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이 이마에 손을 얹고 폭풍이 쓸고 간 자리를 살폈다. 미처 건물에 들어서지 못하고 플레이그 스톰에 휩쓸려 버렸던 여러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찰과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행이도 큰 부상은 아닌 듯싶었다.
“가벼운 플레이그 스톰이라 불행 중 다행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잭슨에게 아이딘이 물었다.
“플레이그 스톰? 그게 뭐지?”
잭슨과 호퍼는 아이딘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 플레이그 스톰을 모르는 걸까 하는 의문의 눈초리다.
“너 또 장난하는 거냐?”
“그런 거 아닌데.”
“플레이그 스톰을 정말 몰라?”
“정말 몰라.”
아이딘은 플레이그 스톰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두 덩치의 반응을 보면 대여섯 살짜리 꼬마들도 알 만한 사실인 듯하지만 아이딘에겐 낯설기만 한 단어였다. 이것도 아마 기억상실의 영향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잭슨과 호퍼는 아이딘을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바라봤다. 결국 잭슨이 먼저 말문을 열어 플레이그 스톰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플레이그 스톰은 언제 어디서 불어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폭풍이야.”
호퍼가 잭슨의 말을 이었다.
“그렇고 말고. 뭐 예전의 폭풍처럼 바람이 불고 그런 건 아니고, 모래와 여러 이물질이 엉키면서 일어나는 강한 전자기파랑 때로는 여러 세균덩어리들이 휘몰아치는 보이지 않는 폭풍이지. 저렇게 모래하고 엉켜 모래 폭풍같이 눈에 보일 때도 있지만.”
“그리고 플레이그 스톰은 통상 네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앞에 붙은 숫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 아마 지금 것은 제일 낮은 단계일 거야.”
“이곳 하바로프에는 높은 등급의 플레이그 스톰은 없었으니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딘은 플레이그 스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나니 왠지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대재앙 이후 여러 기후 변화 중에 이런 폭풍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런 폭풍들을 플레이그 스톰이라 부르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딘이 기억을 되살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에 잭슨이 또다시 말을 이었다.
“저놈의 플레이그 스톰 때문에 과학기술이 산업혁명 이전까지 되돌아갔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는 거야?”
“…….”
아이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대재앙 후 연이은 비행기 추락과 먹통이 되어 버린 전자기기들에 절망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단지 잘게 부서진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 있을 뿐 더 깊은 부분들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플레이그 스톰 때문이었구나.”
아이딘이 과거를 다시 한 번 회상하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아무튼 다행이야. 그리고 이거 하나 받아 둬.”
잭슨이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회중시계 크기의 기기를 풀어 아이딘에게 주었다. 아이딘은 잠시 기기를 살펴보더니 잭슨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허리에 차며 물었다.
“이건 뭐지?”
“라이프 체커(Life Checker)라고 해.”
“라이프 체커?”
“응.”
“뭐에 쓰는 물건이지?”
“뭐라 할까? 이 물건이 없으면 바깥에 돌아다니기 여러모로 곤란하지.”
꽤나 어설픈 설명이었으나 아이딘은 바로 알아들었다.
“플레이그 스톰 대비용?”
“물론이지. 그게 단순해 보이지만 꽤나 복잡한 기계인데, 그걸 차고 있으면 밖에서 얼마나 활동할 수 있는지를 바로 알 수 있거든.”
호퍼가 거들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 동네 저 동네 다닐 수 있는 거지.”
“근데 이거 나 주면 너는?”
“빨리 마을에 가서 하나 더 구하면 되니까. 요새 전쟁 때문에 수급이 좀 딸린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쉽게 구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잘 받을게.”
“그럼 이제 어서 돌아가자고.”
호퍼가 배낭을 짊어진다. 잭슨 역시 배낭을 짊어진다. 경황이 없어 내던지고 뛸 수도 있었는데 잘 챙겨 오다니 참 우직한 녀석들이다.
“폭풍이 있을 때는 만사 제치고 집에 있는 게 최고라니까.”
“빨리 가서 예리엘에게 밥이나 달라고 하자.”
“그래, 우리 어서 가자.”
아이딘은 갑자기 흥이 나서 앞장서는 두 덩치의 뒤를 따랐다. 왠지 황량한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구석 하나는 마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 *
원샷에 돌아온 후 잭슨과 호퍼는 가게를 닫기 전까지 몇 가지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도와주다가 점심에다 저녁까지 먹고는 돌아갔다.
두 덩치들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예리엘이 못마땅한 표정을 잔뜩 지은 채 식사를 준비해 주었지만 두 덩치가 갈 때쯤 되어서는 예리엘의 마음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밥값은 해야 한다고 남자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가게의 이곳저곳을 잘 손봐 주고 간 덕분이다.
특히나 물이 잘 안 빠져 고생했던 배수구를 고친 호퍼의 접시에는 소시지가 잭슨과 아이딘보다 무려 두 개나 더 놓여 있기도 했다. 그리고 두 녀석 모두 워낙 거친 성격의 녀석들이지만 막상 겪어 보니 의외로 순진하고 단순한 면이 많아 아이딘뿐만 아니라 예리엘까지 안심했다.
