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곤 라디는 개인 사물함처럼 쓰고 있는 서랍장에서 전날부터 밑작업을 하고 있던 원석과 공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티노는 그런 라디를 어이 없이 보았다. 그 시선에 라디는 싸움을 거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왜? 내가 같이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당연하지. 내내 그런 태도인 녀석이 옆에 있으면 제대로 공부가 되겠냐?”
티노는 딱 잘라 대답했다. 라디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 날카롭게 물었다.
“걸리는 게 그것뿐이야? 정말로?”
“너야말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디는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두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전처럼 쏘아붙이듯이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 더 짙은 감정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난 네가 한 말 믿지 않아. 고향에 편지를 쓰려고 아무것도 없는 창고를 찍었다는 말 따위.”
“라디가 역시 뭘 아는군! 저런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고! 안 그래?”
세척실 구석에서 둘의 언쟁을 노골적으로 구경하던 웨이가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티노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왜 가만히 있나 했다.
“네 말대로라면 아무것도 없는 창고를 찍은 건 왜 문제가 되는 건데?”
“그것까진 몰라. 하지만 난 널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
“그러니까 감시를 하시겠다?”
“그래! 그럴 거야!”
라디는 팔짱을 떡하니 끼고는 턱을 쳐들었다. 티노가 뭐라 말해도 듣지 않을 태세였다.
“그런 거라면 나도 기꺼이 도울게!”
웨이가 신나서 끼어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호의적인 눈으로 라디를 보면서 말이다. 물론 틈틈이 티노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해지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언제든 말하라고!”
티노는 기막히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다소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사사건건 쫓아다니겠다고? 내가 왜 그런 대우를 참고 견뎌야 하는데?”
“싫으면 관두던가.”
웨이가 빈정거렸다.
“아, 하긴 여기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친위대를 위해 염탐할 수 있겠지. 안 그래? 애초에 그러려고 이곳에 들어온 거잖아?”
“시문 님은 급료를 떼먹거나 직원을 착취하는 일이 없다고 추천받아서 온 것뿐인데요.”
“아까도 보기 좋게 빠져나간 녀석이 이제 와 무엇이든 포장 못 하겠어?”
믿을 생각은 물론 들을 생각도 없는 웨이를 상대하고 있자니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해졌다. 그 옆에서 불신, 불신, 불신을 얼굴에 빼곡히 채우고 있는 라디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한숨을 푹 쉰 티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세척실 밖으로 나왔다. 라디가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분간 피곤하게 됐구나, 절로 혀가 차졌다.
라디와 웨이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에 코어를 뽑아내는 작업은 당분간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웨이는 티노를 감시하는 일…… 아니, 귀찮게 하는 일에 재미를 들렸는지 자꾸만 티노의 방문을 두들겨 댔다. 그것도 티노가 방문을 열어 줄 때까지 계속. 그러다 문을 열어 주면 목을 빼고 방 안을 둘러본 뒤에 심술궂게 웃으며 돌아갔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 때로는 티노가 읽고 있던 교재를 들춰 보기도 했는데, 테이슨이 준 것이니 무슨 암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소리를 해 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암호 따윈 있지도 않았지만 있다 해도 웨이가 알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웨이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제재할 수 있는 사람은 공방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시문뿐이지만 티노는 그와 말을 섞는 것이 꺼려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시문만큼은 티노가 찍은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챘을 것 같았다.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티노가 느낀 그는 그러고도 남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코어 축출로 벌어들일 수 있는 부수입도, 편했던 자유시간도, 혼자만의 조용한 휴식도, 라디와의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바로 식사였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티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라디는 더는 티노 몫의 요리를 해 주지 않았다. 빵을 구울 때나 고기를 구울 때나 그릇 따위를 꺼낼 때나 티노의 것은 쏙 빼 놓고, 대신 웨이의 것을 꼬박꼬박 챙겼다. 심지어 자신과 웨이의 식사를 이인용 식탁에 차려서 티노를 떨어뜨리려 했다.
혼자서 먹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라디의 맛깔스런 요리는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먹고 죽지 않을 만큼의 요리는 만들 수 있으니 굶는 일은 없었다. 기분 탓인지 라디의 식단이 갈수록 더 다채롭고 호화스러워지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남의 떡이라 신경 껐다.
