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이 끝남과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카르고의 몸을 뒤덮었다. 출혈이 멈추며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포르나는 깜짝 놀랐다. 아만족의 몸에서 전해지는 반응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녀는 동일한 치유 주문을 세아트에게 펼쳐 본 적이 있다. 그때에는 겨우 출혈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주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만족의 육신은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출혈이 멎는 것은 물론이고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놀라워. 아만족의 몸에 치유 주문이 저렇게 잘 먹혀들다니…….”
그러나 포르나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후미에서 대기하던 오칸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십여 마리에 가까운 오칸족이 흉흉한 눈빛을 번뜩이며 포르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장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포르나가 눈을 꼭 감았다. 열 마리가 넘는 오칸이 달려든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카르고가 발을 굴러 땅을 박찼다.
쿠웅.
둔중한 음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포르나를 향해 달려들던 오칸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카르고가 포효를 내질렀다.
꾸어어어어어!
육식동물의 뱃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도전의 포효는 오칸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흉성이 깨어난 오칸들이 다시금 무기를 움켜쥐고 카르고를 향해 몸을 돌렸다. 포르나를 향해서는 단 한 마리의 오칸도 다가가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포르나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저게 대관절 내가 듣던 아만족이 맞아?”
바로 그때 뭔가가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너구리와 비슷한 생김새의 종족. 포포리족 궁수인 두카가 나무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을 지나간 것이다.
“도와야 해.”
나무 위에서 벌벌 떨던 모습은 간곳없이 두카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곳에는 세실리아를 향해 달려들던 오칸 한 마리가 엎어진 채 죽어 있었다. 갈라진 상반신에는 빛을 발하는 외날 도끼 칼리아스가 꽂혀 있었다. 두카가 망설임 없이 칼리아스를 뽑아 들었다.
휘청.
애석하게도 칼리아스는 조그만 체구의 포포리족이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그러나 두카는 필사적으로 칼리아스를 뽑아 등에 짊어졌다.
“무기 배달이다!”
버럭 고함을 지른 두카가 카르고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꾸엑.
두카를 발견한 오칸 몇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겁을 상실했는지 두카는 오칸의 창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달리는 데 열중했다. 사방에서 찔러 들어가는 창을 요리조리 피하며 달리는 모습이 역시 숲의 종족 포포리다웠다. 그러나 카르고의 주변에는 이미 오칸이 새카맣게 깔려 있었다.
그들이 칼리아스를 들고 질주하는 두카에게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불쑥 튀어나온 창날은 용케 피하긴 했지만 뒤이은 창대의 가격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윽!”
신음소리와 함께 두카가 나뒹굴었다. 등에 짊어진 칼리아스 역시 맥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한 자루의 창이 허벅지를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쓰러진 두카를 향해 오칸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었다.
“헤헷. 여기까지인가 보군.”
혀를 내밀며 웃던 두카의 눈에 체념의 빛이 드리워졌다. 바로 그때 엄청난 굉음이 토해졌다. 동시에 서너 마리의 오칸이 마치 공성병기에 맞은 것처럼 훨훨 날아갔다.
콰콰쾅!
막 두카의 심장에 창을 박으려던 오칸들이 거기에 맞아 뒤로 나뒹굴었다. 큼지막한 손이 두카의 머리통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헉!”
갑자기 높은 곳으로 끌려 올라가자 두카는 놀랐다. 그러나 그는 금세 그곳이 조금 전까지 오칸의 포위공격을 받던 아만족의 어깨 위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귓전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눈만 가리지 말고 잘 붙잡고 있어라.”
“와우! 이거 영광이야. 잘 싸워 줘.”
두카가 굵은 목을 끌어안은 것을 확인하자 카르고가 양손에 칼리아스를 나눠 쥐었다. 두카를 구한 다음 즉시 허리를 굽혀 칼리아스를 집어 든 것이다.
두 자루의 칼리아스를 쥐자 투지가 들끓기 시작했다. 게다가 포르나의 치유 주문이 작렬했는지 상처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잦아들며 몸에 활력이 차올랐다. 카르고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오칸들을 노려보았다.
