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수도를 감싸고 있는 성벽은 휴전 후 새로 쌓아 올린 것이다. 예전 것은 전쟁으로 무너진데다가 수도의 외각지대가 파괴되어서 현재 건재한 부분만을 감싸도록 범위를 축소해 만들었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위험도 있고, 기존의 성벽이 무너지자 침범해 오기 시작한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방어선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빠듯한 예산과 촉박한 시간 속에서 급히 지어진 성벽은 견고함이 떨어졌다. 때때로 몬스터가 무리를 이뤄 침입하면 바로바로 보수공사를 해 줘야 했고, 거기에 보강공사까지 수시로 이뤄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몬스터와의 전투, 한쪽에서는 보수공사, 한쪽에서는 보강공사, 그 와중에 탈주병까지 속출하여 성벽 쪽은 특히나 복잡하고 시끄럽고 위험했다.
성벽 쪽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들이 흔하게 보였다. 그들은 대신 기계 팔이나 다리 등을 달고 있었다. 기계공학이 발달하면서 일부러 강한 힘을 원해 자신의 몸을 개조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지만 그보다는 전쟁에서 잃어 대체한 경우가 더 많았다. 개중에는 머리의 반쪽이 기계로 된 자도 있었고, 아예 머리 전체를 덮는 기계 투구를 쓴 자도 있었다.
티노도 9살 때 몬스터에게 조금만 더 깊이 물렸으면 오른팔을 절단했어야 했다. 고급 기계 팔을 쓸 경우 오히려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하기에 기술자 중에는 일부러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아직은 타고난 신체 쪽이 좋았다.
흉흉하다면 흉흉한 외각이었지만 낡은 뱅커를 느긋하게 몰고 있는 티노의 얼굴엔 긴장이나 불안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뱅커에는 예의 수레가 억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수레 안에는 커다란 성벽용 조명등이 들어가 있었다. 원석 수거할 때 쓰는 수레의 칸막이가 분리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용도로 쓰이는 줄은 몰랐다.
최소한의 무장은 하고 있으나 촌스런 옷차림, 낡은 뱅커에 볼썽사나운 수레를 달고 있는 티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 비웃음 섞인 얼굴로 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초라한 행색의 힘으로 안전하게 성벽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원석 가공 공방에서 왔는데요.”
성벽 부근의 막사에 도착한 티노는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직원증을 보였다.
“조명등을 가져온 건가?”
“예!”
“저쪽 초소에 가 봐.”
경비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초소를 가리켰다. 그 아래엔 작은 문이 있었다. 저 문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티노는 수레를 열어 성벽용 조명등을 꺼냈다. 그것은 티노의 상체만 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거뜬하게 들고 초소 쪽으로 걸어갔다. 초소가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막사 부근에 뱅커를 세워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 앞에 서 있던 경비원이 티노의 손에 들린 조명등을 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계단이 상당히 길었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명등이 깨진 초소 위는 상당히 어두웠다. 다른 쪽에서 드문드문 켜 둔 조명등이 있긴 했지만 여기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휴대용 조명등을 켜 두었기 때문에 대충 주변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초소 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티노만큼이나 큰 대포 두 개였다. 포신은 둘 다 반구 형태로 초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포구 중 하나는 성벽 밖을 향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상하게도 옆의 포구 쪽으로 심하게 꺾여 있었다.
두 대포 사이에 걸터앉아 있던 초소병이 티노를 돌아보았다.
“조명등을 갈러 온 거냐?”
“예.”
“다행이다! 휴대용 조명등의 어스듐도 다 떨어지던 참이었어.”
초소병 휴대용 조명등을 든 채 티노 쪽으로 오며 초소에 박혀 있는 조명등을 가리켰다. 그것은 대포 뒤쪽에 있었는데, 깨져서 반이나 떨어져 나가 있었다.
“어서 갈아라.”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조명등이 깨지다니 신기하네요.”
“포구의 방향을 바꾸다가 부딪쳤다.”
“보통 조명등은 대포의 운신 방향을 피해서 설치하지 않아요?”
“그래야 정상인데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저 상태로 멈춰 버렸어. 수리할 사람을 불렀는데 영 오질 않는군.”
티노는 조끼 주머니에서 공구를 꺼내서 능숙하게 연결단자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조명등을 갈아 본 적은 없지만 날 때부터 복잡한 기계공학을 배워 온 그에게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었다.
깨진 것을 치우고 새로 만든 조명등을 끼워 넣고 어스듐 라인을 연결하여 가동시키자 곧 은은하게 빛이 들어왔다. 이쪽이 너무 밝으면 성벽 밖을 제대로 볼 수 없기에 대포 조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빛만 들어오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휴, 다행이다. 밤에는 배달할 수 없다고 새벽 일찍 온다고 하더니, 와 줘서 살았어.”
