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피에 절은 여인
“하아! 하아!”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조금만. 발을 멈추지 마십시오!”
다급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한 소녀의 몸을 붙잡은 채로 끌고 가는 남자들이 있었다.
물론 과거였다면 그런 무례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무례한 것보다 일단은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아! 하아! 더 이상은 못 가요. 조금만 쉬….”
“안 됩니다!”
소녀는 더는 못 가겠다며 땅바닥에 몸을 주저앉고서는 흐느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로 힘겨워서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에 놓아 버리고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남으셔서 복수를 해야 합니다! 죽으실 수 없으십니다!”
소녀를 끌고 다니던 남자는 피를 토하듯이 소녀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 또한 소녀를 버려두고 도망간다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반드시 그녀가 필요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피가 필요했다.
“당신의 목숨은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명심하십시오! 선왕의 복수! 원통하게 죽어간 자들의 복수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워…원터경. 흐윽!”
소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원터경이라는 남자는 마치 악귀같이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온통 터져 나간 실핏줄 때문에 마치 붉은 피를 눈에서 흘리는 듯했고 온몸은 피에 절어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처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더라도 자신의 신분으로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겠습니다. 가야 합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앗! 아파요!”
과거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지금의 상황도 상상이나 했을까 하는 일들이었다.
무엄하다고 고함을 지를 힘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단장님! 몬스터입니다!”
“뭐? 제길! 빅터! 제놈! 시간을 끌어라!”
죽으라는 명령.
호명된 두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가혹한 운명을 거부할 만한 용기 따위는 없었고 이미 그 가혹한 운명에 스러져 나간 피들을 이미 두 눈으로 수 없이 지켜 본 다음이었다.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일행에서 떠나간다.
원터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녀에게 외쳤다.
“공주님을 살리기 위해 저들은 죽습니다! 저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마십시오!”
“아…아아!”
피의 족쇄가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아니 이미 온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옭아맨 족쇄였고 그것이 하나 더 생겨난 것이었다.
그 족쇄는 그녀의 몸을 그녀가 결코 원하지는 않지만 끌어당기고 있었다.
—크아아앙!—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짐승의 울부짖음.
그리 멀지는 않았다.
“아악!”
“살려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단발마의 비명소리는 또 다시 덧없는 소중한 목숨이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이 이상 들어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미 며칠째 몬스터의 숲 안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 그놈들은….”
원터는 지독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몬스터의 숲으로 도망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 누구도 몬스터의 숲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이들은 없었다. 실제로 이미 자신들의 동료는 무지막지한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다음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을 따라 추적하는 작자들이었다.
자신들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몬스터들로부터 피해를 입으면서도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제는 두 집단 중에 어떤 집단이 먼저 죽는지에 따라 결정이 날 터였다.
‘아니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장담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절대 죽을 수 없다. 결코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없단 말이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며 자랑스러워 했던 부하들을 서슴없이 버려 가면서 살아남은 자신이었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 굴러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굴러떨어졌다. 이제는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과 희생을 한 이들의 의지만 이루어진다면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다.
더 이상 흘릴 눈물 따위는 없었고 이제는 오직 피만을 흘릴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난 악마가 될 것이다!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악마보다 더한 존재가 될 것이야!’
그렇게 다짐하며 원터는 소녀 아니 아멜라 공주의 손을 끌고서는 계속 숲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뛴 것인지는 몰랐지만 몬스터의 숲은 원터가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에게는 가혹한 땅이었다.
—크르르르!—
“제길!”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온 것이었다.
그 몬스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몬스터의 숲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미지의 지역이었고 그 내부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몬스터들은 몬스터 숲 바깥에도 존재했지만 몬스터 숲의 몬스터들은 밖의 몬스터들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다 끝났어.”
눈빛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로 오싹한 기운을 풍기는 몬스터였다.
아멜라 공주는 그런 몬스터를 마주하자 오히려 안도가 되면서 마음의 짐이 내려지는 듯한 느낌에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원터경도 이제는 포기한 것인지 멍하니 몬스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도망을 가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 장소에 있는 모두는 직감하고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헤로몬 뒷일을 부탁한다.”
