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 녀석, 너무 험하게 다룬 거 아냐?”
티노는 항상 목걸이를 옷 안에 넣어 두기 때문에 그의 것은 흠집이 거의 없었다. 그에 반해 아르카 것은 훨씬 낡았다. 때가 탔다거나 먼지가 낀 것은 아니지만 미세한 흠집이 전체에 깔려 있어서 낡은 느낌을 줬다. 그 때문에 목걸이의 멋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고풍스러운 매력만 더해졌지만, 이거 만든 지가 언제인데 벌써 이 상태인 건지……. 보아하니 그냥 걸고 다녔던 모양이다. 실험을 위해 몬스터 사냥을 부지런히 하는 만큼 좀 더 주의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문득 시간을 확인한 티노는 자신의 것은 도로 걸어서 옷 안에 넣고 아르카의 것은 허리띠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슬슬 시문이 올 시간이었다. 늘 일정한 시간에 오는 시문은 역시나 이번에도 같은 시간에 들어왔다. 그에게 티노가 바로 질문했다.
“코어를 팔고 싶은데, 적당한 가격에 거래할 수 있는 곳 아세요?”
본래는 시문의 신세를 질 생각 따윈 없었다. 암거래에 대해 알려지는 게 좋을 것도 없고, 시문에 대해 몰래 조사하고 있는 입장이라 꺼림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혼자서 적당한 거래처를 알아볼 생각이었으나 이젠 시간이 없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
시문은 의외라는 얼굴로 티노를 보았다. 티노는 그게 더 의아했다. 코어를 모았으니 거래처를 구하려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시문이 곧 입을 열었다.
“저한테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요? 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의 질문에 티노는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시문이 알아채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시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예리한 사람이었다.
시문은 답이 없는 티노를 내려다보다가 곧 싱긋 웃었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래처라면 제가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가격에 장기적인 거래도 가능한 곳이죠. 신용도가 높아 비밀유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재정이 풍족해 언제든 원하는 만큼 팔 수 있습니다.”
“딱 좋네요. 어디죠?”
티노는 기뻐하기보다는 미심쩍어하며 시문을 보았다. 시문은 자신의 가슴을 과장된 손짓으로 가리키며 예의 미소 띤 눈가에 더욱 진한 호선을 그려냈다.
“접니다.”
“…….”
설마 처음부터 코어를 사려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지, 그렇게 많은 어스듐을 소모하는 자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티노가 만든 몇 안 되는 코어 캡슐을 사야 할 정도로 궁박할 리 없다. 자신의 말대로 재정이 풍족하다면 특히나 그렇다. 코어를 몰래 거래하는 자는 찾아보면 사방에 널려 있을 테니까.
“싫습니까?”
“아니요. 저야 감사하지요!”
미심쩍고 찝찝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는 사이니까 잘 좀 쳐주세요.”
“좋은 구경도 했으니 넉넉하게 쳐드리지요.”
티노는 챙겨 온 코어 캡슐을 꺼냈다.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코어 자체의 거래니 적당한 상대만 만나면 어스듐을 파는 것보다 더 받을 수 있다. 시문이 적당한 상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에다 출처 불명의 어스듐을 매일 소모할 정도로 손이 큰 그라면 야박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시문은 코어 캡슐의 수량을 센 뒤 세척실을 나갔다. 돈을 가지러 가는 걸 거다. 얼마나 줄까? 아무래도 수도 물가가 더 비싸니까 고향에서보단 더 받겠지?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고 겉보기엔 태연해 보이도록 가장하며 기다리고 있자 시문이 돌아왔다.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는 시약만 끓고 있는 세척기를 흘낏 보며 물었다.
“오늘은 작업하지 않을 건가요?”
“예,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티노는 일부러 조금 맥이 빠진 음성을 냈다. 이마에 붕대가 감겨져 있으니 알아서 생각하겠지. 라디에게 전해 들은 말도 있을 테고.
“그럼 쉬십시오.”
그러면서 건네는 주머니가 꽤나 묵직했다. 무게만 봐도 상당한 액수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구태여 열어 보진 않았다. 왠지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수도 물가가 비싸도 코어 캡슐 몇 개에 이 정도를 받을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티노는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티노가 걱정이 되었던지 테이슨이 공방으로 찾아왔다. 마침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던 터라 다행이다 싶었다. 만나기로 한 날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르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정보를 모아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설렁 이런 정보라 하더라도.
“놈이 무슨 목적으로 잠입했는지 알아냈다.”
“……?!”
아르카가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고? 그럴 녀석이 아닌데……. 그만큼 심하게 당하고 있는 건가? 티노는 치솟는 걱정을 억지로 누르며 호기심만 드러냈다.
“입을 열었어요?”
“그자가 입을 열지 않더라도 주변을 조사하면 나오는 법이지.”
결국 아르카가 말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것만으로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르카가 버틸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에 의의를 두며 물었다.
“주변이라면? 설마 내통자가 벌써 잡힌 거예요?”
“생포는 못 했더라도 이미 드러난 자가 있잖니? 그 죽은 현상수배범 말이다.”
“아…….”
그놈이라면 백날 들쑤셔 봐야 아르카와 연관된 정보 따윈 한 톨도 건져 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놈과 티노와의 접점을 찾아내는 쪽이 빠르겠지.
