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척기 안을 집중하여 바라보던 티노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세척기 옆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끝에 그물망이 달린 막대기로 안을 헤집으면서 완벽하게 활성화된 것을 골라내어 나무통에 도로 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건져 내다가 드디어 세척기 안이 다 비었을 때 망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건져 낸 원석, 아니 소량의 씨드만 남은 어스듐을 하나 들어서 줄자로 사이즈를 재고 불에 비춰 본 뒤 코어 축출기에 넣었다. 그리곤 그에 맞는 압력 수치를 입력하여 가동했다. 그 압력 수치는 어스듐의 크기, 그 안에 담긴 씨드의 양과 그것의 활성화 정도 등등을 복잡한 공식을 통해 계산한 것으로, 이것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 씨드를 전부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스듐 조각을 일일이 계산해야 하고, 코어 축출기에 한 번에 하나만 넣어 작업하는 수밖에 없다. 시간과 정성이 너무 많이 드는 작업인지라 어스듐 교환소에서 일하는 코어 기술자들은 대체로 대량의 어스듐을 축출기에 넣어서 평균값을 입력하여 뽑아내는 것에 그친다.
티노는 축출되어 나오는 코어를 캡슐에 담았다. 캡슐은 손바닥만 한 길이의 작은 것이지만 최대 1갤런의 코어를 담을 수 있다. 코어가 압축되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당장 담을 수 있는 코어가 1갤런이 못 된다 해도 상관없다. 비어 있는 용량만큼 언제든 담을 수 있으니까.
티노의 작업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계산도 즉각 했고, 축출되는 코어를 캡슐에 담는 행동도 신속 정확했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 나무통 하나를 비운 티노는 캡슐에 담긴 양을 확인했다. 겨우 반이 조금 넘었다. 그것도 요 며칠 해서 간신히 모은 거다.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 일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나무통 하나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뒷정리를 할 차례다. 캡슐은 주머니에 넣어 놓고 코어 축출기를 깨끗이 닦아서 사용한 흔적을 지웠다. 이제는 진짜 ‘원석’이 된 것들을 나무통에 도로 담았다. 이걸 창고에 넣어 두면 끝이다.
나무통은 애초에 여러 개 갖다 놨기에 하나 정도 빈다 해서 들키는 일은 없다. 이 설렁설렁한 공방에서는 특히나. 아직도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이용 못 할 건 없다. 그리 생각하며 나무통을 들어 올리는 티노의 뒤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죠?”
“힉?!”
티노는 순간 나무통을 놓치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이 공방의 설렁설렁한 규율과 무방비한 보안 상태를 얕보긴 했어도, 몰래 움직이는 것이라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누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시, 시문 님?”
시문은 세척실 안쪽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티노를 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미소를 짓는 듯 휘어져 있었지만 온화한 빛은 거의 없었다. 티노는 무엇보다도 그가 세척실 안쪽에 있다는 것에 놀랐다. 들어올 때 분명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고, 문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말이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세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군요.”
대체 언제 온 걸까? 어디서부터 본 거지?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티노를 보며 시문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작업을 하더군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던데요?”
……다 봤구나! 티노는 결국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전 그저 버려진 자원을 주워다 쓰는 것뿐인데요.”
“공방의 기계를 쓰고 있잖습니까?”
“아, 치사하게! 이용료라도 내라는 거예요?”
“그 생각은 미처 못 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시문 님은 장인이시니 기계에 드는 어스듐이나 코어는 국가에서 지원해 주잖아요? 시문 님 물건을 훔치거나 축낸 것도 아닌데 좋게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기계는 자꾸 써 줘야 고장이 안 나요.”
티노의 넉살 좋은 애걸에 대한 시문의 답은 전혀 바라지 않던 방향에서 나왔다.
“공방 운영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 정도예요.”
“그런가요?”
“그럼요. 아니면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시문은 말없이 티노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매일 그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며칠 안 됐어요. 핀 학원 수업료가 비싸서 부업 좀 뛰어 볼까 했죠.”
“비효율적인 부업이군요. 그렇게 모아서 언제 돈을 벌겠습니까?”
얄미운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티노도 그리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라서 입술만 삐죽였다.
“한 통 더 해 보세요.”
