을 바라보며 포미아 공주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말처럼 어떤 문제도 그가 쉽게 처리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반달눈매가 이제는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공주였다.
“아마도 자이루 경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는 타솔 공작의 조카이자 그 세력의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무척 강하거든요. 오늘 그와 같은 봉변을 당했으니 필히 복수하러 올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심이 좋을 듯하군요.”
진심어린 염려를 들으며 달천은 생각했다.
‘고 귀여운 놈이 또 오면 나야 좋지. 흐흐.’
물론 아스마엘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목숨이 두 개라도 되면 모를까. 설마 그 꼴을 당하고 또 올까? 이번에 또 오면 틀림없이 두 발로는 못 다닐 텐데. 쯧.’
“한 가지만 공주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부탁이신지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요.”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공주에게 달천은 말했다.
“소문을 내주십시오. 물론 궁 안에요. 카라얀 왕자의 형이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왔다고요. 단, 은밀하게 내셔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왕께서 오래전 여행길에서 얻게 된 아들이라는 것도 포함시키세요. 은밀하되 누구나 알 수 있게끔 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소문을 내달라는 달천의 말에 공주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것은 제가 궁내 활동을 편하게 하면서도 상대를 경동시켜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려내려는 의도입니다. 적군이라면 무척 놀랄 겁니다. 정체불명의 왕족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니 어떤 움직임을 보이겠지요. 이번 일의 최대 포인트는 대신들이나 귀족 중에 과연 누가 타솔의 심복이냐를 알아내는 것이지요.”
순간, 포미아 공주는 다시 한 번 달천을 쳐다보았다. 이제 막연히 이 사람이라면 하고 생각했던 게 이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곧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동안 왕자가 성장할 때까지 도움이 돼주려고 만들었던 사적인 정보조직이 이번에 제 구실을 하겠군요.”
이번엔 달천이 감탄했다. 그녀가 현명하다는 것은 확연히 느꼈지만 그동안 이런 준비까지 했다는 것이 그녀를 또 한 번 달리 보게 했던 것이다.
“아참, 그리고 며칠 있으면 슬리버 왕국 공식 아카데미에서 졸업무도회가 열립니다. 학생들의 무도회이지만 전통적으로 졸업무도회때에는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과 대신들이 모이지요. 학생들 자체가 귀족들 자제들이고 그들이 졸업을 하면 대부분 왕실의 주요 직책을 맡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해서 서로의 친분을 두텁게 하기 위함이지요.”
포미아 공주의 갑작스러운 무도회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진 달천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생각엔 그처럼 많은 귀족들이 모이게 되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그 자리에서 달튼 님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게 어떤가 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말을 하다가 멈춘 포미아 공주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운이 어렸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기왕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데 저도 달튼 님을 오라버니로 불러야 할 것 같아서요. 부왕께서 편찮으시니 이 일은 제가 어마마마께 허락을 받을까 합니다만, 어마마마께서도 카라얀 왕자와 저의 간청이면 쉽게 허락하실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는지요?”
여기까지 듣는 동안에 달천은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 마누라 후보감인데 오라버니로 부르게 해도 되려나? 그러다가 마누라가 되면 어쩌지? 그리고 만약 그러면 소로본은? 그냥 이참에 둘 다 마누라 삼아버려?’
중원식 사고방식이 남아 있는 그는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는지라 마누라 둘 정도는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으니…… 신께서 인간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창조하셨으니 망정이지 이 마음이 들킨다면 그가 아무리 초절정 무공을 지녔더라도 필시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하하! 이렇게 어여쁜 동생이 또 생기다니 정말 기쁘군그래, 포미아 공주.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말만 하여라. 아예 그런 놈은 라켄 대륙 밖에서 놀게 해줄 테니 말이야.”
큰소리를 땅땅치는 달천을 보면서 아스마엘과 아이미는 생각했다.
‘결국 왕실에 바람이 불겠구나. 그것도 아무도 감당 못할 바람이…….’
제8장 졸업무도회…… 진정한 제비는 누구?
1
“너 지금 후딱 플래너한테 가서 이것들 좀 가져오너라.”
무료하다는 듯 하품까지 하며 어디서 구해왔는지 딱정벌레 두 마리를 싸움시키고 있던 아스마엘에게 달천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게 뭡니까?”
달천이 내민 메모지에는 어떤 목록이 적혀 있었다.
“헉! 설마 형님 이것들을 쓰실 겁니까? 푸하하하. 아니 형님 좀 어울리게 사십시요. 이런 건 아무나 쓰는 게 아닙니다.”
아스마엘도 이 정도면 중환자로 분류된다.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달천을 도발하고 있으니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퍼억!
아스마엘이 평소 자신의 매력 1호로 꼽는 한쪽 쌍꺼풀 눈 위로 화병 하나가 날아들었다.