“처형의 시간이다. 모두 죽어라.”
두 자루의 칼리아스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카르고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사신과도 같았다.
오칸들이 전멸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앞서의 경우와는 달리 오칸들은 단 한 마리도 도망치지 않았다. 소굴에 남은 것은 고작 십여 마리의 전사가 전부이며 그 외에는 모두 암컷과 새끼들이므로 오칸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운명은 지극히 암울했다.
무기를 되찾은 카르고는 마치 광전사처럼 미쳐 날뛰며 오칸을 베어 넘겼다. 이제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포르나가 계속해서 카르고를 치유했고 세실리아의 얼음 화살은 발사되는 족족 오칸을 장님이나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퍼퍽!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오칸의 머리통이 쪼개지며 피를 낭자하게 흩뿌렸다. 오칸을 모조리 처치한 카르고가 도끼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의 몸은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마나를 대부분 소진한 세실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댔고 두카가 조심스럽게 카르고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가 싱글거리면서 카르고를 올려다보았다.
“와! 정말 대단해. 이렇게 잘 싸우는 아만족은 처음 봤어.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더군.”
피로에 젖은 카르고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칭찬이 과하군. 어쨌거나 무기를 가져다줘서 고마워.”
“고마울 게 뭐 있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그럴 바에야 무기 배달이나 하고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나? 킥킥.”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좀 쉬도록 하지.”
“그러자고, 덩치 큰 친구.”
카르고와 세실리아, 그리고 포르나와 두카는 한동안 숨을 헐떡이며 지친 몸을 가다듬었다. 가장 먼저 기력을 회복한 포르나가 치유 주문을 거듭 시전했다.
“큐어.”
마지막에 오칸들이 몰살당하며 꽤나 많은 신력이 흡수되었기에 치유 주문을 시전할 여력은 충분했다. 거추장스러운 사슬갑옷을 벗어던진 카르고의 몸에 치유 주문이 작렬하며 자연치유력을 극대화시켰다. 상처 주위가 꿈틀거리며 아무는 것을 본 포르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치유 주문에 정말 민감하게 반응하는군요. 신체 재생력이 얼마나 탁월하기에…….”
치유 주문이란 생명체의 몸에 상처가 날 때 자연적으로 아무는 과정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체의 자연치유력이 강할수록 치유 주문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런데 아만족은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자연치유력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같은 치유 주문을 받아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포르나가 암암리에 혀를 내둘렀다.
‘놀랍군. 아만족이 이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녔을 줄이야.’
그때 정신을 차린 세실리아가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언니? 동료들은 모두 죽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오칸족은 처음 봐요.”
포르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듣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실력 있는 파티 하나가 오칸 무리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번에는 포르나가 세실리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둘이서 이토록 멀리까지 나온 거야?”
그 말에 세실리아가 혀를 내밀며 웃었다.
“네. 헤헤헤.”
“하긴 저 정도 실력의 전사라면 무리라고 볼 수 없지.”
포르나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나무둥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카르고를 쳐다보았다. 그는 세실리아 외에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종족인 두카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파티가 죽인 오칸의 수는 오십여 마리, 그러나 눈앞의 아만족은 거의 혼자서 동일한 수의 오칸을 쓸어버렸다. 실로 엄청난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냥을 가려고 나온 거야?”
“거물을 잡으러 왔어요. 카누바라크가 바로 우리 목표물이죠.”
포르나의 눈이 커졌다.
“그, 그렇다면 그 공고가……?”
“쳇, 들켰네. 맞아요. 그거 제가 붙여 놓은 거예요.”
포르나가 입을 딱 벌렸다.
카누바라크가 어떤 몬스터인가? 네임드 몬스터 중에서 사냥하기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몬스터가 아니던가? 멀쩡했을 당시 세아트의 파티도 카누바라크만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세실리아의 공고에 연락처를 적던 세아트에게 포르나는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파티의 힘이라면 카누바라크라는 몬스터를 잡을 수 있지 않나요?’