“예?”
뜬금없는 소리라 티노가 눈만 껌벅이니까 저편에 쌓여 있는 일반 원석을 가리켜 보였다.
“한 통 더 해 보라고요.”
“아뇨. 이만 정리하고 들어가서 자야 내일 일을…….”
“비효율적인 부업이니 물량으로 때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양할 거 없습니다.”
시문은 아예 의자를 끌어다가 발을 꼬고 앉았다. 그리곤 우두커니 서 있는 티노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왜요? 동정 같아서 싫습니까? 그럼 사용료를 내…….”
“지금 바로 시작해 볼까요!”
바닥에 떨어뜨렸던 나무통은 한쪽에 치워 놓고 일반 원석이 들어 있는 나무통 쪽으로 냉큼 달려갔다. 시문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작정하고 구경하겠다는 심보가 느껴졌다.
그날 밤, 티노는 일반 원석이 가득 담겨 있는 나무통 네 개를 더 비워야 했다. 시문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전혀 고마워할 생각이 없는 자신에게 멋대로 겸양의 말을 하고 가 버린 시문을 향해 티노는 이를 벅벅 갈았다. 덕분에 밤을 꼴딱 새워 버렸다. 하루 잠을 못 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째 정신적으로 고단했다. 특히 점심을 먹은 뒤엔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창고에 들어가 조금 자기로 했다.
정제된 원석을 보관하는 창고는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일반 원석이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어둡고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서 낮잠 자기 딱 좋았다. 어스듐 교환소에서 원석을 수거해 온 것이 어제고, 오늘 분량의 원석 세척도 끝났으니 오늘은 더 이상 사람이 오지 않겠지.
창고 아래로 향해 있는 계단을 내려가서 계단이 다른 방향으로 꺾이는 층계참에 누웠다. 만약 누가 온다 해도 여기라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조금 춥긴 했지만 두툼한 외투를 겹쳐 입고 왔더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눈을 감자 금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드르륵.
매끄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와 흠칫 눈이 떠졌다. 이쪽 창고의 하나밖에 없는 문은 경첩에 기름칠이 안 되어 있어서 열 때마다 삐꺼덕거린다. 저렇게 매끄러운 소리를 낼 만한 문은 없다. 어디서 들린 거지? 티노는 고글을 쓴 뒤 두툼한 옆면을 조작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노가 직접 만든 이 고글은 망원경뿐만 아니라 돋보기에 야간경 기능까지 있다. 그것도 대낮에 보는 것처럼 훤하게 보이는 고급 야간경이다. 대신 이 기능을 쓸 때는 코어가 조금 소모되는데, 고글 내부에 초소형 캡슐이 장착되어 있어서 백팩이 없어도 언제든 쓸 수 있다.
“음……?”
티노는 몸을 낮춘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창고의 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좀 전까진 없던 것이다. 거기에 윙, 하고 작은 소리가 나더니 구멍 너머에서 발판 같은 것이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보자 폭이 좁은 화물용 무빙벨트였다.
곧 그것이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구멍 너머에서 무언가가 실려 와 창고 안으로 떨어졌다. 확대해서 보니 전부 일반 원석이었다. 꾸역꾸역 계속 쏟아지던 일반 원석들이 마침내 동나자 무빙벨트는 안으로 들어가고 벽의 구멍이 메워졌다.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로 그것의 위장은 완벽했다.
“저게 뭐냐?”
저런 게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얼마 전부터 웨이가 작정하고 떠넘긴 덕에 라디와 함께 원석 수거를 하고 있는 티노다. 저런 게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했다. 대체 저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창고의 위치와 구멍이 뚫렸던 방향을 따져 봐도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살펴봐 볼까?’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문이 덜컹 열렸다. 이번엔 티노도 알고 있는 문 쪽이었다.
“티노! 여기 있지?”
라디였다. 그녀가 티노를 찾아낸 것은 신기할 것이 없었다. 점심식사 후엔 라디도 웨이도 자율시간을 갖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자러 나오긴 했지만 업무시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서 행선지는 밝혀 뒀던 것이다.
티노는 야간경 기능을 끈 뒤 도로 고글을 이마 위에 올렸다. 그리곤 방향을 바꿔 계단 위를 올라갔다.