“그자에 대해 조사해 보니 강도, 사기, 살인 등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놈이더군. 그중에서 우리 눈에 띈 것이 바로 절도다.”
“절도요?”
“그래. 그자는 귀족가의 물건을 훔치는 무리의 리더였다.”
테이슨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 모습에 티노가 벌써 그가 할 말을 알아차리고 적당한 반응을 고르고 있다는 걸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너도 간접적으론 연이 닿은 자였다.”
“예?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직접적으론 아니다. 얼마 전에 네가 잡은 현상수배범 말이다. 디나르 가에서 쫓고 있었던…….”
“예, 기억해요. 근데 그게 왜요?”
티노는 자신이 생각해도 가증스러울 정도로 잘해 나가고 있었다.
“알아보니 성벽에서 죽은 자와 형제였더구나.”
“……!”
할 말을 잃은 모습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그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습에 티노가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한 테이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너와 그 형제는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악연이겠지요.”
티노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답했다. 확실히 악연은 악연이다. 동생은 티노를 인질로 삼으려다 티노의 손에 잡혀 들어갔고, 형은 티노를 죽이려다 티노의 친구 손에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 형제는 전생에 티노에게 죽을죄를 여러 번 지었을 것이다.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안 써요.”
일을 이렇게 만든 작자에 대한 악감정은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그런 걸 품어 봐야 감정낭비일 뿐이다. 티노에게는 그런 것보다 집중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경력 중에서 왜 절도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건 외부에는 유출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넌 그 형제와 남다른 인연이 있으니 말해 주마.”
테이슨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자들은 귀족들의 무기를 훔쳐서 밀매하고 있었단다.”
“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플로레스라가 우리 쪽 무기를 구입하려 했던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결정적인 증거나 증언은 없지만 그쪽으로 무게를 주고 있는 중이다.”
그건 아니다. 티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티노와 아르카가 친분을 다졌던 시간 동안 아르카는 티노의 무기를 뜯어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것은 티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 다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둘이 그 비밀스러운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종족적 양심이었다. 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나 공통된 관심사항에 대한 것만 이야기했지 종족이나 마을,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둘의 암묵 하에 정해진 규칙이었다.
물론 아르카가 노블리언의 무기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티노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밀매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복합형 몬스터에 꽂혀 있어서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듀오 루나를 떠날 기색도 없었고. 그런 아르카가 고작 무기 밀매를 위해 움직였을 리 없다. 분명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공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티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테이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헛다리 짚고 있다는 것이 안심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 무리를 소탕할 예정이야. 이건 노블리언의 수치나 다름없으니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어. 국왕 전하의 명을 받아 친위대가 직접 움직일 거다.”
“그럼 바쁘시겠네요.”
말로는 그리 답하면서 티노의 머리는 다른 계산으로 바빴다.
아르카는 현재 친위대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런데 친위대가 현상수배범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감옥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플로레스라가 개입된 문제니 신속한 해결을 위해 대규모로 움직일 테고…….
친위대에서는 이 점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까? 아니면 플로레스라와 관련된 사건에 이성을 잃어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은 상태일까? 만에 하나 후자라면 테이슨에게 감옥의 경비에 대해 물으면 경각심만 심어 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 티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바로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점을 내로라하는 친위대에서 놓칠 리 없다. 테이슨에게 물어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 두는 쪽이 현명하겠지.
“그럼 감옥 경비는 어떻게 돼요?”
“친위대가 감옥 전부를 경비할 리 없잖니? 그런 일에 투입되기엔 아까운 인력이니까. 감옥의 대부분은 자동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기도 하고.”
테이슨은 생각 깊은 척하려는 어린 아이를 보는 눈으로 티노를 보았다.
“그렇군요! 전 플로레스라가 갇혀 있으니까 친위대 쪽에서도 특별히 감시할 줄 알았거든요.”
“그야 한 명이 교대로 남아서 보초를 서긴 한다만. 친위대가 이번 사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플로레스라와 내통한 자를 적출하기 위해서지 이미 잡힌 플로레스라를 경계해서가 아니야. 전쟁이었을 때라면 몰라도 그런 놈 하나 정도에 긴장할 리 없잖아?”
테이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 내면엔 오만에 가까울 정도의 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친위대에 오른 전사의 자긍심이자 자부심이겠지.
“그럼 심문은 누가 해요? 아, 말이 안 통해서 심문이 무리인가요?”
“심문은 고문관이 따로…….”
아무렇지 않게 답하던 테이슨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티노가 듣기에 좋을 것이 없는 얘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미 다 들었다.
‘역시 고문을 당하고 있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무래도 낯빛이 어두워졌던 모양이다. 테이슨이 티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신경 안 써요.”
티노는 태연한 척 웃음을 쥐어짜 냈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었는지 테이슨은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구나. 너도 알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잠깐 나온 거라 시간이 없어.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머리 부상은 겉보기로는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맡은 일은 차질 없도록 열심히 할 거니까요.”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네 몸을 걱정하는 거지.”
티노의 말이 거슬렸는지 테이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만큼 괜찮다는 뜻이었어요.”
티노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그가 일부러 테이슨의 배려를 왜곡해서 받아들인 척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도 오후부터는 정상적으로 일했는걸요? 근데 또 씨드가 끊겼지 뭐예요?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씨드가 또?”
그에 대해서는 테이슨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대뜸 한숨을 쉬었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