“샬론. 오늘 밤에 아스마엘과 대련할 준비를 해라. 아무래도 서열 조정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스마엘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서열을 조정한다니요?”
“이기는 쪽이 내 동생 하고 지는 쪽이 내 전용기 하는 걸로 조정하려고.”
아스마엘은 순간 그 누구도 엄두를 못낸다는 1초에 잔머리 수백 번 굴리기를 시작했다.
‘저 얼음장 같은 마족 여성체가 나보다 서열이 높아진다면? 설마 내가 마족 따위한테 질라고, 명색이 드래곤인데. 아니야. 오늘 컨디션이 나빠서 마법을 쓰기도 전에 당한다면?’
눈부시게 잔머리를 돌리고 있는 그때,
“난 찬성이다, 주인. 예전에도 드래곤 하나 뭉개버린 적 있어. 비록 약하다는 그린드래곤이었지만.”
하루에 한마디 할까 말까 한 샬론이 입을 열었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막 성용이 된 그린드래곤 하나가 마족에게 무지막지하게 쥐어 맞고 온 사건이 있었다. 물론 막 성용이 되었는지라 그 힘이 대단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건 드래곤의 관
점에서나 그렇지 아무 마족이나 드래곤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헤, 형님 설마 이 사랑스러운 동생을 내 치시려고 그러십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처럼 쓸모 있는 동생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서운합니다.”
방긋 방긋 웃음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처절해 보임은 눈의 착각일까?
“아이미야, 어떻게 할까?”
갑자기 아이미에게 묻자 아스마엘은 최대한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아이미를 바라보았다.
“오빠. 아스마엘 오빠가 비록 오빠 말씀에 가끔 반항을 하지만 그거야 애교 아닐까요? 아마 저렇게 하고도 금방 갔다 올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지는 아스마엘이었다.
“그런데 오빠. 아스마엘 오빠에게 가져오라고 한 건 무엇이지요?”
“넌 알 것 없다. 그냥 무도회 때 쓸 물건이야.”
대충 얼버무리는 달천의 말에 아이미는 궁금증이 커져갔다.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건가요?”
얼굴에 턱을 고이고 바짝 다가와서 말하는 아이미를 보며 달천은 또다시 가슴이 뛰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그건 아니지만…… 근데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라.”
“오빠한테 좀 가까이 있기로 서니 뭐가 문제인가요? 오빤 제가 싫으신가요?”
아이미의 말에 고개까지 흔들며 부정하는 달천이었다.
“아, 아니 그럴 리가. 난 다만 누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체질적으로 부담이 되서…….”
“그럼 말씀해주세요.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이렇게 있을 거니까.”
역시 아이미였다. 그녀 아니면 누가 천하의 달천을 이리 당황하게 만들겠는가.
“응. 사실은…….”
달천이 아스마엘에게 가져오게 한 물건들을 아이미에게 알려주자 침착하기로 손꼽는 그녀까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이번 무도회장에서 난리가 나겠네요. 호호호. 정말 기대가 되네요.”
대체 어떤 걸 가져오라고 했는데 반응들이 이럴까? 물론 궁금하시면 죽어라 이 글을 읽는 수밖에는 없지만…… 으음.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너만 알고 있어.”
다짐하듯 아이미의 손까지 꼬옥 쥐며 말하는 달천이었다.
“호호. 걱정 마세요. 이런 이야기는 해봐야 아무도 안 믿을 텐데요 뭐.”
“난 단지 이번 무도회에서 귀족들의 시선을 끌어 모아 내가 움직이는데 훨씬 효율적이 되게 하기 위한 것뿐이야. 험험.”
뭔지는 몰라도 준비한다는 것이 대략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지는 듯했는데 아이미는 벌써 달천의 속마음을 눈치 챈 듯했다.
“누가 뭐라 그래요. 알았으니까 잘해보세요. 호호.”
아이미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샬론이 참견했다.
“주인, 만약 무도회인지 뭔지 거기서 그렇게 할 거면 난 모른 척해라. 마족도 창피한 게 뭔지는 안다.”
처음과는 다르게 달천들의 분위기에 동화되는 듯 조금씩 대화에 끼어드는 샬론을 보며 달천은 생각했다.
‘마족이 창피한 걸 안다? 지나가던 오크가 웃겠군. 마족 아니랄까봐 귀는 밝아가지곤, 에잉!’
이들의 대화를 통해 달천이 무도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꾸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분명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 것은 종잡을 수 없는 달천이 이 일을 주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퍼슨 경과 그 동생분이 존엄하신 달튼 님을 찾아뵙겠다고 오셨습니다.”
이 시종은 달천이 요즘 가장 추앙받고 있는 영웅임을 알기에 무척이나 달천을 존경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달천을 시중들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던 터였으니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시라 하라.”
