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할 생각인가?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싶군.”
“어느 누구도!”
카르고의 입술이 벌어지며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 아만족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
말을 마친 카르고의 몸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였기에 미하엘이 흠칫 놀랐다.
그들의 상식으로 아만족은 힘만 좋을 뿐 움직임 자체는 굼뜬 종족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가 몸을 날리는 속도는 숙련된 전사보다도 오히려 더 빨랐다.
카르고가 덮쳐 가는 방향을 살핀 미하엘이 경고성을 토해 냈다.
“조심해, 발락!”
발락이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충분히 들어 올리기 전에 카르고의 솥뚜껑 같은 손이 도끼머리를 움켜잡았다. 힘을 주어 빼내려고 했지만 도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놈 힘이 장난이 아니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르고가 도끼를 확하고 밀었다. 발락의 몸이 와락 뒤로 밀쳐졌다. 중심을 잃고 비틀비틀 물러나는 발락의 목을 카르고가 육중한 팔뚝으로 휘어 감았다. 도대체 언제 다가가서 발락을 제압했다는 말인가? 미하엘과 도미니크는 아만족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우두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발락이 혀를 길게 빼물었다. 목이 흐느적거리는 발락의 시체를 던져 버린 카르고가 도끼를 오른손에 쥐었다.
순간 시퍼런 섬광이 카르고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폴이 날린 화살이었다. 그러나 카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도끼 면을 들어 화살을 튕겨 냈다. 뒤로 두 발이 더 날아왔지만 허무하게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챠아앙.
부릅뜬 카르고의 눈은 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만족을 노예로 삼으려는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 이제부터 처형을 집행하겠다.”
“나쁜 새끼. 죽여 버리겠어!”
버럭 고함을 지른 미하엘이 달려들어 대검을 휘둘렀다. 숙련된 노예 사냥꾼임을 입증하듯 그의 검격에는 힘이 충실히 실려 있었다. 속도 또한 나무랄 데 없이 빨랐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그의 앞에 선 자는 마지막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케니아 혈족의 마지막 전사였다.
푸캉!
섬광이 교차하는 순간 미하엘은 손목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만족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입술을 깨문 미하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힘 하나는 좋군. 하지만 속도까진 그렇지 않겠지?”
대검의 손잡이를 짧게 고쳐 잡은 미하엘이 빠른 공격을 가했다. 현란한 공격으로 상대의 허점을 유도해 내는 것은 미하엘이 가장 자랑하는 장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르고의 속도는 전혀 미하엘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월등히 빠르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사방으로 난무하는 미하엘의 검영을 무표정한 얼굴로 일일이 쳐 낸 카르고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걸렸다.
“네 실력은 충분히 보았다. 이제 가거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대검 중단이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카르고가 순간적으로 도끼에 힘을 밀어 넣은 것이다. 대검이 부러지고 시커먼 선이 머리를 파고드는 것을 느낀 미하엘이 사색이 되어 고함을 질렀다.
“아, 안 돼……!”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끼에 의해 머리가 쪼개진 시체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목숨이 사라진 미하엘의 시신이 피와 뇌수를 사방으로 흩날리며 힘없이 무릎을 꿇는 순간 비통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미하엘! 이 개자식, 죽어라!”
고개를 돌린 카르고의 눈에 필사적으로 캐스팅을 마무리하는 도미니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시뻘건 광구가 이글이글 방전하고 있었다.
좌표를 명확히 정했는지 화염구가 쏜살같이 카르고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카르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히 화염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염구가 카르고의 지척으로 접근하자 도미니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미하엘의 복수다. 뼈 한 조각까지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순간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화염구가 막 앞가슴을 강타하려는 순간 카르고가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묘한 파동이 파문을 일으키며 뿜어져 나오는 순간 마나가 성난 파도처럼 들끓었다. 화염구를 구성하던 마나 역시 그 흐름에 말려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카르고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화염구가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마치 상위 마법사가 압도적인 마력으로 흩어 버리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도미니크가 입을 딱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그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악에 겨워하는 그녀의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큼지막한 손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붙잡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도미니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사, 살려 줘요.”
그러나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통이 뒤로 돌아가 버렸다.
우두둑.
얼굴이 등 뒤로 한 바퀴 돌아간 도미니크의 몸이 부들부들 경련하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막 도미니크의 숨통을 끊은 카르고가 급히 몸을 돌리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쐐애애액 퍽! 퍽!
두 대의 화살이 도끼에 맞아 튕겨 나갔다. 다시금 한 대의 화살을 시위에 거는 폴을 본 카르고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냅다 집어던졌다.
휘리리릭.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간 도끼가 정확히 폴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고개를 젖힌 폴의 몸이 도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무시무시한 악명을 휘날리던 노예 사냥꾼 미하엘 일당의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종말이었다.
“세, 세상에…….”
세실리아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에 재갈만 물렸을 뿐 눈은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전 모닥불 가에서 벌어진 살육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금방 전멸한 노예 사냥꾼들은 그야말로 막강한 파티였다. 하나같이 필드를 자유자재로 누빌 수 있는 실력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라빈의 파티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시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막강한 파티가 숨 몇 번 내쉴 순간에 고스란히 전멸해 버렸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덩치 좋은 아만족은 이제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신음을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만족을 쳐다보았다.
“으으으.”
저 큼지막한 손에 붙잡힌다면 자신의 가녀린 목은 그대로 토막토막 부러질 것이다. 그러나 아만족은 세실리아를 죽이지 않았다.
