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세실리아는 마침내 눈앞의 덩치 큰 아만족 전사를 요리할 방법을 알아차렸다. 그는 싸움만 잘할 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하죠.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뭘 하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해요. 저라면 죽은 자들의 장비와 배낭을 모두 가지고 갈 거예요. 가지고 가서 적절한 곳에다 팔면 돈으로 바꿀 수 있어요. 돈이 있다면 전사님의 몸에 맞는 갑옷과 무기를 구매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
“흠, 제 말대로 하셔도 문제가 생기겠군요. 레나르에 아만족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 외에 거의 없어요. 물건을 팔려고 해도 아마 상인은 전사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걸요? 마법사가 아니면 대화는 불가능해요.”
카르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백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아케니아 혈족의 전사에게 세상은 너무도 복잡했다.
‘레나르로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문 카르고가 세실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손을 꼭 모은 세실리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카르고를 올려다보았다. 주저하던 카르고가 입을 열었다.
“널 레나르로 데려다 주면 날 도와줄 것인가?”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세실리아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절 동료로 받아 주신다면 성심껏 도와드리죠. 발키온 연합의 공용어도 가르쳐 드릴 수 있고요.”
카르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너에게 자격이 생겼다. 너를 내 동료로 맞아들이겠다.”
“훌륭한 선택이세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세실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카르고는 멀뚱히 세실리아의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세실리아가 재빨리 부연설명을 했다.
“호의를 나타내는 인간 족 특유의 표현방식이에요. 악수라고도 하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카르고가 큼지막한 손으로 세실리아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손이 워낙 컸기에 세실리아의 팔뚝까지 푹 파묻혀 버렸다.
제3장
첫 번째 동료 세실리아
새로운 동료를 만난 세실리아는 먼저 장내를 정리했다. 그녀는 죽은 노예 사냥꾼들의 장비를 모조리 벗겨 내어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배낭 안을 살펴본 세실리아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미하엘의 배낭 속에 상당히 많은 금화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자들이었군요. 이렇게 많은 돈은 처음 봐요.”
카르고는 죽은 발락의 양손도끼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매가 연신 꿈틀거렸다.
“무게 중심이 전혀 맞지 않아. 무척이나 허접한 무기로군.”
“레나르로 가시면 좋은 무기를 구하실 수 있을 거예요. 들고 갈 짐을 두 개로 나눴어요. 레나르에 가서 팔면 꽤나 짭짤할 것 같아요.”
세실리아가 끈으로 연결한 두 개의 배낭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배낭은 그녀가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죽은 동료들의 물품뿐만 아니라 노예 사냥꾼들의 장비까지 들어 있었기 때문에 무게가 엄청났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기어코 짊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동료들과 함께 다닐 때에도 자신에게 할당된 짐을 짊어지는 것은 철칙이었다. 그래야만 만약의 상황에서 동료들의 전투력을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르고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는 세 개의 배낭을 등에 짊어진 상태였다.
“어멋.”
갑자기 배낭이 가벼워지자 세실리아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카르고가 배낭을 짊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들고 가겠다. 너에게는 무리다.”
“괘, 괜찮은데.”
“떨어지지 않도록 잘 묶기나 해라.”
결국 세실리아는 다섯 개의 배낭을 짊어진 카르고의 뒤를 맨몸으로 졸졸 따라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든든한 동료를 얻은 안도감 때문인지 세실리아는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정말 놀랐어요. 노예 사냥꾼들은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금방 해치우시다니 말이에요. 아만족 전사는 모두 그렇게 강한가요?”
“…….”
카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그녀의 수다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아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아직 동료들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세실리아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던 동료들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 갔다. 하마터면 기억이 지워진 채 노예로 팔려갈 뻔했던 그녀가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는 방법은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고는 계속 그녀의 수다에 시달리며 걸음을 옮겼다.
으슥한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카르고가 손을 들어 올렸다.
“쉿. 몬스터다.”
그 말에 세실리아가 입을 닫았다. 사람의 음성이 몬스터의 주의를 끈다는 사실을 6개월 동안 필드를 돌아다니며 똑똑히 배운 그녀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가 카르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떤 몬스터인가요?”
“상당히 크다. 이미 우리의 기척을 발견했어. 거리는 약 5백 미터 정도.”
그 말에 세실리아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5백 미터 밖의 몬스터를 발견해 내는 것은 제아무리 뛰어난 레인저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접근해야만 몬스터의 출현을 간파할 수 있다.
게다가 대형 몬스터란 말에 세실리아의 안색이 조금씩 굳어 들어갔다. 동료들과 함께 다니던 때에도 대형 몬스터는 회피의 대상이었다. 대형 몬스터의 출현을 간파할 경우 동료들은 사제의 권능으로 친 보호막 속에 들어가 모든 기척을 지운다. 그런 다음 몬스터가 지나갈 때만을 기다린다. 그들 파티의 능력으로는 아직까지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조바심을 억누른 세실리아가 조용히 몬스터의 출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숲을 헤치고 시커먼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순간 세실리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헉! 리, 리퍼?”
그녀의 안색이 암울하게 죽어 들었다. 리퍼라면 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유난히 악명을 떨치는 녀석이다. 과거 파티가 온전했을 때에도 감히 사냥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강대한 몬스터인 것이다.