“……하하. 뭘요.”
웨이, 이 철딱서니 없는 화상! 티노는 산딸기 파이를 붙박이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놓길 잘했다고 곱씹으면서 겉으로는 순진한 척 웃었다.
삐이익!
그때 갑자기 높은 경보음이 성벽 위를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초소병은 낯이 확 굳어서 대포 옆으로 달려갔다. 티노도 그를 따라가 성벽 밖을 보았다. 이 경보음은 티노의 마을에서도 종종 울렸던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였다.
“몬스터다!”
“경계 위치로! 빨리 움직여!”
성벽이 순식간에 부산해졌다. 성벽에 설치되어 있는 조명등이 몬스터 쪽으로 켜졌다. 상대의 정체와 위치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 달아 놓은 것으로, 방금 티노가 교체한 조명보다 훨씬 크고 밝은 것들이었다.
“종류가 뭐야?!”
“맘모스입니다!”
“제길! 접근을 막아라! 성벽에 붙지 못하게 해!”
티노는 조명등에 비치는 거대한 몬스터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것은 긴 코에 크고 굽은 엄니가 두 개 박혀 있는 야수형 몬스터였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엉덩이까지의 등껍질이 흉흉한 바위로 되어 있어 정면에서 부딪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병사들의 걱정도 그것이었다.
“젠장! 막아! 죽어도 막아! 저놈이 성벽에 부딪치면 다시 보수공사를 해야 한단 말이다!”
“대포를 쏴라!”
명을 들은 초소병은 멀쩡한 대포 뒤로 가려다가 티노를 발견하고 외쳤다.
“당장 내려가!”
“예. 조심하세요.”
대포 쏘는 걸 구경하고 싶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고집을 부려 포병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계단 쪽으로 돌아서는데 초소병의 괴성이 들렸다.
“빌어먹을! 저것 때문에 조준을 할 수가 없잖아!”
돌아보자 초소병은 멀쩡한 대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성벽 밖의 몬스터를 보고 있었다. 고장 난 대포의 포구 때문에 옆의 것까지 덩달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기술자는 왜 안 오는 거야?!”
다행히 대포가 이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초소의 병사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초소병은 다른 쪽을 지원하기 위해 옆으로 달려가서 벽 아래로 발을 디뎠다. 초소의 양옆에는 성벽까지 닿는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과 초소를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말이다.
거기까지 본 티노는 대포를 한번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기로 했다. 다시 계단 쪽으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티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이 어두워진 것이다.
처음엔 조명등을 잘못 설치한 건가 싶었다. 돌아서자 몬스터를 환하게 비추던 조명등이 사라진 것이 보였다. 주위는 온통 까맸다. 심지어 좀 전까지 귀가 터져나갈 듯이 시끄러웠던 소음들까지 멈췄다. 그것은 실로 찰나의 일로써, 그것을 만회하듯이 사방에서 비명과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씨드가 끊긴 거냐?!”
“하필 이런 때에!”
“쏴! 무조건 쏴!”
“안 돼! 사람이 떨어졌다!”
마지막 소리가 유독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티노는 급히 고글을 끼고 야간경 기능을 켰다. 그리고 좀 전에 초소병이 내려갔던 사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사다리엔 사람이 없었다. 그 부근에서 한 병사가 사람이 떨어졌다고 외치고 있었다. 망원경 기능까지 켜고 성벽 아래를 살펴보자 좀 전의 초소병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의식은 없어 보였지만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았다. 다리가 부러진 것 외에 심한 외상도 없어 보였다.
“제길! 어디로 떨어진 거야?”
“아무것도 안 보여서 조준할 수가 없다고!”
“젠장! 이래서 성벽도 비상용 어스듐을 설치해 달랬건만! 빌어먹을 정부!”
몬스터가 어디까지 접근했는지도 모르고 사람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떨어진 사람이 저 초소병뿐이라는 장담도 없다. 동료의 생명을 무시하면 다음엔 자신의 생명이 무시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들 발을 동동 굴렀다.
티노는 망원경 기능을 끄고 대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공구를 꺼내어 신속하게 포신 옆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복잡하게 얽혀 있는 회로들이 보였다. 이 회로들이 코어를 원료로 폭발력을 만들어 포탄을 쏘아 내는 것이다. 램이 대포를 여러 차례 만들고 수리하는 것을 보고 도왔기에 티노 역시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방향을 조절하는 부분이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쪽 회로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마모되어 있었다. 제대로 고치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지금은 이 대포의 포신 방향만 바꾸면 됐다. 때문에 마모된 회로의 위아래를 조금씩 잘라냈다. 허리띠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일회용 회로를 꺼내어 그 사이에 끼우고 접합시켰다. 당장만 움직일 수 있게 대충 손본 것이다.