무엇보다 여러 번 혼쭐이 났음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열심히 부산을 떠는 모습이나 식사시간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며 예리엘에게까지 쭈뼛쭈뼛하는 모습에 약간은 미안한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예리엘이 고민 끝에 완성시킨 ‘노동일과표’에 따라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오전은 시장에 다녀오면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오후에는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원샷에서 주된 수입원이 되는 총기 개조에는 의외로 손이 많이 갔다. 예리엘이 기존 부품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자기의 입맛에 맞춰 새롭게 부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용광로에 선반, 밀링까지 쇠를 달구고 깎는 등의 부수적인 일들에 꽤나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말이 건스미스지 때에 따라서는 총을 아예 새로 하나 만들어 내는 것 같은 경우까지 있었다. 이렇다 보니 힘 좋은 남자들의 도움이 의외로 큰 힘이 되었다. 여자 혼자 힘으로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는데 아이딘에 두 덩치까지 있어 매우 든든해졌다.
어느덧 밤 11시. 예리엘이 가게 문을 닫았다. 이미 손님이 끊긴 지 오래였으나 특별한 일도 없이 가게 문을 늘 이렇게 늦게까지 열어 놓고는 했다.
“흐아아암!”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예리엘이 기지개를 쫙 폈다.
“그럼 나 자러 갈게.”
아이딘이 눈치껏 작업대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리고 창고로 향한다. 예리엘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럼 굿나이트.”
아이딘이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선다. 멀뚱히 서서 잠시 창고 문을 바라보는 순간 오늘도 예외 없이 철그렁 쇠사슬 소리와 함께 철컥 하며 자물쇠가 잠긴다. 그제야 아이딘은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매트리스에 몸을 누인다. 그리고 생각에 빠져든다.
“나는…… 누구지?”
또다시 이렇게 창고 안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자 왠지 좀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문이 든다.
과거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머리를 맴돌 뿐이다. 기억의 끝자락을 어떻게든 잡으려 애써 보지만 더 깊이 생각할수록 밀려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두통뿐이다. 마치 기억을 막는 방어벽처럼 생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두통의 벽은 높아져 갈 뿐이다.
아이딘은 깨어질 듯이 아픈 머리를 쥐어 싼 채 잠시 머릿속을 비워 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의 생활이 나름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도 느껴진다.
새로운 이름으로 이곳에서 생활한 지 나흘째, 잘 떠오르지 않는 과거에 반해 이곳에서의 생활은 마음의 평온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 머물게 해 준 예리엘이나 거칠게 사귀게 된 두 덩치까지도. 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기억의 저편은 지금의 평온함을 시기하듯 막연한 불안감으로 남아 있다.
아이딘은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문득 사라진 두통이 또다시 생길까 하는 염려에.
‘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겠지?’
또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또 예리엘이 가져간 그 권총은 또 무엇이지?’
그냥 정신을 잃은 숲에서부터 갖고는 있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그 총을 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또다시 찾아온 투통에 아이딘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에이. 관두자.”
그는 또다시 머리를 뒤흔들며 눈을 감았다. 문득 예리엘의 맛있는 비스킷이 떠올랐다.
보리 특유의 거친 식감, 그리고 입안에서 부서지는 달콤함과 목 넘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비스킷을 먹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달콤한 생각에 어느덧 두통은 사라지고 평온한 기분이다.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아이딘의 얼굴에 아까의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는 듯 약간의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알트마이어는 모니터에 표시된 복잡한 자료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눈이 돌아갈 만큼 어렵고 방대한 연구 자료들이었지만, 그에겐 이것이 매우 평범한 일상이었다.
연방 최고의 과학자 닉스, 에바와 더불어 닉스 연방의 근간을 이루는 과학기술의 핵심. 그가 괜히 천재 과학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삐-.
출입을 요청하는 버저소리가 울렸다.
“들어오게.”
알트마이어의 입에서 밤샘 연구의 후유증인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렉셀이었다. 그는 모니터에 집중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알트마이어에게 목례한 후 말했다.
“보고 드립니다. 지난주에 새롭게 실험체 12구의 소재지를 파악하여 제거팀을 보낸 결과 모두 생포, 또는 사살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소재가 파악된 19구에 대해서도 제거팀이 출동했습니다.”
알트마이어는 렉셀의 보고를 건성으로 들었다. 매주 반복해 들어 왔던 얘기였다. 어차피 어설픈 실험체들이야 조금 소란이 일겠지만 소재지만 밝혀지면 모두 생포하거나 사살될 것이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녀석들은?”
“네?”
“그 녀석들은 어찌 되었나?”
렉셀이 쥐어짜 내듯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 탈출한 변형 실험체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만 4년이 넘도록 반복되는 실망스러운 답변에 짜증이 나 있는 알트마이어였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똑같은 대답을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할 터였다.
알트마이어도 잘 알고 있었다. 대재앙 이후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황량한 폐허 속에서 실험체 하나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렉셀이 밤낮으로 그 녀석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적어도 이런 일에 있어 렉셀은 성실함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급했다. 여전히 일이 풀리지 않는 상황은 알트마이어를 계속 긴장시켰다. 그래도 어떻게든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해답은 바로 그 변형 실험체에 있었다.
“알았네, 계속 찾아보게.”
“네.”
렉셀이 연구실을 나가자 홀로 남은 알트마이어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 녀석은 도대체…….”
밤새 한숨도 못 자 붉게 충혈된 알트마이어의 눈에 피로와 아쉬움이 교차한다.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는 힘든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 * *
쏴아아아아아.
아이딘은 샤워를 했다. 대재앙 이후 물이 부족하다고는 했지만 물의 소비량도 줄어든 인구수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펑펑 쓸 입장은 아니었다.
강성욱 작가