툭 투투툭.
그녀를 결박하고 있던 밧줄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끊어 버린 아만족이 다시금 몸을 돌려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재갈을 풀어 낸 세실리아가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미,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세실리아의 시선은 모닥불에 앉아 노예 사냥꾼들이 남겨 둔 노루고기를 뜯어먹는 아만족의 등에 꽂혀 있었다.
* * *
원래대로라면 세실리아는 아만족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박 하루를 굻은 탓에 배에서 연신 쪼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그녀는 마법사이다. 위력 있는 마법을 시연하지는 못하지만 통역 마법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세실리아가 목이 등 뒤로 돌아간 채 널브러진 도미니크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마법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마법 지팡이에는 아만족의 언어패턴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통역 마법의 캐스팅을 마친 세실리아가 몸을 가늘게 떨며 모닥불로 접근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아만족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인간 네 명을 저세상으로 보낸 존재답지 않게 붉게 빛나는 눈빛이 너무도 차분했다.
“용건이 있나?”
통역 마법은 무리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만족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세실리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너무나 배가 고파요. 고, 고기를 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르고가 큼지막한 노루 허벅지를 뜯어 내밀었다. 서둘러 받아 든 세실리아가 게걸스럽게 노루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지금은 체면 따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 정도 뜯어먹고 나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들을 순식간에 해치운 아만족에 대한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전에는 그토록 무서워 보였지만 고기를 건네준 것과 조용히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에 경계심이 조금씩 사라졌다. 어쨌거나 노예로 팔려 갈 운명의 자신을 구해 준 것은 눈앞의 덩치 큰 아만족이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그 말에 카르고가 눈을 끔뻑거렸다.
“고마울 것 없다. 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행한 일일 뿐…….”
세실리아가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죽어 넘어진 미하엘 일당을 쳐다보았다.
“저자들은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들이었어요. 제 동료들도 모두 저들의 손에 죽었지요. 그런 저들을 모두 죽이시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러나 카르고는 대꾸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애초에 그가 모닥불을 보고 접근한 것도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하엘 일행과 싸우는 과정에서 시장기가 더욱 짙어졌다.
대답 없는 카르고를 보는 세실리아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는 끈 떨어진 연 신세였다. 그녀 정도의 풋내기 마법사가 필드로 나간다면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몬스터의 위장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금껏 그녀를 보호해 주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을 죽인 노예 사냥꾼들 역시 시체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 레나르로 가기 위해서는 노예 사냥꾼들을 전멸시킨 아만족과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보아하니 그리 포악한 것 같지는 않군. 그나저나 놀라워. 유순하고 힘만 세다고 알려진 아만족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베테랑 전사 두 명과 마법사, 그리고 궁수 하나가 포함된 파티를 홀로 전멸시킬 수 있는 전사는 결코 흔하지 않다. 마음을 정한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듣기로 레나르 시로 간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저를 동료로 삼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카르고가 고개를 돌렸다. 입가로 흰 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니 웃는 모양이었다.
“우리 아케니아 혈족은 오로지 자격이 되는 자만 동료로 삼는다. 내 관점에서 너는 그 범주에 해당하지 않아.”
카르고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나머지도 책임지라는 말은 하지 말도록. 널 데리고 가면 레나르까지의 여정이 족히 며칠은 더 걸릴 것이다.”
세실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곳에서 버림받는다면 그녀의 운명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제, 제발 부탁드려요. 이곳에 남겨지면 전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 또한 네 운명이겠지. 전사라면 의당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해 나가는 법. 길을 따라 이틀 정도 쭉 올라가면 관문 경비병들이 있다. 레나르까지 혼자 가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겠지.”
세실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을 거부하는 경우를 그다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남달리 아름다운 그녀가 간곡한 어조로 부탁하면 인간 남자들은 혼이 빠진 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미모는 눈앞의 아만족에게는 전혀 어필하지 못했다. 미를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어, 어떻게 하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세실리아의 눈에 모닥불 가에 어지럽게 널린 시체들이 들어왔다. 그 옆에 내팽개쳐진 배낭에는 동료들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세실리아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르고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전리품을 챙겨 가지 않을 생각인가요?”
“난 전사지 도둑이 아니야.”
“흠…… 좋아요, 아만 전사님. 보아하니 제대로 된 장비가 없는 듯한데 어떻게 마련하실 생각이세요?”
그 말에 걸음을 멈춘 카르고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솔직히 말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사실 아케니아 혈족의 전사들은 철저히 소비 집단이었다.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 무기와 갑옷 등 모든 것을 혈족의 일꾼들이 제공해 주었다. 전사들이 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몸을 단련하는 것과 사냥, 적과 싸우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나르 시에는 아케니아 혈족이 거의 없을 텐데.’
눈매를 좁힌 카르고의 귓전으로 세실리아의 가냘픈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저는 마법사예요. 통역 마법을 쓰고 있기에 전사님과 대화가 가능한 것이에요. 아마 다른 사람들은 전사님과 대화가 불가능할 거예요. 전사님이 발키온 연합 공용어를 배우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카르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제 역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세실리아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은화 몇 개를 꺼냈다. 노예 사냥꾼들이 그녀의 주머니는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돈은 있으세요? 레나르로 가서 여관에 투숙하고, 먹을 것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무기와 갑옷을 장만하는 데에는 더욱 많은 돈이 필요하죠.”
그 말을 들은 카르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