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전체를 가리는 기계 투구를 쓴 남자가 한 손으로 티노를 낚아챈 순간 갑자기 모든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공을 딛고 부드럽게 위로 솟구쳤다. 그 순간 그가 입은 긴 망토를 뚫고 그의 등 뒤로 희미하게 빛의 날개와 같은 것이 펼쳐졌다. 티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오직 플로레스라의 버킷만이 저와 같은 형상을 자아낼 수 있다. 하지만 플로레스라가 왜……?
티노의 의문은 채 매듭이 되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그의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목걸이. 우아하게 넝쿨을 자아낸 철 틀 안에 담긴 정체불명의 수정조각. 티노에게도 그와 똑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아르카……?”
어째서 아르카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현실일까? 이미 의식을 잃고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티노에게 이것이 현실임을 일깨워 준 것은 우습게도 티노를 몬스터 무리로 내던진 대머리 남자였다.
“프, 플로레스라다!”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성벽 밖을 지켜보고 있었던 남자는 아르카가 자신 쪽으로 오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고함을 질렀다.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병사들의 주의를 끌 정도로 크게. 하지만 아르카는 당황하거나 조급해하는 일 없이 유유히 초소 위에 착지했다. 바로 남자의 앞에.
남자는 당황하면서도 노련하게 무기를 뽑았다. 아니, 뽑으려 했지만 아르카 쪽이 훨씬 빨랐다. 아르카는 초소 위에 착지하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자가 몸부림을 쳐 보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움켜쥐었다.
두둑!
희미하지만 크게만 느껴지는 섬뜩한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르카는 그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곤 한 손에 들고 있던 티노를 조심스럽게 구석에 누였다. 그 손길과는 달리 타박 주는 목소리는 야박했다.
“항상 긴장을 놓지 말라고 했건만. 한심하기는.”
하지만 티노는 아르카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르카가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노블리언의 수도, 레나센시아에 왔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이 머리에 박혀 들었다.
“……어서 도…….”
말해야 하는데, 어서 도망치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티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카는 작게 말했다. 크기가 작다뿐이지 이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냉담한 목소리였다.
“넌 날 못 본 거다. 그러면 나와 저놈의 문제로 여겨지겠지.”
그리곤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티노의 허리띠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난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할 테니.”
아르카는 일어나 티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무기를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막 초소 위로 뛰어 오른 수많은 병사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피로 물든 시야에 흐릿하게 비쳤다. 그것이 그날 티노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침대와 작은 협탁, 의자가 전부인 작고 낯선 방 안에서 티노는 눈을 떴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문 밖에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방 안엔 티노밖에 없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티노는 흠칫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는데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지저분했다.
“꿈이 아니었구나…….”
흐릿했던 기억이 갑자기 생생하게 치솟아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르카!”
티노는 급히 주머니를 열었다. 부디 없길 바랐지만 눈에 익은 목걸이가 손끝에 걸려 나왔다. 이번엔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역시나 익숙한 목걸이가 만져졌다. 그것을 움켜쥐고 옷 밖으로 빼냈다. 그리곤 두 목걸이를 양손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똑같은 목걸이가 두 개…….
꿈이 아니었다. 아르카가 왔다. 티노를 따라 온 것일 리 없고,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플로레스라는 자기 종족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강하여 위장 따위는 하지 않으나 아르카는 자기 목적을 위해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녀석이다.
아르카의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자신의 연구실을 떠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아르카는 그 중요한 일보다 티노의 안위를 우선해 줬다. 그가 자신의 목걸이를 티노의 주머니에 넣은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혹시라도 티노가 다른 누군가에게 목걸이를 보여 줬다면, 아르카가 붙들리거나 잘못되었을 때 똑같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티노가 위험해지니까.
“무사히 도망쳤겠지?”
아르카는 강하다.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을 혼자 감당하긴 힘들 것이다. 뒤에 부상당한 티노가 있으니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고…….
티노는 목걸이를 든 손을 꾹 쥐었다. 그러다 아르카의 것을 주머니에 넣고, 자기 것은 도로 옷 안에 넣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뺐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플로레스라가 잠입한 일이다. 분명 화제가 되었을 테니 누구든 붙잡고 물어봐야…….
덜컹.
“깼구나?”
“테이슨 경…….”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테이슨은 티노를 보고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몸은 좀 어떠니? 머리를 심하게 맞았다고 하던데.”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곤 괜찮아요.”
“그만하길 다행이다.”
“여긴 어딘가요?”
“성벽 옆 야전병원이다.”
테이슨은 안으로 들어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더 누워 있지, 그래?”
“누워 있는 게 더 어지러워서요.”
“그래?”
테이슨은 할 말이 따로 있는 눈치였으나 티노는 일부러 모른 척 선수 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기억 안 나니?”
“초소의 조명등을 갈고 내려가려는데 몬스터 무리가 공격해 와서…….”
티노는 일부러 띄엄띄엄 생각을 더듬는 모양새로 답을 했다.
“내려가려고 했는데 씨드가 끊겼죠. 그래서 초소 구석에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아, 다시 조명등이 켜졌어요. 그래서 내려가려고 했는데…….”
머리를 움켜쥐고 그럴싸하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머리가 아프고……. 그리고 기억이 안 나요.”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를 녀석이구나.”
“예?”
테이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티노는 의아한 척 테이슨을 보았다. 아르카에 대해 묻고 싶어서 속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오발탄에 맞기라도 한 거예요?”
