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성실한 어조로 제안했다.
“내가 학생 때 배웠던 책이 서재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걸 가져다주마. 시간을 내어 가르쳐 줄 테니 모르는 것은 체크해 두렴. 자주 시간 내긴 힘들겠지만 아예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많이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티노는 놀란 얼굴로 테이슨을 보았지만 생각도, 고민도, 사양도 안 했다. 넉살 좋은 그 모습에 테이슨은 피식 웃었다.
원석을 보관하는 창고는 겉보기엔 작은 일 층짜리 건물이지만 들어가면 지하로 삼사 층 높이가량 깊고 넓게 파여 있다. 수거해 온 원석을 붓는 건 일 층에서 하고, 공방에서 쓸 원석은 기술자가 직접 내려가서 골라 담아 도르래를 이용해 꺼내 온다.
티노는 수레를 창고 일 층으로 끌고 와 위의 뚜껑이 아니라 뒷면을 열었다. 수레 내부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에 맞춰 뒷면의 뚜껑도 두 개라 종류별로 나눠서 붓기 쉽게 되어 있었다. 우선 정제된 원석 쪽을 열어 수레 손잡이를 들어 올려 내용물을 쏟아 부었다. 한쪽이 빈 수레를 밖으로 꺼내고 다른 수레를 가져와 똑같은 종류를 부었다. 그리고 티노와 라디는 일반 원석을 보관하는 창고로 수레를 끌고 갔다.
내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던 라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봐.”
“뭘?”
“단순히 친위대원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달리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티노는 진지함이 결여된 태도로 대답했다.
“말할 수 없는 이유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물어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여태껏 물어보는 사람한테 답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티노는 빌처럼 주목받고 싶어서 온갖 것을 떠벌리는 성격이 아니지만 구태여 지킬 필요 없는 비밀을 간직하는 은밀한 성격도 아니었다. 문제는 여기가 수도라는 것이고, 친위대원인 테이슨이 종종 방문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기어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라디를 흘낏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공방 생활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친구에게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거기다 티노의 꿈을 그저 철부지 소년의 망상으로 보지 않고 달리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어본 사람은 지금껏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안 할게! 믿어도 좋아!”
“대단한 건 아닌데…….”
일반 원석을 보관하는 창고에 도착하자, 라디가 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귀는 티노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만나고 싶은 분이 있어.”
“친위대원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건 아니야. 사실 그분의 얼굴도 몰라. 말도 해 본 적 없어.”
“엥?”
라디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티노를 바라봤다. 이 얘기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딱 저런 표정으로 티노를 봤었다.
“9살 때, 마을 밖으로 ‘조금’ 멀리 나갔다가 몬스터한테 먹힐 뻔한 적이 있었어. 한두 마리 정도면 도망칠 수 있었는데 몇 마리인지 모르지만 엄청 많았거든.”
“아! 그 만나고 싶다는 분이 구해 준 거야?”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로 라디가 물었다. 거기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 티노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무심코 오른쪽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때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안전지대의 놀이터 밖까지 겁 없이 뛰놀았었다. 그때도 안전을 위해 기꺼이 총과 폭탄 따위를 들고 다녔기에 몬스터 한두 마리는 처리할 수 있었다. 그도 아니면 도망은 칠 수 있었다. 티노의 몇 배는 악동이었다는 전설이 있는 램은 티노가 (램 자신의 기준으로)정도만 넘지 않으면 대체로 넘어가 주었다.
그날은 운이 없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티노는 몬스터들에게 포위당했다. 폭탄을 던져서 탈출구를 뚫고 도망치려 했지만 작고 날랜 놈에게 팔목을 물렸다. 뜯겨 나가기 직전까지 물렸던 것 같다. 너무 지독해서 오히려 실감이 되질 않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총을 쐈다. 코어를 주입시키는 것까진 못 해서 위력이 강하진 않았지만 놈을 떼어 낼 수는 있었다. 양손잡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통에 움직일 수도 없고 몬스터의 수는 너무 많았다. 폭탄을 던지면 티노까지 휩쓸릴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올려 보자 몬스터의 크게 벌린 주둥이가 보였다. 촘촘히 박혀 있는 티노의 얼굴만 한 이빨과 역한 냄새가 나던 시뻘건 혓바닥, 그 끝에서 떨어지는 끈적끈적한 침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입천장에서 비집고 나오는 두터운 검신도.
