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특수한 용기에 여러 시약을 넣어 끓인다. 불로 가열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이어져 있는 어스듐 라인에 어스듐을 연결하여 천천히 가열한다. 한 번 끓이면 그 온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어 어스듐만 제때 보충하면 다시 작업할 필요는 없다.
먼저 계속 가열 상태인 시약의 양을 확인하여 보충한 뒤에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는 원석을 넣어 둔다. 불순물이 깨끗이 떨어지면 원석을 건져 내어 시약을 닦아 낸다. 그 시약은 인체에 무해하기에 깨끗한 천으로 한 번 닦아 주기만 해도 된다.
특수 용기 옆에는 코어를 축출한 뒤 압축하여 캡슐에 담는 장비도 갖춰져 있지만 현재는 그걸 다룰 수 있는 코어 기술자가 없어서 방치되어 있다. 보통은 편의를 위해 신참들에게 기초적인 코어 기술을 배우게 하는데, 이곳에서는 코어 기술을 배우는 족족 그쪽 분야로 빠져 버려서 아예 포기했단다. 티노는 코어를 뽑아낼 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이 작업에 매달려 있었던 티노와 라디는 식사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한숨 돌렸다. 램의 공방에서도 코어를 축출하기 위해 이 작업을 종종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수량이 어마어마하지는 않았다.
웨이는 같은 수습 기술자 주제에 신참이 둘이나 있으니 자긴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며 몸을 뺐다. 그는 지금 구석에서 티노와 라디가 닦아 낸 원석을 가지고 어설프게 가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해 못 할 게 없다 생각했기에 둘은 당분간 참아 주자고 관대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기술자 승급시험이 얼마 안 남았던 것이다.
웨이는 벌써 두 번이나 낙방했다. 그의 실력이나 재능이 문제가 아니라 제 실력으론 턱도 없는 것에 자꾸 도전해서다. 쟁반이나 그릇 등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걸 자꾸만 장신구를 만들려 든다. 서지도 못하는데 달리려 드는 꼴이다.
남아도는 것이 원석이라 직원들은 웨이가 숱하게 말아먹는 원석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가공하다 실패한 원석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들 역시 커다란 원석을 가공하다가 어딘가 잘못되면 그대로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라 작은 흠에도 민감하게 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커다란 것을 만들려다 실패했다면 그걸 가지고 다른 작은 걸 만들면 안 되는 걸까? 웨이가 만들려고 하는 장신구는 부피가 크지도 않은데 다른 기술자들이 버리는 원석을 재활용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들어온 지 일주일이 조금 넘어가는, 그것도 숙식 해결을 목표로 들어온 뜨내기 신참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만 무지막지하게 재료를 소비하는 그들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기야 원석은 매우, 몹시, 아주 많았다. 원석은 매일 나오는데 그걸 가공하는 사람은 적다 보니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쌓여 있고, 쌓여 가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라디도 웨이처럼 원석 소모에 가세하는…… 게 아니라 원석 가공 연습을 시작한다. 그러면 티노는 조금 자유로워진다. 라디와 웨이가 연습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티노도 그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착실히 신참으로서 맡은 소행에 충실했지만 슬슬 분위기에 맞춰 가도 되는 시기가 되었다.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데?”
“무예를 가르쳐 주는 데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수업료랑 수업 수준 좀 알아보려고요.”
“껄껄! 젊은 게 좋긴 좋구나. 너무 늦지 말도록 해라.”
티노가 어떤 이유로 수도에 올라왔고, 어떤 이유로 여기에 오게 됐는지 아는 직원들은 그의 어린 방황(?)을 관대하게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제 밥값은 하고 있으니 아직 꿈속에서 허덕여도 봐줄 수 있었다.
원석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던 라디가 불쑥 끼어들었다. 티노와는 달리 원석 가공에 심취해 있는 그녀지만 아직은 호기심 많은 18살 소녀이기도 했다.
“재밌겠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상관없어. 근데 좀 많이 걸어야 할 텐데?”
“괜찮아!”
공방 소유의 뱅커가 있긴 하지만 개인 볼일을 보는데 사용할 수는 없었다. 코어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뱅커는 한 사람만 탈 수 있다. 둘이 타고 가려면 두 대가 필요한데, 그럼 코어 소모량도 두 배가 된다.