‘어처구니없는 소릴 하는군. 우리보다 상위의 파티가 여럿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어. 카누바라크를 사냥한다는 말은 그냥 자살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돼.’
그랬던 카누바라크를 단둘이서 사냥하러 간다고 하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만족이 오칸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완전히 허풍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곤란한 지경에 처했네요. 이곳은 매우 위험한데 말이에요.”
“우선 동료들의 유품이나 챙겨야지. 멀지 않은 곳에 말과 수레가 있어. 그것을 타고 멀리 돌아가면 될 거야.”
바로 그때 카르고와 대화하던 두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봐, 포르나. 나 계획이 생겼어. 그래서 같이 레나르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두카가 싱글거리며 어깨를 좍 폈다.
“카르고가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좍 끼치는 카누바라크를 사냥하러 간대. 놀랍지 않아? 캬! 네임드 몬스터 카누바라크라면 사냥하다 죽어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지. 해서 나도 끼워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카르고가 날 동료로 받아 준다더군. 목숨을 걸고 무기를 가져다주었으니 동료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이야.”
세실리아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 잘되었군요! 동료가 되어서 반가워요, 두카.”
두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반가워. 그런데 당신, 인간치고는 제법 예쁜데? 일족인 엘린 아가씨들보다는 못하지만 말이야.”
존대를 하지 않는 것은 이 포포리족의 특성인 듯했다. 그는 처음 보는 세실리아에게 마치 친한 친구사이처럼 격의 없이 대했다.
“어쨌거나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동료로 받아 주는 인간은 처음이야. 아니구나, 아만족이로군. 어쨌거나 밥맛 떨어지던 세아트 패거리들과는 첫인상부터 달라. 아무튼 잘 부탁해. 뭐 실력은 형편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쓸모가 많은 녀석이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아니야. 얼음 화살 날리는 솜씨를 보니 대단하던걸? 그나저나 편하게 말하도록 해. 난 존댓말을 들으면 전신의 털이 비쭉비쭉 곤두선단 말이야.”
세실리아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두카. 동료가 되어 반가워.”
세실리아의 손을 잡고 흔든 두카가 포르나를 쳐다보았다.
“포르나. 너도 파티에 가입하도록 해. 카르고가 너 역시 원한다면 동료로 받아 준다고 했어.”
바로 그때 카르고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아만족의 언어를 마법사가 아닌 포르나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기에 두카가 통역을 해 주었다.
“전투신관과 같은 권능을 지닌 여인이로군. 나를 치유해 주어서 고맙다.”
“전투신관이요?”
“아만족에도 치유의 권능을 가진 신관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 명맥이 사라졌지만 전사 못지않게 잘 싸우면서도 신력을 이용해서 동료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지. 뭐, 전투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치유 능력은 오히려 전투신관보다 더 뛰어난 것 같군.”
둘의 말은 두카와 세실리아가 번갈아 가며 통역해 주었다.
“원한다면 동료로 받아들여 주겠다. 상처 입은 날 치유해 주었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포르나는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그녀와 두카의 능력은 통상적인 모험가의 기준에 현저히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상태로서는 결코 제 몫을 해낼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카르고 정도의 뛰어난 전사가 동료로 받아들여 준다고 하면 두말없이 승낙해야 한다. 그러나 파티의 목적이 역시 문제였다.
지금 카르고 일행은 사냥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네임드 몬스터 카누바라크를 사냥하러 간다고 한다. 그녀의 상식으로 그것은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 두카가 빠진다면 나 혼자서는 레나르로 돌아갈 수 없는데.’
숨겨 둔 말을 타고 돌아간다고 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동료들과 함께 온 길은 평탄하긴 하지만 몬스터가 전혀 없는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래. 어차피 저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칸의 뱃속에 들어갔을 육신인데 말이야.’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버린 포르나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잘것없는 절 동료로 받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부족한 능력이나마 파티에 도움이 되도록 할게요. 전리품 분배는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그 말을 전해 들은 카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리품 분배? 무슨 소리지?”
두카가 싱글거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