점심은 고용된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 괜찮았다. 라디의 것에 비하면 조금 못한 감이 있기도 했지만 티노의 요리보다는 훨씬 맛있었으니까. 저편에서 라디가 웨이의 옆에 철썩 붙어서는 때때로 티노를 노려보았지만 그것 때문에 체하는 일은 없었다.
원석 수거를 하고 와서는 밖의 벤치에 앉아 교재를 보았다. 라디는 근처의 다른 벤치에 앉아서 원석을 가지고 씨름했다. 그러다가도 티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흠칫하면서 일일이 확인했다. 화장실 갈 때도 보고해야 하는 게 귀찮긴 했지만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웨이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사흘인가 나흘인가가 지났다. 테이슨은 시문을 보기 껄끄러워서인지 티노에게 화가 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방에 오지 않았다. 하기야 전에도 그리 빈번하게 오는 편은 아니었다. 혹시 전처럼 길에서 티노와 만나려다가 라디가 함께 움직이는 걸 보고 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라디의 저 과도한 행동도 아주 헛짓만은 아닌 셈이다.
전보다 공방 생활이 귀찮아지긴 했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의는 아니지만 코어 축출을 못 하게 되니까 공부할 시간이 늘어났다. 그래봐야 단순한 암기만 할 수 있을 뿐, 테이슨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공부하기는 힘들지만.
검은 것이 글자요, 하얀 것이 종이라…… 하고 정신줄이 살짝 느슨해질 때쯤이면 교재를 덮어 버리고 백팩을 비롯한 무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꼼꼼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총을 분해하여 깨끗이 닦고 다시 조립하고, 단검의 날을 확인하고, 백팩의 코어 양을 확인하고 마모된 회로는 없는지 살펴보는데, 이번에도 시끄럽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쾅!
“어이! 신참!”
쾅! 쾅! 쾅!
“빨리 문 안 열어?! 무슨 짓을 하느라고 꾸물거리는 거야?! 엉?!”
쾅! 쾅! 쾅!
티노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안 열고 버텨 봐야 시끄럽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의 자물쇠를 풀자마자 벌컥 열린 문 밖에서 웨이가 신나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목소리만은 제법 무게 있게 냈다.
“뭘 하느라 이리 늦게 연 거야?”
그러면서 지금껏 그래 왔듯이 티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개인의 사생활 따윈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무례한 태도도 이제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이곳을 자신의 방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곳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이곳을 자신의 방이나 연구실쯤으로 여겼다면 저런 행동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웨이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무기들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모았다. 그리곤 지극히 수상하다는 얼굴로 티노와 무기들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왜 무기는 꺼내 놓은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자꾸만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잡것을 치우기 위해서 꺼내 놓은 건 아니에요.”
티노는 담담하게 살벌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안에 진심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했다. 심술과 악의로 똘똘 뭉쳐 있는 것과는 별개로 겁은 많은 웨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끝까지 입으로는 큰소리를 텅텅 쳤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이제야 네 본색을 드러내는군!”
“어? 그 잡것이 뭔지 아시나 보네요?”
“말장난하지 마!”
보통은 임시라 해도 선배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지만 웨이는 아무리 좋게 봐도 선배는커녕 연장자로서 대우하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가 티노에게 끼친 민폐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티노가 피식 웃자 자신의 몰골이 어땠는지 깨달은 듯 웨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끊임없이 티노와 티노의 무기 사이에서 굴러다녔다. 티노가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웨이를 구해 준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웨이로서는 한층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 들겠지만 말이다.
“이 시간에 뭐 하는 거죠?”
“시, 시문 님?!”
놀란 것은 웨이뿐만이 아니었다. 티노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시문이 직원의 숙소에 들렀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놀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껄끄러움이 더 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다.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닙니다! 이제 막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놀라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얼른 대답한 웨이는 아차 하는 얼굴로 티노를 돌아봤다. 그의 방과 티노 방의 위치를 생각하면 시문이 용건이 있는 건 티노 쪽이 분명했다. 버티고 있으면 시문과 한 번이라도 더 말을 섞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얼떨결에 제 발로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역시나 시문은 예의 미소 띤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다행이군요. 티노 군과 할 말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티노의 방 쪽으로 걸어왔다.