그때 힐이 인심 좋게 말했다. 라디에게 아침을 얻어먹은 값을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뱅커를 타고 가렴.”
“하지만 코어가…….”
“겸사겸사 가는 길에 원석 수거를 해 오면 되지. 수레도 가져가.”
“아! 그럼 되겠네요!”
라디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티노도 대충 감 잡고 웃었다.
어스듐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원석 역시 나라에서 관리한다. 때문에 원석 가공 공방은 나라의 허가를 받은 자만 운영할 수 있고, 원석 수거는 허가받은 공방이 있는 자만 할 수 있다. 공방 주인은 원석을 받아 오는 대신 나라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상납해야 한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공방에서 원석을 보관할 수 있도록 창고를 무상으로 만들어 준다.
원석 가공 공방의 수가 얼마 안 되는 덕에 시문의 공방이 원석 수거를 하는 구역은 광범위하다. 인력은 부족하고, 범위는 넓고, 물량은 많아서 한 번에 수거하지 않고 날짜를 정하여 순서대로 거둔다. 이 일은 그동안 웨이가 거의 다 해 왔는데 라디와 티노를 합쳐 보내면 대충 웨이 몫은 할 거라고 힐은 판단했다. 물론 그건 성실도가 아닌 단순히 힘만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화물용 승용물은 코어를 많이 소모하는데다 공방에서 한 번에 수거하는 어스듐의 양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고, 원석을 노리는 자가 거의 없어서 이곳에서는 뱅커에 수레를 다는 것으로 대신했다. 수레라기보다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바퀴가 달린 것이지만 편하게 수레라 부르고 있다. 한 번 물건을 움직일 때면 무장한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지키는 램의 공방과는 달랐다.
수레를 단 뱅커를 모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웨이는 항상 챙이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다녔다. 기초 군사 훈련 때 훈련용으로 타 본 것 외에는 뱅커를 타 본 적이 없는 라디는 시야를 가리는 모자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신나고 즐거웠다.
티노는 간만에 제대로 무장하고 나왔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것인데다, 당장 등록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무예 학원을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들 시선 같은 걸 신경 썼다면 옷부터 사 입었을 것이다.
“간만에 타는 거라 좀 긴장된다.”
“그래?”
“티노네 집엔 승용물이 있었어?”
램의 것이지만 티노가 즐겨 탔던 엑시아부터 시작해서 공방에서 쓰는 것까지 하면 열 대도 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자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 티노는 악동처럼 웃으며 말했다.
“한 대 있어. 할아버지 몰래 종종 타고 다녔지.”
……실은 아주 많이, 뻔질나게, 남들이 봤을 땐 티노 것이라 오해할 정도로 타고 다녔다.
“많이 혼났겠다.”
“할아버지가 내 나이였을 땐 나보다 훨씬 심했대. 마을의 전설로 두고두고 전해지던걸? 그런 할아버지가 날 혼내면 마을 사람들이 비웃어.”
그리곤 티노에 대해선,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며 포기했다.
“하하!”
과장이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진실을 말했건만 라디는 재미있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랑 정말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부러워. 나도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쁘진 않지.”
떨떠름한 척, 마지못해 답하는 척하지만 그 바탕에 애정이 깔려 있다는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진심으로 부럽게 여기며 라디는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그럼 나도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
“…….”
라디가 직접적인 언급을 안 하는데다 굳이 끄집어 낼 필요가 없는 화제라 넘어갔지만, 그녀 역시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걸 티노도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자연히 알 수 있었다. 라디가 은연중에 티노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티노는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에 대해 강한 상실감을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라디의 바람을 모른 척했다.
“무예 학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
“잘은 모르겠어. 나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 정도만 들어서…….”
라디는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곧 씩씩하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스듐 교환소에 가서 물어보자. 거긴 헌터나 용병들이 매일 들락거리니까 아는 게 있을 거야.”
“응.”
수레를 억지로 연결한 낡은 뱅커 두 대가 우스운 몰골로 거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시문의 공방에서 수거해 가는 어스듐 교환소는 현재 남아 있는 수도의 오분지 일에 해당했다. 일반 시민들에게서 나오는 원석들은 어스듐 교환소에서 받아다가 원석 가공 공방에 준다. 자신들의 가게에서 정제하여 깨끗한 상태인 원석과 일반 시민들이 주는 원석을 분리해서 주는 건 당연했다.