“…….”
테이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티노를 보았다.
“입막음한다고 했지만 어차피 곧 알려지겠지. 넌 어떻게 보면 당사자니까 알 권리가 있겠구나.”
“……?”
어디까지나 모르는 척, 의아한 척하며 티노는 마른침을 삼켰다.
“플로레스라가 잠입했었다.”
“플로레스라가요?!”
놀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었다. 테이슨도 의심하는 기색 없이 바로 설명했다.
“유명한 현상수배범이 현장에 있었어. 그자와 접선하려고 했던 것 같다. 뭘 노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상수배범을 심문하면 되잖아요?”
그자가 아르카의 손에 죽는 것을 코앞에서 봤지만 추임새를 겸하여 말했다. 테이슨이 어서 자신이 모르는 화제로 넘어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자는 죽었다. 사인을 보면 플로레스라가 죽인 것 같아. 일이 틀어지자 입을 막으려고 죽인 것 같은데, 현상수배범이 그 낌새를 눈치 채고 병사를 불렀던 모양이다. 결국 한 발 늦어 버렸지만…….”
테이슨을 비롯한 사람들의 유추는 절묘하게 사실과 어우러지면서 교묘하게 진실과 어긋나 있었다.
“그럼 플로레스라는 어떻게 됐어요?”
티노는 불안으로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얼굴을 만들어 냈다.
“포획했다. 우리가 넘겨받아서 친위대의 특급감옥에 가둬 놨어.”
“특급감옥이요?”
“보통은 정범이나 역적을 가두고 심문할 때 쓰는 곳이다. 이번엔 특별히 그놈만을 위해서 특급감옥 전체를 비웠지.”
“그래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곧 가다듬었다.
‘괜찮아,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놈에겐 알아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알아내야 할 거요? 잠입한 목적 같은 거요?”
테이슨은 이번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있었다. 일개 일반 시민에게 함부로 발설해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사안이 아니겠지.
본래라면 이쯤에서 물러섰겠지만 이번에는 꼭 들어야 했다. 테이슨과 함께 시문의 공방을 조사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조금은 억지를 부려도 좋을 것이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답을 기다리고 있는 티노를 보며 테이슨은 어쩔 수 없지, 하는 얼굴로 피식 웃어 버렸다.
“물론 잠입한 목적도 알아내야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초소를 접선 장소로 잡을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야. 내통자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하하……. 설마 그러려고요.”
어제의 사건이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상세히 잘 알고 있는 티노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쥐뿔도 모르는 테이슨은 어디까지나 심각하고 진지했다.
“아니다. 일차 조사 결과 고장 난 대포의 회로가 잘려 있는 걸 발견했다. 기술자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일부러 잘라 낸 거라고 하더군. 또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철저히 조사해야 해.”
‘그건 제 짓인데요.’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삼키며 티노는 어떻게든 진지한 얼굴을 하는 데 성공했다. 테이슨은 그런 티노를 보다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만하길 다행이다. 그 현상수배범이 죽기 전에 병사를 부르지 않았으면…….”
“그러게요.”
티노는 싱긋 웃었지만 속에선 열불이 났다. 그 자식이 죽기 전에 병사를 부르지 않았으면 아르카가 위험에 처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백번 죽어도 싼 놈 같으니!
친구가 자기를 구하려다 감옥에 갇혔다. 친위대에서 그를 곱게 모셔 뒀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차마 상상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 고문을 당하고 있겠지. 그럼에도 티노는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티노와 아르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에 당면했을 때 각자가 취해야 할 행동을 정해 놓았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둘의 친분이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로.
티노는 이마에 붕대를 감은 상태로 시문의 공방으로 돌아왔다. 그리 좋은 약을 쓰진 않았는지 두통과 어지럼증이 계속되었지만 그딴 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벌써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공방 안쪽 주차공간에 뱅커를 세워 놓고 티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티노?”
손에 빗자루를 든 라디가 열려 있던 공방 문 안쪽에서 나왔다. 뱅커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배달하느라 피곤해서 자는 줄 알았더니 이제 들……!”
웃으며 나오던 라디가 대번에 사색이 되어선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머리가 왜 그래?! 어디 다친 거야?”
“좀 당했어. 기억은 없지만.”
티노는 테이슨에게 했던 말과 맞춰서 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많이 다친 거야?”
“그리 심하지 않아.”
그러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져 덧붙였다.
“조금 어지럽고 두통이 있는 정도야. 자, 청소해야지!”
“청소는 무슨 청소! 가서 누워 있어! 시문 님께 말씀드려서 하루 쉴 수 있게 할게!”
역시나 라디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렸다. 고마운 일이었다.
“선배님들께도 내가 말할 테니까 어서 들어가 쉬어! 아우, 공방에 좋은 약이 없어서……!”
“괜찮아. 병원에서 치료해 줬어.”
“해 주는 김에 좋은 약을 써 주지! 그럼 바로 나았을 텐데.”
“하하! 그런 비싼 약을 민간인한테, 그것도 이 정도 상처에 주겠어?”
티노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평소대로 넉살 좋게 웃고 떠들었다.
“어쨌거나 얼른 들어가!”
“고마워. 그럼 조금만 쉴게. 사실 좀 피곤해.”
“조금 쉬기는! 오늘 하루 푹 쉬어. 점심 갖다 줄까?”
“그 정도까진 아니야.”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