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하는 거야? 디나르 가라면 정말 명망 있는 곳이라고! 거긴 사병 대우도 좋단 말이야. 급료도 네가 지금 받고 있는 거에 몇 배는 더 받을 걸?”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다니까요.”
“원석 가공 쪽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벌써 예전에 한 번 오간 문답인데도 그는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티노가 사병이 된다고 그에게 뭐가 떨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시문 님의 공방에서 일하는 걸로도 충분해요.”
티노는 씩 웃고 수레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아직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오라를 모락모락 피우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냉큼 출발했다. 저런 식으로 티노에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몇 명 더 있었다. 예외적인 사람은 웨이인데, 그는 아주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티노를 노려봤었다. 시샘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은 그보다 훨씬 어린 빌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고 보면 둘의 수준이 똑같은 것 같긴 하다.
두 번째 어스듐 교환소까지 들른 뒤, 돌아오는 길에 테이슨과 마주쳤다.
“여어, 티노.”
“안녕하세요, 테이슨 경!”
반갑게 웃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일부러 장소를 정하지 않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석 수거 중인 거니?”
“예. 오늘 분량은 끝났어요.”
이틀에 한 번씩 다섯 군데를 돌며 수거하던 것을 티노 혼자 돌게 되면서부터는 하루는 둘, 그 다음은 셋, 이런 식으로 수거하게 되었다. 오늘은 두 곳만 도는 날이었다.
“아는 사람이 이 근처에 카페를 하는데, 갈래? 케이크가 맛있더라.”
“사 주시면야 가지요!”
“하하!”
이 또한 사전에 얘기해 둔 장소지만 티노의 넉살 섞인 대답만은 진심이었다. 그리하여 가게 된 카페는 작고 아담한 곳으로 탁자가 세 개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교묘하게 사각지대라 카운터에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주인장과 눈인사를 하고 들어온 테이슨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 뒤를 따라가기 전까진 그곳에 탁자가 있는 것도 몰랐던 티노는 헤에, 하고 감탄했다. 일부러 밀실을 만들지 않은 것이 더욱 치밀하게 느껴졌다.
“마음껏 시켜라.”
“이거랑, 이거랑, 이거요.”
사양 않고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들을 쭉 고른 뒤 음료는 진한 커피로 시켰다. 테이슨은 그것이 의외인 듯했다.
“쓰지 않니?”
“별로요.”
티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답하며 가방을 뒤졌다. 램의 공방에서 일하다 보면 자연히 입에 붙게 되는 것이 커피다.
“결정적인 걸 알아내진 못했어요.”
가방에서 갈색 종이봉투를 꺼내어 주둥이를 열었다. 안에는 사진들이 있었다. 그것을 날짜별로 늘어놓았다.
테이슨은 심각한 얼굴로 사진들을 뜯어보았다. 하지만 공방 생리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들여다봐야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세하게 양이 늘긴 했는데 그건 매일 원석을 수거하니까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쪽에 쌓여 있는 원석이 제가 돌면서 수거한 원석들이에요. 세척할 때도 일부러 이쪽 것으로 했어요.”
티노는 구석에 쌓여 있는 아주 작은 원석 무더기를 가리켰다. 그것은 날짜가 지나도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 아예 눈여겨보지도 않았었다.
“유입되는 양에 비해 쌓이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구나.”
“예. 어스듐이 유입되고 있는 건 확실해요. 단순히 유입되거나 모이는 것이 아니라 쓰이고 있는 거죠.”
“어디에?”
“그것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티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원석 가공 공방에 대해선 테이슨 경만큼이나 몰라요. 다른 공방들은 어떤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니까 다른 공방의 원석 재고량과 유입량, 소모량은 어떤지 은밀히 알아봐 주세요.”
“그거야 문제될 거 없지.”
“그리고…….”
티노는 사진 속 창고 한쪽 벽면을 짚으며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테이슨은 그가 짚은 부분을 집중해서 보며 물었다.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뇨.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
비밀통로는 그날 이후로 여태껏 보지 못했다. 어지간히 시간대가 안 맞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증거 사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한 정보가 더해지지 않으면 말할 의미가 없다. 테이슨이 다른 공방의 정보를 가지고 온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때쯤이면 저 통로도 한 번쯤은 다시 볼 수 있겠지.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테이슨은 여전히 사진을 뜯어보면서 진지하게 답하다가 문득 티노를 바라봤다.
“왜요?”
“아니…….”
말끝을 애매하게 흐리는가 싶더니 이내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줘서. 정말 똑똑하구나. 믿음직해.”
“하하! 나중에도 꼭 그렇게 추천해 주세요.”
“물론이다.”
