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깨나 태평하구나?”
“태평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돈이 없으면 일하면 되는 거죠. 이렇게 큰 도시에 저 하나 일할 곳 없겠어요?”
“하하! 네 말이 맞다. 이 배짱 좋은 녀석!”
크게 웃음을 터뜨린 테이슨은 호의 깃든 눈으로 티노를 내려다보았다.
“난 지금 막 널 봤을 뿐이지만 어쩐지 어디다 던져 놔도 잘 살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 말을 많이 들어 보긴 했죠.”
“하하! 그러니 기초 군사 훈련을 막 끝냈을 뿐인 녀석을 혼자 수도에 보냈겠지. 너뿐만 아니라 네 부모님들도 배짱이 두둑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지나치게 대담하긴 하시죠.”
티노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답해서 그 숨겨진 뜻을 조금 늦게 눈치 챈 테이슨은 살짝 굳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다.
“넌 할아버지를 닮았나 보구나?”
“그런 소리도 많이 들어요.”
그것이 불만이라는 듯이 말은 하지만 티노의 눈빛엔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본 테이슨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생각에 잠겼다.
“흠…….”
티노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코코아를 홀짝였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도, 그와 빨리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곧 테이슨이 입을 뗐다.
“갈 곳이 없다면 내가 적당한 곳을 소개시켜 줄까?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운영하는 곳인데 급료는 너 하기에 달렸으니 보장할 수 없지만 숙식은 제공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티노가 거절할까 싶어 한결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전쟁 이후론 민심이 좋지 않아. 연고자 없이 정착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그런 사람을 이용하는 질 나쁜 조직도 많고. 그곳에서는 적어도 급료를 떼어먹히거나 착취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저야 좋지요.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티노가 좋다고 하기 전엔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냉큼 답했다. 테이슨의 말이 맞기도 했고 말이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더니, 사관학교엔 실망했지만 테이슨을 만났으니 손해 보지는 않았다.
“말 나온 김에 바로 갈까?”
“예!”
씩씩하게 대답한 티노는 반쯤 남은 코코아를 손에 쥔 채 일어났다.
“여기서 좀 먼데……. 피곤하진 않니?”
“체력만은 좋아요.”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잘도 싸돌아다녔던 티노에게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근데 테이슨 경은 승용물 없으세요?”
오면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승용물을 타고 다녔다. 코어가 아깝지도 않은지 백팩을 이용해 달리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녀석들도 뱅커를 타고 있었다. 친위대원이라면, 그리고 녀석들이 말한 대로 ‘선택받은 자’라면 승용물쯤은 몇 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테이슨은 아까 사관학교에서도 걸어서 나왔었다.
테이슨의 답은 짧고 간결했다.
“난 걷는 걸 좋아하거든.”
그는 잔을 단번에 비우고 일어났다.
“가자.”
테이슨과 함께 걸으며 티노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물었다.
“근데 지금 가는 곳은 뭐 하는 데예요?”
“공방이야.”
“……공방이요?”
수도까지 와서 공방이라니……. 램이 알면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경기가 날 때까지 웃어 댈 일이다. 그러고 나선 한심한 녀석이라고 티노를 쥐어박고 그간 쌓인 일거리라며 산더미 같은 숙제와 잡다한 일들을 떠넘기겠지.
티노는 고개를 홱홱 저어서 생각을 떨쳐 내고 애써 밝은 톤으로 물었다.
“뭐 하는 공방인데요?”
“음…….”
테이슨은 조금 망설이며 티노를 살펴보았다. 왜 저러나 하고 마주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말해 두는 게 좋겠구나. 시문 님 앞에서 말실수하면 두고두고 피곤해지니까. 난 그곳을 가볍게도, 우습게도 생각하지 않지만 네 나이의 아이들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
“제가 공방을 우습게 보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티노에게 공방은 집과도 같은 친근하고 정겨운 곳이다. 그래서 램의 공방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호의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램과 그 휘하 기술자들의 열정과 노력을 옆에서 접하다 보면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내막까지야 알 수 없지만 티노의 대답이 진지하고 성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테이슨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곳은 원석 가공 공방이야.”