“무슨 일이야?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조금 자고 오겠다는 티노에게 안 그래도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며 푹 쉬고 오라고 했던 라디다. 얼마나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찾아왔다는 건 티노가 필요한 일이 생겼다는 거겠지.
“테이슨 경이 오셨어. 공방 밖에서 기다리셔.”
“테이슨 경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왕실 예법 등과 관련된 교재를 갖다 주기로 약속하곤 그동안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바쁘다는 걸 알기에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공방 밖으로 나가자 테이슨이 맞은편의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왼쪽에는 열 권가량 되는 책들이 줄에 묶여 쌓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음료수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티노가 다가가자 음료수 두 잔을 들어서 하나를 티노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따뜻한 차가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티노는 냉큼 받아 들고 테이슨의 오른쪽에 앉았다.
“잠을 깨워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깨 있었어요.”
테이슨은 책 뭉치 위에 손을 얹었다.
“책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어서 찾느라 늦었다. 기다리게 했구나.”
“주시는 게 어딘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가식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티노의 모습에 테이슨은 슬쩍 웃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선물 주는 보람이 있었다.
“내가 공부했던 것이라 깨끗하진 않지만 보기에 불편하진 않을 거야.”
“내용만 읽을 수 있음 됐지요!”
싱글벙글 웃으며 음료수를 마시는 티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테이슨이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혼자 공부하는 게 쉽진 않을 거야. 핀 학원도 수업료가 비쌌다면서?”
“어쩌겠어요? 차근차근 하는 수밖에.”
“하…….”
지나치게 대범한 건지, 지나치게 낙관적인 건지 알 수가 없는 티노의 대꾸에 테이슨은 헛바람처럼 웃었다.
“이것까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귀족이나 친위대원의 정당한 이유가 있는 추천을 받은 사람은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단다.”
“예, 들었어요.”
“내가 널 추천해 줄 수도 있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시큰둥하게 답하며 차를 홀짝이던 티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이슨을 올려다봤다. 테이슨은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가능하지.”
“…….”
말없이 듣고만 있는 티노를 보며 테이슨은 한층 진지한 얼굴을 했다.
“전에 현상수배범을 잡은 걸 본 뒤로, 그리고 네 결심이 확고한 것을 깨달은 이후로 계속 고민했어. 위험하니까. 네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그냥 철회하고 말까 고민할 정도로.”
“어떤 일인데요?”
티노는 주눅 들지도, 들뜨지도 않은 여상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태도에 테이슨은 조금은 번뇌를 떨쳐 낸 듯했다. 그는 신중하게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현상수배범을 잡았던 날 내게 지령이 내려왔단다.”
굉장히 흥미가 가는 이야기라 티노는 음료수 잔도 내려놓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에 비해 테이슨은 어디까지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너도 어스듐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자원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것을 사적인 이득을 위해 빼돌리는 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라는 것도.”
“당연하죠.”
“몇 년 전부터 어스듐 광산에서 상당한 양의 어스듐이 빼돌려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단다. 왕명을 받아 우리가 감시 및 조사를 해 왔지. 그리고 정말로 어스듐이 빼돌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알아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군사를 동원해서 잡아들이면 되잖아요?”
“이론적으론 그렇지만 현실적으론 힘들어. 장부나 계약서 따위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이 아니니까. 정황만으로 잡아들이려다간 오히려 이쪽이 역공당할 거다. 배후가 거물급 귀족이거든.”
“그럼 증거 확보를 하라는 지령을 받으신 거예요?”
테이슨은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는 빼돌려지고 있는 어스듐의 이동 경로를 신중하게 추적해 왔단다. 그 작업에만 거의 1년이 걸렸어. 결국 마지막 종착지라 추정되는 곳을 찾아냈지. 그곳도 경유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곳을 거쳐서 나가는 어스듐은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종착지라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로 했단다. 그게 며칠 전 일이야.”
“그럼 제가 할 일은 없는 거 아닌가요? 염탐이라면 저보다 테이슨 경께서 하시는 게 백 배 나을 텐데요? 경계가 삼엄할 거 아녜요?”
“그게……. 일이 참 난처하게 됐달까? 그 종착지가 나한테는 좀…….”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