달천의 대꾸에 문이 열리며 처음 볼 때와 달리 화려한 예복을 차려
입은 제퍼슨 남매가 들어왔다.
“이야! 우리의 영웅, 오랜만이네. 요새 자네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들이 없더군.”
과장스러운 몸짓까지 하며 말하는 제퍼슨은 진심으로 달천이 반가
운 듯했다.
“오빠.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보고 싶었어요.”
첼리는 서슴없이 달천의 품으로 뛰어들어 달천을 안고 말했다. 당황한 것은 달천이었다.
아이미와의 충격(?)도 벗어나기 전에 말만 한 처녀가 품으로 뛰어 들었으니 순진무구함의 극치인 그가 어찌 멀쩡하겠는가.
“그, 그래. 첼리야. 나도 보고 싶었다.”
어디서 풍이라도 들어왔는지 온몸을 달달 떨며 말하는 달천을 보며 첼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오빠, 어디 아프세요? 천하의 달튼 오빠가 아프실 때도 있나 보네요. 이리 누워보세요. 제가 열이라도 있나 봐야겠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첼리는 달천을 아예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체, 체, 첼리야, 이 오빠는 아주 건강하단다. 그,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저쪽에서…….”
아아. 달천은 이제 마마, 홍역보다도 무섭다는 ‘숫총각 아가씨 손에 눕혀진’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심장박동이 몇 배는 빨라지면서 호흡곤란이 일어나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사태에 이르렀다.
“조용히 하세요. 아무리 무쇠 같은 사람이래도 아플 수 있는 거예욧. 아이미 언니, 언니가 물수건 좀 들여오라 해주세요.”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가 아파서 하는 행동이나 같았다. 너무도 분명하게 말하는 첼리의 음성에 아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냥 간단하게 회복 마법을 써도 되건만 오랜만에 만난 오빠와 정을 나누고 싶은 듯했다.
“으, 으응. 알았어. 얼른 가져오게.”
달천이 아프다는 건 말도 안 되는데 첼리의 분위기에 물수건을 준 비시키는 아이미는 자신이 왜 이래야 하는지 영문을 모를 지경이었다.
“달튼, 자네 그새 허약해진 건가?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그래.”
이제 모두 달천을 환자 취급했다. 답답한 건 달천이었다. 생각 같아선 첼리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서 껄껄 웃어야 하건만 무슨 마법에 걸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천 자신도 몰랐다, 남자는 나이가 아무리 들어가도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는 것을. 이때 첼리의 손길은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어머니의 손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야말로 위대하신 분 아니겠는가.
졸지에 270살 먹은 어린애 노릇을 하게 된 달천은 첼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봤겠는가.
기분 좋은 느낌에 눈을 지그시 감고 첼리의 향기에 취해 있는데, 뜬금없이 샬론이 말했다.
“주인, 자세가 보기 좀 그렇다. 덜떨어진 사람 같아 보여.”
한참 기분 좋은데 덜떨어진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에 벌떡 일어선 달천은 샬론을 노려보았다.
“어휴. 저게 여성체만 아니었어도…….”
천하의 달천이라도 차마 여성체임을 알게 되었는데 손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에 앉았다.
“어머, 오빠. 아직 일어나시면 안 돼요.”
첼리의 걱정스러운 말에 미소 지으며 달천이 말했다.
“으응.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마라. 그나저나 너희들은 여기 어쩐 일이지?”
“이 사람, 놀랐잖은가. 실은 우리가 성에 도착했을 땐 자네가 막
떠났다고 하더군. 우리도 어차피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성으로 갈 때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준비하고 자네 뒤를 따라온 걸세.”
제퍼슨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달천이 말했다.
“응, 그렇군. 아무튼 잘 왔네. 카라얀 왕자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고 온 것이네. 내가 성질이 좀 급한 것도 있고.”
“아참, 자네 왕자님 하고 의형제 맺었다면서? 그리고 우리 영지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오면서 자네 소문을 많이 들었네. 자네가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네.”
그의 음성엔 이런 친구를 두게 된 것이 기쁘다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오빠. 너무 유명해졌다고 이 첼리에게 소홀히 하시는 건 아니죠?”
한마디 끼어드는 첼리를 보며 달천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첼리가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데.”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퍼슨은 아까부터 유심히 샬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달튼. 이쪽 레이디 분은 누구시지? 무척 매력적인 분이신것 같은데 소개 좀 해줘.”
제퍼슨의 취향도 평범하진 않은 듯 샬론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아. 샬론이야.”
“이거 반갑습니다. 전 제퍼슨 드 카운티입니다. 아름다운 레이디를 만나서 영광입니다.”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미는 제퍼슨이었다.
“난 샬론이야.”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