포신의 뚜껑을 닫을 틈도 없이 포신의 방향부터 바꿨다. 그리고 멀쩡한 대포로 달려가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몬스터의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지만 다행히 아직 성벽에 근접하지는 못했다. 이 정도라면 휩쓸릴 염려가 없다. 티노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의 전방에 대포를 쐈다. 우선 방향부터 바꿀 생각이었다.
콰쾅!
앞의 땅이 폭발하자 몬스터들이 우왕좌왕하며 앞으로 넘어지거나 옆으로 꺾는 모습이 보였다. 티노는 다시 대포를 조작했다. 그의 귀에 또 다른 소란이 들려왔다.
“누구야?! 누가 쏜 거야?!”
“사람이 떨어졌단 말이다!”
티노는 무시하고 다시 쐈다. 이번엔 제대로 몬스터 무리를 조준했다.
끼아악!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리고 포탄의 빛에 의해 몬스터들이 비춰지자 노련한 병사들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티노가 쏜 방향으로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티노는 몬스터의 이동속도에 맞춰서 재차 쐈고 그 뒤를 다른 포탄들이 따랐다. 그것이 두 번 더 반복되었을 때 마침내 사위가 다시 밝아졌다. 씨드가 들어온 것이다.
“조명! 조명 비춰!”
“어디야? 어디로 떨어진 거야?”
“저기 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어깨에 힘이 빠진 티노는 고글의 야간경 기능을 끄고 이마 위로 올렸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쯤이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꽤 대견한 일을 했다고 자신을 칭찬하며 고장 난 대포 쪽으로 걸어갔다. 포신의 방향을 원래대로 돌린 뒤 임시로 끼워 넣은 회로를 수거해야 했다.
티노는 기억을 더듬어 아까처럼 되돌린 뒤 뚜껑을 닫고 허리를 쭉 폈다.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기 전에 얼른 내려가 봐야…….
퍽!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픔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뭐……?’
몸이 쓰러져 대포 위에 부딪쳤다가 미끄러져 초소 바닥에 널브러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뒤통수와 이마에 뜨끈한 것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에서 풍기는 쇠 냄새 섞인 비린내도. 그에 머리를 맞았다는 걸 알았다.
‘누가……?’
의식은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애송이가 꽤 깜찍한 짓을 하던데?”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왜……?”
“크크, 왜냐고?”
티노는 자신이 말을 했는지도 몰랐지만 남자는 용케 그걸 알아듣고 웃어 댔다. 그리곤 티노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거칠게 상체가 들려지자 아픔과 두통과 어지럼증이 동시에 밀려 들어왔다.
“네놈에게 신세를 톡톡히 져서 갚는 것뿐이다.”
대머리에 왼팔 전체가 기계로 되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역시나 모르는 놈이었다.
“감히 내 동생을 디나르 가에 넘겼겠다!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다면 착각이다.”
남자는 티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초소 바깥쪽으로 끌고 갔다.
“우선 내 동생부터 구한 뒤에 널 손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닿았는데 놓칠 수야 없지! 씨드까지 끊겨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크크! 하늘이 도운 게지!”
초소 끝에서 멈춰 선 남자는 티노를 초소 밖으로 내밀었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성벽 너머로 티노의 발이 떠올라 대롱거렸다. 하지만 의식이 흐릿할 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운 좋으면 몇 군데 부러지고 끝날지도 모르지.”
쿵!
마치 남자의 말에 호응하듯 성벽이 미미하게 울렸다. 남자는 성벽 아래를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군. 네가 몬스터의 발에 터져 죽는 꼴을 재미있게 구경해 주마.”
그리고 손을 놓았다.
기묘하게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추락하는 동안 자연히 머리가 아래로 가면서 보게 된 몬스터 무리들. 시간은 벌었어도 이동 방향을 바꾸는 것은 실패했던가……. 놈들의 등판에 솟아 있는 바윗덩어리를 보니 밟혀 죽기 전에 저기에 꿰뚫려 죽는 게 먼저일 것 같다. 또 자연히 몸이 돌면서 보게 된 성벽. 추락하는 티노보다도 빠른 속도로 쏘아지듯 다가오고 있는 기계 투구를 쓴 남자.
……다가오고 있는?
탁!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