웨이는 좀 전에 자신이 주눅 들어 있었다는 것을 홀라당 잊어버리고 예의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티노를 노려보았다. 그와는 달리 시문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티노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티노는 시문이 다가오자 자연히 뒷걸음을 쳐서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시문은 방문 틈에 서서 문고리에 손을 얹고 웨이를 보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는 얼굴이었지만 안 가고 뭐 하냐는 냉정한 질문이 떠올라 있었다. 결국 웨이는 아쉬움으로 점철이 된 얼굴로 돌아서야만 했다.
시문은 권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뿐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자연히 침대에 앉게 된 티노는 벌여 놓은 무기들을 수습했다. 총의 탄창을 확인하고, 단검을 검집에 넣어 두고, 백팩의 밸브가 잘 잠겼는지 코어가 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본 뒤 침대 옆에 잘 정리해서 놓아두었다. 선반에 넣어 두는 것은 시문이 나간 뒤에 할 생각이었다.
웨이가 멋대로 망가뜨린 자물쇠는 전보다 견고한 것으로 다시 장만했다. 자물쇠를 생각하니 다시 열이 올랐다. 만약 웨이가 사진 외의 개인 소지품을 건드렸다면 이처럼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충 정리가 끝났을 무렵, 말없이 티노가 하는 모양을 구경하던 시문이 입을 열었다.
“요즘은 코어를 축출하러 오지 않더군요.”
“열렬한 팬이 두 명이나 생겨 버려서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해요.”
“후후.”
티노는 넉살 좋게 답은 하고 있지만 속내는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앞서도 말했듯이 시문이 그 사진의 내막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티노 한 사람쯤 조용히 처리하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조용히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더 긴장됐다.
닥치지 않은 문제를 고민하느라 정상적인 일상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지 않아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동안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었다.
옅게 웃음을 흘렸던 시문은 의외로 바로 직구를 던졌다.
“테이슨 경이 사관학교 추천이라도 해 주겠다고 하던가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렇군요.”
어차피 간파한 것이 분명한 시문 앞에서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시문과 웨이의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니까.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티노도 뺄 것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것을 직접적으로 물었다.
“왜 절 제거하지 않으세요?”
“해서 뭐 합니까?”
시문의 태도나 음성은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눈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어차피 제가 수색망에 걸렸다면 티노 군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염탐을 하기 위해 잠입했겠죠. 아니면 티노 군처럼 매수당하든가. 차라리 제가 확실하게 아는 자가 염탐하는 편이 저한테 편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테이슨 경이 티노 군에게 지나치게 잘해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그분은 원래 사람이 좋지 않나요? 이 일이 있기 전부터도 친절했는걸요.”
테이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티노를 섬세하게 배려해 주었다. 티노에게 화를 내며 약속을 깼지만, 그것조차 그의 다정함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감정적 앙금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티노가 찾으려 하는 그때의 은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시문은 옅게 웃으며 깔끔하게 화제를 넘겼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티노 군의 작업입니다.”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테이슨에 대한 티노의 인식을 흔들려 들지 않는 태도 덕에, 티노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시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저 정도 코어 제작 기술자는 흔할 텐데요? 다들 귀찮아서 저처럼 안 하는 것뿐이죠.”
“아뇨. 티노 군처럼 빠른 속도로 계산해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그야 램은 물론 공방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뽑아냈어야 했으니까 자연히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참, 여러 가지로 궁상맞은 이유구나.
“무엇보다도 육안으로는 거의 확인할 수 없는 미량의 씨드를 단번에 간파하는 눈썰미는 어지간한 훈련 가지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티노 군은 뛰어난 동체시력을 타고난 것 같더군요.”
껄끄럽기만 했던 남자에게서 생각지 못했던 노골적인 칭찬을 듣자 조금 머쓱해졌다. 그 좋다는 동체시력을 조금 궁상맞은 곳에 사용하곤 있지만, 그것은 티노의 꿈을 이루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