“단장님!”
“으아아아아!”
원터는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감당을 할 수 없는 몬스터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죽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다른 부하들의 희생으로 이 위기를 모면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극히 작은 확률이나마 자신이 눈앞의 몬스터를 막는다면 자신의 원통한 복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지르며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르륵!—
그런 원터의 모습에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지은 몬스터는 사냥을 시작하려고 했다.
움찔!
하지만 그 순간 몬스터는 왠지 모를 불쾌하면서도 불안함에 몸이 떨려왔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본능이었고 지금 바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몬스터는 알았다.
퍼억!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너무 늦어 버렸다.
머리가 터져나간다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거! 이거! 확실히 이 숲 보통 몬스터들은 아니군요. 설마 저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요. 이 제가 이 기술까지 쓸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거 간만에 영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손해는 아닐 듯싶은데 말입니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숲의 어둠 속에서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는 없었다.
“뭐…뭐냐?”
원터는 자신을 죽이려던 몬스터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죽는 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지쳐 있어서 온전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지만 지금의 몬스터라면 온전한 상태의 자신이라도 장담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였다.
그런 몬스터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것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자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부르르!
자신보다 몇 수 위의 존재임을 직감했다.
눈앞의 몬스터보다 더 강한 존재.
그리고 이내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원터는 이제 완전히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두 주먹을 땅바닥에 내려쳤다.
“제길! 제기랄!”
“흠! 무슨 짓인지는 모르겠다만 자해를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세요. 그대들의 목숨은 이제 온전히 영주님의 것이니까요.”
헤로스는 아르메니아 대륙에 오고 처음으로 만나는 인간들에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생각보다 빨리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헤로스님! 이 자들을 추적하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전부 붙잡아 오세요. 모든 판단은 영주님께서만 하실 것이니까요.”
헤로스의 말에 강해의 레인저들의 일부가 사라졌다.
헤로스의 명은 죽이지 말고 모두 사로잡아 오라는 것이었지만 레인저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누…누구?”
그제야 자신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원터는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그 남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원터는 느낄 수 있었다.
약해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이었지만 그 주위로 온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느낌을 받는 원터였다.
“흐음 패잔병들인가요? 뭐 상관없지요. 얌전히 따라오세요.”
그렇게 헤로스는 아멜라 공주와 원터 경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추적하고 있던 자들까지 모조리 붙잡았다.
물론 추적자들이 일부 반항을 했지만 그건 반항에 불과할 정도로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몬스터 숲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산책을 나온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듯이 활보하고 있는 헤로스에 끌려 강해의 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원터 경.”
“쉿! 조용히 하십시오. 아무래도 이들은 우리를 지금 당장은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우거의 동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은 공주님의 신분을 숨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터는 헤로스의 정체와 기사로 보이는 자들의 정체를 모르기에 아멜라 공주에게 귓속말로 말을 했지만 헤로스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호오! 공주라.’
자신이 붙잡은 자가 일반인들도 아니고 공주라면 몬스터 숲 너머의 정세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설령 공주가 모른다고 해도 그를 호위하는 자들이나 그런 공주를 추적할 정도의 이들을 통해 꽤나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헤로스는 정말이지 이번에는 강해의 칭찬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원터의 말대로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헤로스는 잘 알고 있었다.
영주님인 강해가 듣고자 하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 빨리 가자! 영주님께서 기다리시겠다.”
“예! 이동 속도를 높인다!”
이동 속도를 높인다고는 말했지만 아멜라의 일행들이 워낙에 지쳐 있었기에 그다지 속도를 높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숨어서 이동을 하던 레인저들도 포로를 안전하게 끌고 가야 했기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 정도 인원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들을 노리는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그다지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
“정말 귀찮은 것들이지만 뭐 이제 다 온 것 같군요.”
아멜라 공주의 일행과 그들을 추격했던 추격자들은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응하는 헤로스와 레인저 부대의 가공할 위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곧 몬스터 숲이 끝나는 장소에서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을 볼 수 있었다.
박천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