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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16화

제5장 성벽 위의 플로레스라
제5장 성벽 위의 플로레스라
[데일리게임]


* * *

“하아…….”

깊이, 깊이, 깊이 한숨을 쉰 티노는 들고 있는 나무통 안의 원석을 세척기에 쏟아 부었다.

“하아…….”

그리고 다시 깊이 한숨을 쉬며 계단 아래의 저편을 돌아봤다. 요 며칠 동안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시문이 나무 의자에 발을 꼬고 앉아서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말없이, 묵묵히, 뚫어져라.

“저 원석 안 빼돌리거든요? 감시하실 필요 없다고요.”

“빼돌려 봐야 팔 데도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만날 와서 보시는 겁니까? 제가 뭐 대단한 거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재미있어서 그럽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경 쓰인다고, 이 사람아! 티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시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세척기 안을 바라보았다. 시문은 티노가 아닌 세척기에 넣어진 원석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티노의 작업과정이 대단히 흥미로운 듯했다.

하지만 티노 입장에서는 영 불편했다. 그와 연루되었다 생각되어지고 있는 사건을 몰래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 켕기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당사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작업을 관두기도 그랬다. 일이 잘되어서 테이슨의 추천으로 사관학교를 간다 해도 돈은 필요하다. 이렇게 널려 있는 돈벌이들을 외면하는 건 티노에겐 참으로 힘든 일이다. 게다가 티노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시문이 알고 있는데 갑자기 관둬 버리면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날과는 달리 밤새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두 통은 해야 했지만.

늘 말없이 작업과정을 지켜만 보고 있던 시문이 처음으로 물었다.

“가족과 연락은 하고 지내는 겁니까?”

“……아뇨.”

공방에서 일하고 있는 걸 알면 평생 놀림감이 될 게 뻔한데 미쳤다고 연락을 하겠는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 점만은 확실했다.

“전 어디에 던져 놔도 잘 살 놈이란 소릴 많이 듣거든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시문은 피식 웃었다. 처음으로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생각에 티노는 별 생각 없이 묻는 척 질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 계시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아니요. 전 원래부터 제 영역 안에 있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요.”

티노는 아르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녀석도 연구할 재료와 먹을 것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살 수 있는 놈이었다.

친구 생각은 슬쩍 떨쳐 내고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원석을 고르러 나오는 것도 못 본 것 같은데……. 선배님들이 골라 온 걸로 쓰시나요?”

아니라는 걸 알고 던진 질문이다. 수습 기술자인 라디나 웨이조차도 자신이 가공할 원석은 직접 고른다. 다른 기술자들도 말할 것 없다. 마음에 드는 원석이 없다면서 며칠 동안 창고를 헤집었던 사람도 있었다. 티노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다.

시문의 답은 깔끔했다.

“요즘 슬럼프라서요.”

“아, 예…….”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슬럼프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램은 생각이 얽히고설키면 때때로 발작을 일으켰는데, 심할 때는 공방 운영 자체가 멈추기도 했다. 어쩌면 시문이 티노가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것은 일종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티노가 처음 공방에 왔을 때 시문은 외출을 했다 들어왔었다. 그때는 라디와 테이슨의 반응이 황당했는데 지금은 백분 공감할 수 있다.

“그럼 작업실에선 뭐 하고 지내세요?”

염탐꾼으로서는 유치할 정도로 직설적인 질문이었지만 지금의 티노는 어디까지나 수습 기술자! 대화의 흐름을 좇아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일 뿐이다.

“달리 하는 건 없는데 시간은 잘만 가더군요. 그래도 라디 양이 하루 세 끼를 챙겨 주는 덕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는 알고 지냅니다.”

“하하…….”

부드럽기 짝이 없는 지적인 목소리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하니 맥이 빠진다. 저 말대로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면 진짜인 것처럼 여겨져 버린다.

“원대한 꿈을 향해 하루하루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티노 군에게는 한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군요.”

“……뭔가 비꼬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기분 탓이겠지요.”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음성임에도 듣는 사람 기분은 참…….

“뭐야? 왜 불이 켜져 있……!”

언성을 높이며 벌컥 문을 연 사람은 바로 웨이였다. 약하게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한 잔 걸치고 들어오는 길인 것 같다. 가볍게 마신 정도인지 시문을 보곤 바싹 굳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식사를 배달하는 라디 외에 시문과 대면하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수습 기술자인 웨이에게는 특히나 구름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티노는 본의 아니게 하루에 몇 시간씩 얼굴을 마주하지만, 그 역시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술기운이 싹 달아났는지, 웨이는 시문을 보고 기겁한 것을 넘어서 그가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늦게 티노를 발견하곤 눈을 부라렸다.

“넌 여기서 뭐 하냐?”

뭐라고 답해야 하나? 티노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했다. 원석들 중 씨드가 소량 남아 있는 어스듐을 골라내어 코어를 만들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는 건 원치 않는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자니 진실을 아는 시문이 뒤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다.