세실리아의 비명을 들은 리퍼가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아가리를 좍 벌리고 포효를 내질렀다. 일용할 양식을 찾았다는 기쁨의 환호성이기도 했다.
키아아아아악!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진 세실리아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끄, 끝장이야.”
바로 그때 리퍼의 포효소리가 바뀌었다. 난데없이 고통에 찬 신음소리로 변한 것이다.
키에에엑!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 * *
기세 좋게 등장했지만 리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지지직.
전사가 걸친 판금갑옷도 갈가리 찢어 버리는 날카로운 낫은 서너 토막이 나서 빛을 잃은 채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이어 둔탁한 파육음과 함께 고통에 몸부림치는 리퍼의 머리통이 휘청하고 뒤로 젖혀졌다. 카르고의 육중한 주먹에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이 왜 달려드는 거지? 귀찮아 죽겠군.”
심드렁하게 내뱉은 카르고가 팔을 뻗어 리퍼의 목을 휘어 감았다. 놀랍게도 그는 허리에 찬 도끼조차 빼 들지 않은 상태였다.
우두두둑.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목을 흐느적거리던 리퍼가 혀를 길게 빼물었다. 털썩 하고 쓰러진 리퍼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세실리아는 볼 수 있었다. 죽은 리퍼의 몸에서 충만하게 신력이 흘러나와 연신 목을 꺾는 카르고에게로 흡수되는 모습을 말이다. 강력한 몬스터답게 죽은 리퍼에게서는 제법 많은 신력이 흘러나왔다. 일부는 대기로 흡수되고 또 일부는 세실리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느낌에 세실리아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세, 세상에…….”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하고도 충만한 신력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다닐 때에도 이런 신력은 느껴 보지 못했다.
지금껏 그녀가 소속된 파티가 사냥해 온 중소형 몬스터들의 신력은 질도 낮았고 양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 몇 마리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신력을 단숨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그릇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어서 흡수한 신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마력이 부쩍 늘어난 것을 느낀 세실리아가 놀란 눈빛으로 카르고를 쳐다보았다.
“어찌 무기도 쓰지 않고 리퍼를 잡을 수가 있지요?”
무심히 리퍼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카르고가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이놈의 이름이 리퍼인가? 어쨌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몬스터라 헛힘만 썼어.”
“무, 무슨 말이에요? 리퍼의 힘줄은 활시위를 만드는 데 최상의 재료예요. 그리고 피도 비싼 값에 팔려요. 맹독을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죠. 단단한 껍질이나 뼈도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짭짤하게 팔 수 있다고요.”
겨우 정신을 차린 세실리아가 재빨리 리퍼의 시체에 달라붙었다. 배낭에서 유리병을 꺼낸 세실리아가 사슴가죽으로 된 장갑을 끼고 흘러나오는 피를 받았다.
쪼르르륵.
서너 개의 유리병이 금세 가득 찼다. 유리병의 마개를 닫은 세실리아가 이번에는 칼을 꺼내 부러진 리퍼의 낫에 달린 힘줄을 도려냈다. 동료들과 함께 다닐 당시 항상 하던 일이라 그녀의 손길은 상당히 능숙했다. 힘줄을 모두 잘라 낸 세실리아가 부러진 낫을 보며 혀를 찼다.
“아깝군요. 낫이 온전했으면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건데.”
카르고가 멍청한 표정으로 세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몬스터라 생각했는데 세실리아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게 그렇게 쓸모 있는 건가?”
“물론이죠. 우선 리퍼 자체가 쉽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잖아요?”
신이 나서 설명하던 세실리아가 멈칫했다. 뜻밖의 전리품에 희희낙락해했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전사 하나가 무기도 쓰지 않고 맨손으로 리퍼를 때려잡았다. 만약 이 말을 레나르에 가서 퍼뜨린다면 대번에 거짓말쟁이로 인식될 것이다. 리퍼는 그 정도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그녀가 상기된 눈빛으로 카르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무기를 쓰지 않았어요?”
“이런 느려빠진 몬스터 따윌 잡는데 어찌 무기를 쓰겠는가? 질 낮은 무기를 쓰는 것은 전사에겐 고역이다. 그나저나 아깝군. 이곳까지 오며 이런 녀석을 대여섯 마리 잡았는데 쓸모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던져 버리고 왔거든.”
세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곳이 어딘가요? 지금 당장 가서…….”
“이미 청소부들이 깨끗이 먹어치웠을 것이다. 가 봐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겠지.”
세실리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추출해 낸 리퍼의 피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아깝군요. 마저 추출했다면 상당히 돈이 될 텐데.”
어깨를 으쓱한 카르고가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청각이 매우 민첩한 몬스터야. 그러니 아까처럼 계속 수다를 떨도록 해라. 그러면 리퍼들이 몰려들 것이다. 오는 족족 붙잡아 주마.”
그 말에 세실리아가 핼쑥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카르고의 말은 바로 리퍼를 끌어들이는 미끼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모르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문은 오래지 않아 트였다.
“리퍼를 혼자 잡을 수 있는 전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평소 듣던 아만족에 대한 소문과는 매우 다르군요.”
그 말에 카르고가 관심을 가졌다.
“인간들은 아만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세실리아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해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지만 온순하고 겁이 많은 종족으로 알려져 있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카르고 님을 뵙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지만 말이에요.”
카르고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혈족에 대한 평가를 직접 듣고 보니 가슴 한구석이 메이도록 아파 왔다.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