테이슨이 듬직하게 고개를 끄떡이는데 마침 커피와 케이크가 왔다. 티노는 접시 놓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진을 치우기 시작했다. 테이슨도 거들었다.
“음?”
“왜 그러세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아니. 사진이 섞여 들어왔나 보다.”
“그래요?”
티노는 탁자 위에 하나둘씩 놓이는 케이크들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답했다. 이상한 사진을 찍은 적이 없으니까 뜨끔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남들 눈에 띄면 곤란한 것들이라 테이슨과 헤어지면 가는 길에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테이슨은 감탄하며 티노 쪽으로 사진을 내밀었다.
“멋진 사진인데?”
“……?”
케이크를 막 한 입 떼 먹고 있었던 티노는 포크를 입에 문 채로 테이슨이 내민 사진을 보았다.
“……!”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입 안의 것을 꿀꺽 삼킨 뒤 애써 침착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사진들을 숨겨 놓기 위해서 트렁크에 넣어 뒀었는데 그 안에서 섞인 모양이다.
“듀오 루나인가?”
“……예. 그렇다고 하던데요.”
티노는 마치 자기도 들어서 알게 된 것이라는 듯이 답했다.
테이슨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티노가 11살 생일에 찍었던 듀오 루나의 밤하늘이었다. 물 빠진 보랏빛 자태를 뽐내는 화려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밤하늘 사진. 티노에게는 훈장이나 마찬가지라 두고 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티노의 고향이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램에게 들킬 위험도 있고, 자신의 은인을 몰래 찾을 때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찍은 거니?”
“저도 몰라요. 친구가 준 거라.”
“그래? 나도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 오는 건데 생각을 미처 못 했군.”
“……?!”
티노는 눈을 부릅떴다가 조금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듀오 루나에 가 보신 적 있어요?”
“몇 년 전에 한번 가 봤지. 엑서디움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였던가…….”
테이슨은 티노의 반응을 신비로운 지역에 대한 소년의 호기심쯤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노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엑서디움 전쟁이 끝난 건 7년 전이다. 당시 티노는 9살이었다. 티노가 몬스터에게 잡아먹힐 뻔하다 정체불명의 친위대원에게 구해진 것도 그때다. 듀오 루나에 갔다면 반드시 스플래쉬 아일에 들렀을 것이다.
티노는 일부러 테이슨에게서 시선을 돌려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 먹으며 생각했다. 테이슨은 사람이 좋고 다정하다. 사관학교 앞에서 귀족 꼬마들한테 놀림을 당하고 있는 촌뜨기 소년을 배려해 줄 정도로. 귀찮은 것도 무릅쓰고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고 교재를 찾아서 가져다 줄 정도로. 그런 그라면 몬스터에게 먹히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나서고도 남는다.
수도에 와서 처음 만난 친위대원이 그때의 은인이라는 그런 대단한 우연이 있을까 싶지마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럼 직접 두 개의 달도 보셨겠네요?”
“그래, 무척 근사한 광경이었지. 이 사진도 멋지구나. 그 광경을 잘 담아냈어.”
“저도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듀오 루나엔 어떻게 가셨어요? 비행선?”
“하하! 스플래쉬 아일까지 비행선으로 간 뒤에 승용물로 바다를 건넜지. 스플래쉬 아일의 남부에서 이동하면 금방 도착하거든. 한 시간 정도 걸렸었나?”
“그렇구나!”
티노는 커피를 마시는 척 얼굴을 숙였다. 역시 테이슨은 스플래쉬 아일에 온 적이 있다. 그것도 남부에. 그것만으로 속단할 순 없지만 가능성은 높아졌다. 티노의 속을 알 턱이 없는 테이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사진을 돌려주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듀오 루나까지 갈 것 같구나. 하지만 그곳은 레나센시아와는 달라. 인적도 거의 없는데다 플로레스라가 출입하는 곳이다. 위험에 처해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넌 말려도 소용없을 것 같으니 길게 말은 하지 않겠다만, 갈 때는 충분히 강해진 뒤에 가도록 해.”
“예! 그럴게요!”
11살 때부터 뻔질나게 그곳을 들락거렸던 티노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도 대답했다. 그 속내를 알 턱이 없는 테이슨은 마주보며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티노는 생각이 딴 데 가 있어 맛도 제대로 안 느껴지는 케이크를 맛나게 먹는 척하며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테이슨 경은 가문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말 안 했었나? 켈러다. 테이슨 켈러.”
“그렇구나.”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것처럼 티노는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떡이고 말았다. 하지만 속은 두근두근 떨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천으로 감싸서 부피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테이슨 켈러. Tayson Keller.
T. K.
설마……!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