그 후 몬스터는 격하게 밀린 듯이 바닥에 꽂혔고, 티노의 위로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검신의 주인이 몬스터의 머리를 짓밟고 점프한 듯했다. 그때 그에게서 무언가 둔탁한 빛을 내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티노의 손 옆으로.
이어서 몬스터의 괴성과 비명 따위가 들렸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안심이 되어서인지 티노는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흐려지는 시야에 들어온 그 반짝이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을 때, 티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램이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안심한 건지 모를 얼굴로 옆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을 때도 펴지 않았다는 손에는 처음 보는 브로치가 쥐어져 있었다.
둔탁한 방패 위로 붉은 늑대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강철의 브로치. 그 모양이 친위대의 엠블럼이라는 건 램이 말해 줘서 알았다. 아마 그 말을 들은 티노가 친위대원이 되겠다고 할 줄 알았다면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티노는 당당한 친위대원이 되어서 그 사람을 찾아서 브로치를 돌려주고 싶었다.
라디는 감탄과 감동, 거기에 두려움 등이 섞인 얼굴로 티노를 보았다.
“그런 경험이 있는데 마을 밖에 나오는 게 무섭지 않았어? 싸우는 게 무섭지 않아?”
“전혀! 그 많은 몬스터에 포위되어서도 살아남았는데 뭐가 무서워?”
티노는 대범하게 씩 웃었다. 라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범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난 친위대에 들어가서 그분을 찾아내서 브로치를 돌려드리고 싶어.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고.”
“그런 거라면 테이슨 경한테 부탁하면…….”
“아니! 내가 찾을 거야!”
티노는 브로치가 들어 있는 가슴 안주머니 위로 손을 얹었다. 라디에게는 그것이 굳건한 다짐을 다지는 것으로 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의 순진한 몽상으로만 여겼던 것이 조금은 달리 와 닿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말아 줘.”
“알았어! 절대 말 안 할게!”
진지하게 약속한 라디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저……, 그거 보여 주면 안 돼?”
“……?”
“브로치 말이야.”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런데도 티노는 일부러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창고 안으로 수레를 끌고 들어왔기에 주변이라고 해 봐야 아무도 없는 지하창고뿐이었다.
그러나 티노의 기세에 휘말린 라디는 얼른 창고 문을 닫고 창고 내부의 조명을 켰다. 티노는 내심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천천히 펼쳤다. 곧 모습을 드러낸 낡고 훼손된 브로치는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가치가 있어 보였다.
“와……! 진짜 친위대 브로치다. 정복에 다는 것 같은데?”
라디는 감탄하다가 곧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염려해 주었다.
“근데 이걸로 어떻게 찾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다면서?”
“정황으로 찾아야지. 거기다 뒤에 이니셜이 있어.”
티노는 브로치를 집어서 뒤집어 보였다. 그 뒤엔 수려한 필체로 짧은 편지가 새겨져 있었다. 편지라고 해 봐야 문구 하나가 다였고, 선물한 사람 이름이 적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자리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Dear T. K.
포기해도 후회가 남지 않을 때까지만 노력하며 살아라.
“어……. 이 말 아까 네가 했던 말이잖아?”
“응.”
“뭐야! 멋진 말을 해서 다시 봤었는데!”
라디는 놀리듯 말하며 명랑하게 웃었다. 티노도 같이 낄낄 웃으며 브로치를 다시 천에 감싸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수레의 뒷면을 열어 아까처럼 원석을 부으며 물었다.
“이게 다지?”
“응. 일반 원석은 수레 하나만 있었어.”
“쌓여 있는 건 되게 많은데 수거한 건 생각보다 적네?”
“창고에 있는 건 전부터 축척됐던 거니까.”
“그렇게 써 대는데 용케 쌓였네.”