티노가 뭐라 답해야 할지 결정 내리기 전에 웨이의 시선이 세척기에 닿았다. 커다란 세척기 안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는 원석들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다.

“원석을 왜 지금 닦는 건데?”

현재 시간만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수상하게 볼 이유가 없는 광경인데도 웨이는 마치 덜미를 잡았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쏘아붙였다.

무조건 잡아떼자! 그렇게 결정한 티노가 막 입을 열려는데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시문이 나섰다.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시, 시문 님이요?”

“예. 당장 필요해서요.”

“예에…….”

웨이는 단박에 기가 확 죽어서 우물우물 말했다.

“미숙한 신참을 시키느니 절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일하는 걸 좋아했다고? 티노는 헛웃음을 삼켰다.

웨이는 시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라디를 뭐라 할 군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디와 같은 풋풋함은 전혀 없는 계산속 가득한 눈동자였다. 너무 티가 나서 민망할 정도로.

“신참을 시키려니 불안해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거군요?”

“이제 막 넣는 것만 봤을 뿐입니다. 저보다는 밤새 수고해야 하는 티노 군이 고생이 많겠지요.”

“밤새요?”

티노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가만히 있으려 했으나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단히 불길한 단어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시문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티노를 바라보았다.

“밤새요.”

“……예, 밤새 해야 했었죠. 하하…….”

저건 협박이다, 협박! 어색하게 웃다가 한숨을 쉬는 티노에게 시문은 다정한 척 말했다.

“괜찮습니다. 옆에 있어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니요. 전 혼자 있어도 괜찮……지 않지요. 예, 같이 있어 주시면 감사하지요. 암요. 하하…….”

시큰둥하게 답하다가 시문의 미소가 한층 진해지는 것을 보고 얼른 말을 바꿨다. 저것도 협박이었구나!

“아, 그럼 저도 돕겠습니다!”

어떻게든 시문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던 웨이가 나섰지만 시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일에 두 명이나 붙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단하실 텐데 들어가 쉬십시오.”

“하지만 티노보다야 제가…….”

“내일도 부지런히 승급시험 준비를 하시려면 일찍 주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만 가 보십시오.”

“그, 그게…….”

찔리는 게 많은 웨이는 당황해서 말을 못 이었다. 놀란 것은 티노도 마찬가지였다. 웨이가 평소에 농땡이를 친다는 걸 아는 말투가 아닌가? 작업실에 콕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라디가 식사 배달을 하면서 말한 건가?

티노는 갑자기 뒤통수가 따끔거려 오는 걸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웨이가 분노와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티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고자질했구나, 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때 시문이 찬물을 끼얹었다.

“왜 안 가고 거기 서 계십니까?”

“아,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쨌거나 선배라 인사는 해야겠기에 한마디 하자 웨이는 전보다 더 사나운 눈으로 티노를 노려봤다. 그리곤 홱 돌아서 나가 버렸다.

티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하는 짓이 빌하고 똑같은 사람이다.

“저거 건져 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시문이 세척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눈치가 비상한 사람이니 웨이의 기색을 모를 리 없건만 귀찮은 거 치웠다는 정도의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티노도 웨이를 크게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다. 저 사람도 저 사람대로 문제다.

티노는 세척기 안을 꼼꼼히 살펴본 뒤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그렇군요. 앉으세요. 밤은 긴데 체력을 아껴야지요.”

“……그거 참, 감사하네요.”

기어이 밤새 시킬 속셈이군. 티노는 치를 떨며 의자에 앉았다.

“이제는 티노가 가져다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

웨이가 삐딱한 음성으로 딴죽을 걸기 시작한 것은 라디가 아침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가려 했을 때였다. 밥상 다 차려진 뒤에야 슬렁슬렁 나오던 인간이 웬일로 조금 일찍 나왔다 했더니 이럴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말이에요?”

“티노가 시문 님과 친하잖냐?”

“티노가요?”

라디는 저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티노를 보았다. 티노로서는 대단히 억울한 일이었다. 시문은 티노의 독특하고도 궁상맞은 코어 제작과정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웨이가 왜 저러는지는 알기에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웨이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뭐야? 너도 몰랐냐? 시문 님께선 굳이 지목해서 중요한 부탁을 할 정도로 티노를 신임하시잖아. 어제도 밤새 같이 있었지?”

“원석 세척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탁인 줄 몰랐는데요? 그리고 시문 님은 제가 일하는 걸 잠깐 보다가 들어가셨어요.”

밤새 같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 상황에서 그걸 솔직하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시문 님과 어제 만난 거야? 시문 님이 너한테 원석 세척을 시켰어?”

대수롭지 않게 답했건만 라디는 두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옆에서 웨이는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즐겁게 구경하고 있었다.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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