“씨드가 없는 어스듐을 가공하는 공방 말이군요.”
티노가 냉큼 대답하자 테이슨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잘 아는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 보석을 세공하는 곳이라 생각하던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과 얘기해 본 적이 있거든요.”
어스듐을 계속 사용하면 씨드가 소모되어서 빛을 잃고 반투명한 수정처럼 변해 버린다. 그럼에도 강도는 어지간한 보석보다 강하기에 가공을 통해 조명이나 건물 장식 장신구 등에 사용되곤 한다. 씨드가 없는 어스듐에 따로 부여된 정식 호칭은 없지만 그것을 가공하는 장인들은 애정을 담아 ‘원석’이라 부른다. 자신들의 손을 통해 보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방은 원석 가공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램의 공방에서는 많은 기계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동력원은 당연히 어스듐이다. 때문에 많은 양의 원석들이 나왔고, 그것을 원석 가공 공방에서 수거해 갔다. 티노는 그쪽 직원과 친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몇 번 얘기를 한 적은 있었다. 예술적 감각이 떨어지는 티노에게 그들은 항상 신기한 존재들이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럼 너도 잘 알겠지만 공방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강해. 부디 말조심하도록 해라.”
“예.”
장인의 자부심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는 티노는 긴장감 없이 웃었다. 그 태평한 모습에 테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 차례 훑어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왜 그러세요?”
“……시선을 느낀 것 같은데…….”
“예?”
“아니다. 기분 탓이겠지.”
티노가 긴장할까 봐 일부러 가볍게 답했지만 티노는 오히려 어이없다며 웃었다.
“애걔, 뭘 그런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요?”
“응?”
“테이슨 경을 보는 사람은 사방에 널려 있다고요. 당장 제 눈에 보이는 사람만 두 손을 꼽고도 남을 정도인데요?”
그러며 티노는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수도에서도 친위대원은 희귀한 존재인 듯 곳곳에서 힐끔힐끔 시선을 던져 대고 있었다. 티노나 되니까 테이슨 옆에서 태연하게 걷는 거지, 다른 평범한 소년이었다면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아…….”
티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테이슨은 머쓱하게 웃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씨드가 없는 어스듐은 어스듐의 소모량만큼 쏟아지고 있다. 거기다 쓰임도 다양한 편이다. 가공하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다르지만 장인의 손을 거치면 어지간한 보석보다 더 귀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가공하는 공방은 일반인에겐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어스듐이 고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지만 그저 알 뿐 실감하지는 못하고 어디선가 계속 어스듐이 발견될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씨드가 없는 어스듐이 가공되어 유용하게 활용되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을 만드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 역시 어디선가 계속 만들어져 나오는 것으로 여길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없다.
테이슨이 티노를 데리고 간 곳은 규모는 크지만 그에 비해 꽤나 한산한 공방이었다. 인구수가 적은데다 전쟁을 싫어하는 스플래쉬 아일에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를 주로 만드는 램의 공방도 이보다 몇 배는 시끄럽고 복작거렸다.
테이슨이 문 옆의 방문자 벨을 누르자 통통 튀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아무리 같은 마을 사람이라 해도 방문자의 이름과 목적 등을 확인하지 않으면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램의 공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램의 공방은 무기 제작 공방이라 보안에 특히 신경 쓸 수밖에 없다지만 이곳은 심하게 무방비했다.
공방에서 나온 것은 탐스러운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귀여운 소녀였다. 하지만 티노의 눈에는 그녀가 비무장 상태라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나름 공방 생활엔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티노에겐 황당하게만 여겨지는 일이었다.
“어머, 테이슨 경! 안녕하세요!”
“하하! 오랜만이야, 라디!”