시문의 공방 직원임을 증명하는 직원증을 보여 주자 직원은 나무통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하나는 정제된 깨끗한 원석이, 다른 하나에는 일반 원석이 있었다. 수레의 뚜껑을 열자 내부가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안에 원석을 구분해서 부었다. 그걸 도와주면서 직원이 물었다.
“웨이 녀석은 드디어 관둔 거냐?”
“아니요. 오늘은 저희가 밖에 볼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나온 거예요.”
라디가 웃으며 답하자 직원은 마주 웃으며 물었다.
“그 끈기 없는 놈이 거기 왜 붙어 있는지 아냐?”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것에 매료되었다고 하던데요?”
“뭐, 솔직하게 말하긴 했네.”
직원인 낄낄거리다가 티노를 돌아봤다.
“신참?”
“티노입니다.”
“웨이가 이때다, 하고 꾀부리고 있는 모습이 훤하구나.”
“정확한 안목이십니다.”
티노가 익살스럽게 장단을 맞췄다. 그게 싫지 않은 듯 직원은 웃었다.
“너도 웨이 녀석처럼 보석을 만들고 싶어서 공방에 들어갔냐?”
라디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의아해했지만 티노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세공 방법이 실로 다양한 원석의 경우, 장인이 만든 작품은 보석으로 만든 것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하고, 비싸다. 굴러다니는 게 원석이니, 장인만 되면 작품을 뚝딱뚝딱 만들어 내 부자가 될 수 있으리란 환상을 가진 사람이 티노의 마을에도 있었다.
남의 흉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웨이 때문에 낯을 붉히고 싶지도 않아서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전 먹고 살려고 들어갔어요. 숙식이 해결되는 게 어딥니까?”
“그건 그렇지.”
웨이에게 악감정은 없는지 직원은 금방 다른 화제로 전환했다.
“숙식 해결 때문이라면 좀 더 비전 있는 공방에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코어 제작 쪽도 좋잖아?”
“하하! 소개받아서 들어간 거예요. 이쪽으로 계속 나갈 생각은 없는 걸요.”
티노는 막 비운 나무통을 직원에게 건넸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적었다. 다섯 군데만 돈다고 했으니까 다른 데도 이 정도면 수레가 다 차지 않을 것 같다. 뱅커 엔진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혹시 좋은 무예 학원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무예 학원?”
직원은 티노를 새삼스럽게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오! 제법 그럴싸한 무장이잖아? 용병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사병?”
“비슷해요.”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한테 자기 얘기를 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 정도의 지혜는 있는 티노는 싱긋 웃으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핀 학원이 최고지! 용병대나 사병대에서도 자주 찾아가서 실력 좋은 사람을 뽑아 가는 곳이거든. 수업료는 비싸지만 수준은 높다고 들었어.”
“거기가 어딘데요? 여기서 멀어요?”
“그렇게 멀지는 않아.”
그러면서 직원은 대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주소로 말해 봐야 찾아가기 힘들 테니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 줄 셈이었던 것이다. 유명한 곳이니 가는 길에 물어봐도 될 테고.
“이쪽으로 두 블록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서 쭉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보여.”
“감사합니다!”
티노는 수레 뚜껑을 얼른 닫고 뱅커에 올라탔다. 남 말하기 좋아하지만 성격이 나쁘진 않은 직원이 나무통 두 개를 양손에 든 채 무운을 빌어 줬다.
“티노는 정말 공방 일에 관심 없어?”
“응. 난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랬지. 근데 너무 적응을 잘해서……. 사실 이쪽이 천성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
“하하…….”
고향에서 이미 램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지만 머나먼 수도에 와서 생소한 분야의 공방 사람한테까지 듣게 될 줄은……. 하지만 적응을 잘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방에서 자라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티노는 그쪽으로 더 말하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
“다른 교환소는 여기서 멀어?”
“멀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지. 그래도 방향을 보니까 그 근처에 교환소 하나가 있을 것 같아. 왜 여태 다니면서 몰랐지?”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잖아. 먼저 어스듐 교환소에 갔다가 학원에 들러 보자.”
“그래!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