“오늘은 다섯 곳만 거둬 온 거잖아. 이틀에 한 번씩 다른 구역을 순서대로 돌며 수거해 오는걸.”
라디는 창고 문을 다시 열고 티노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티노가 수레를 끌고 나오자 다시 창고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자! 이제 수레 집어넣고 들어가자!”
“여긴 장부 작성 안 하나 봐?”
“응. 언제 다 기록하고 있어, 이 많은 걸?”
라디는 그게 당연하다는 태도였지만 티노는 이 대책 없는 주먹구구식 운영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램의 공방에서는 나사 하나부터 코어 캡슐 하나까지 꼼꼼하게 기록하며 관리한다. 아무리 재료가 넘쳐 난다 해도 이래도 되는 걸까? 이 공방의 헐렁한 규율만큼은 적응이 안 된다.
원석 가공 공방은 크게 다섯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는 공방 주인이자 장인인 시문의 지하 작업실. 그곳은 시문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금역이다. 두 번째는 기술자들의 작업실. 넓은 방에 작업대가 여러 개 놓여 있어서 각자 자신만의 작업대를 쓰고 남의 작업대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 세 번째는 기술자들의 작업실과 복도로 이어져 있는 원석 세척실. 네 번째는 그 원석 세척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원석 보관 창고. 마지막으로 숙식을 하는 직원들의 숙소와 식당이 있다.
사람들이 퇴근하고, 청소가 끝나고, 불을 끄고 나면 숙소를 제외한 공방은 어둡고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있을 때는 들리지도 않던 원석 세척기의 소리만이 울린다. 그리고 좀 더 밤이 깊어지면 숙소까지 완전히 조용해진다. 얼마 전부터 바로 그때를 노려 움직이는 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숙소에서부터 원석 세척실까지 불을 켜지도, 조명등을 들지 않고도 유유자적하게 이동했다. 그리곤 문을 꼭 닫고 들어가서 이미 닫혀 있는 덧창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에야 불을 켰다. 쓰고 있던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며 씩 웃는 그의 정체는 이 공방의 신참 소년, 티노였다.
티노는 세척실 구석에 쌓여 있는 나무통 쪽으로 갔다. 그 안엔 일반 원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까 오전 작업을 할 때 일부러 넉넉하게 가지고 와 남겨 놓은 것이었다.
그는 나무통을 들고 세척기 옆의 계단을 올라 끓고 있는 시약 안에 원석을 죄다 부었다. 그리곤 내려와 의자에 앉아서 투명한 세척기 안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세척기가 워낙 커서 훨씬 더 많은 원석을 넣을 수 있지만 원석들이 적당한 상태가 되었는지 체크하려면 저 정도가 적당했다.
원석을 세척하는 것과 어스듐을 정제하는 것은 똑같은 작업이다. 똑같은 기계에, 똑같은 배합의 시약을 쓰고, 똑같은 작업 과정을 거친다. 다른 건 걸리는 시간뿐이다. 전자는 단순히 불순물을 닦아 내는 것이지만 후자는 어스듐 내의 씨드를 뽑아 코어로 만들도록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보다 후자가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린다.
똑같은 어스듐이라도 코어 기술자의 수준에 따라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코어의 양은 다르다. 코어 기술자의 실력이 낮을 경우엔 어스듐에 소량의 씨드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티노는 그 소량의 씨드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쪽쪽 뽑아낼 줄 알았다. 램의 공방에서 어스듐을 정제하여 코어로 만드는 일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이리저리 실험하다가 요령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 후, 티노는 작업을 할 때 일부러 소량의 씨드를 남겨 놨다가 원석 가공 공방에서 수거해 가기 전에 몰래 마저 작업하여 야금야금 코어를 모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코어를 램의 공방을 찾는 사냥꾼에게 팔아서 돈을 벌었다. 바로 그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고, 수도에서 며칠 지낼 여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핀 학원의 수업료는 역시나 비쌌다. 사관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공방에서 받는 급료로는 몇 달을 모아야 한 달 수업을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왕년에(?) 즐겨 했던 이 부업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넘쳐 나는 게 원석이니 최상의 환경이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