“그렇지 않아도 요즘 통 안 보이신다고 뜸하다고 말하던 중이었어요.”
“좀 바빴거든. 시문 님께 잠시 뵙자고 말 좀 넣어 줄래?”
라디는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낮춰 말했다.
“시문 님은 아침 일찍 외출하셨어요.”
“시문 님이 외출을?”
라디에게 장단을 맞춰 주느라 심각한 척 귀를 기울이던 테이슨은 정말로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 난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언제 돌아오시지?”
“글쎄요. 평상복 그대로 나가셔서 금방 오실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안 오시…….”
“절 찾았습니까?”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테이슨이었다. 그가 검에 손을 얹으며 몸을 반쯤 돌려 경계 태세를 갖춘 건, 티노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뤄졌다.
상대는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짧은 흑발에 안경을 끼고 있는 남자로 라디와 마찬가지로 비무장 상태였다. 날이 제법 쌀쌀한 편인데도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숨겨진 무기 같은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테이슨은 어깨에서 힘을 쫙 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라디는 손뼉까지 치며 남자를 반겼다.
“시문 님!”
공방을 운영한다기에 자연히 램 또래의 할아버지를 그리고 있었던 티노는 조금 놀랐다. 독립하여 공방을 낼 수 있는 건 전문 기술자 때부터 가능하니까 이쪽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란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다녀오셨어요? 점심은 드셨나요?”
“아직입니다. 배고프지 않으니 나중에 부탁드리죠.”
“예!”
자신보다 어린 여자에게도 존댓말을 쓰지만 상대를 존중한다거나 자신을 낮춘다는 느낌은 없다. 그저 단순한 습성 정도로 느껴진다. 라디에게 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테이슨에게 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테이슨처럼 온화하다거나 다정한 빛은 없었다.
테이슨은 친근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시문 님.”
“전에 뵌 것이 한 달 전인데 격조랄 것도 없지요.”
내용은 그리 부드럽지 않은데 말투만은 부드럽게 답하며 시문은 티노를 내려다보았다. 테이슨은 으레 그러려니 넘기곤 티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소개시켰다.
“아! 이쪽은 티노. 오늘 사관학교 앞에서 만난 아이입니다. 입학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알 만하군요. 그래서요?”
질문은 던졌지만 테이슨의 속내를 훤히 읽은 듯이 시문은 싱긋 웃으며 테이슨을 바라보았다. 테이슨은 꿋꿋하게 말했다.
“시문 님께서 써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부탁을 주고받을 사이였던가요? 제가 아니라도 테이슨 경께선 친구도 많고 발도 넓지 않던가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습니다만…….”
테이슨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신분의 고저에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배님과 친구였던 시문 님이라면 이 아이도 편견 없이 대해 줄 거라 믿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게 덧붙였다.
“영리한 아이입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영리하다면 애초에 사관학교에 입학하려 들지도 않았겠죠. 설마 책자에 쓰여 있는 걸 그대로 믿은 겁니까? 세 살배기도 안 믿을 소린데 말이죠.”
티노는 뚱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발끈해서 달려들지는 않았다. 데커들을 만나 현실을 접해 보니 저 말도 일리가 있는 소리였던 것이다.
“시문 님,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은…….”
“아무렴 어떻습니까? 사실인데요. 거기다 당사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테이슨은 티노의 기색을 살피며 감싸 주었지만 시문은 태연히 미소 지었다. 뒷말은 티노와 눈을 맞추며 했기 때문에 티노가 답했다.
“이왕 이리 된 거 어째요? 어차피 책자에 쓰여 있는 게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해도 오긴 왔을 텐데요. 진작 알았다면 그에 맞춰 준비했겠지만, 그런 건 이제부터 해도 되니까요.”
“흐음. 포기하지 않은 겁니까?”
“당연하죠.”
“그럼 여긴 왜 왔습니까?”
“먹고 살아야 꿈도 꾸죠.”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